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그건 당신의 착각이다
예일대학교에는 강의를 할 때마다 항상 책상 위에 올라가 ‘책상 교수님’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교수가 있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과 더불어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 철학자로 “대중철학 강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 받는 셸리 케이건 교수.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대한민국에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 셸리 케이건 교수를 서면으로 만났다.
2013.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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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죽음을 떠올릴 때, 대부분 공포와 두려움을 갖는다. 죽음은 두려운 존재이기에 어떻게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죽음은 찾아온다. 죽음을 다룬 대부분의 책들이 ‘죽음에 도달하는 과정, 인간은 모두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에 대해 다루는 반면,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는 그런 이야기들을 찾아볼 수 없다. 셸리 케이건 교수는 죽음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때 떠오르는 철학적인 질문, ‘죽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인간의 실체는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한다.
한국 독자들이 최근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보여준 뜨거운 관심은 아마 오랫동안 죽음에 대한 의문들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셸리 케이건 교수는 “죽음을 바라보면서 이를 거대한 미스터리, 너무 두려운 나머지 감히 마주할 수 없는 압도적이고 위협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결코 합리적인 태도가 아니며, 부적절한 반응이라고 말한다. 다만 너무 빨리 죽는다는 사실에 슬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삶의 기회를 부여받은 게 얼마나 놀라운 행운인지 이해함으로 인생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죽음, 영혼, 영생, 자살 등 다양한 질문과 주장을 논하고 있지만,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정말로 중요한 건 이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
죽음
교수님께서는 언제부터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죽음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방법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주제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철학 교수가 되고 나서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철학을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는가’였죠. 나아가 ‘철학이 삶의 나침반으로서 기능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철학을 위한 철학은 싫었습니다. 삶과 동떨어진 학문은 결국 학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합니다. 하지만 원래 철학은 늘 인간의 삶과 함께 있었어요. 경제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이면서 언제부턴가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으로 인식됐습니다. 다시 삶 속으로,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기존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으로 말이죠. 흔히 삶의 반대말로 죽음을 꼽습니다. 그런데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어요. 삶과 죽음의 역설, 바로 이거였죠. 다행히 첫 학기부터 학생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강좌가 개설될 때마다 수강 신청자 수가 늘었어요. 또한 제가 있는 예일대도 일찍이 학문의 대중화에 대한 열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열린예일강좌(Open Yale Courses)’ 프로젝트는 그 일환이죠. ‘죽음(DEATH)’ 강의도 당연히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이메일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강의실이라는 공간적 한계를 넘어 대중과 소통하게 된 것입니다.
변화
예일대 강의를 비롯해 25년간 죽음에 대해 강의를 해오고 계신데, 그간의 변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초기 강의와 현재 강의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예일대 이후와 이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음’ 강의를 처음 시작한 것은 제가 시카고 일리노이대에서 교편을 잡았던 1985년의 일입니다. 25년이 넘었죠. 물론 ‘죽음’처럼 교양철학 강의만 하는 건 아닙니다. 제 전공 수업은 윤리학입니다. 어쨌든 처음 이 ‘죽음’ 강의를 했던 때와 지금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좌 수가 늘어났죠. 지금은 마지막 3강에 ‘자살’이 추가돼 총26강 과정으로 진행하고 있지만 초창기에는 ‘자살’ 파트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죽을 운명에는 ‘스스로’ 삶을 마감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으므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판단했습니다. 더욱이 우리 사회에서는 자살을 끔찍하고 무서운 행위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인데, 정말로 그런지 이를 철학적으로 풀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이 밖에도 ‘죽음’과 관련해 논의해볼 수 있는 주제는 더 있겠죠. 가령 ‘타인에 의한’ 죽음인 ‘살인’이나 ‘사형’ 같은 주제가 강좌에 추가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통해 삶을 고찰한다’는 기본 취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질문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무엇인가요? 시대에 따라 질문도 변했을 것 같은데요.
매우 다양한 질문이 나옵니다. 하지만 제가 답해주지 못하는, 아니 답할 수 없는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일테면 “영원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이죠. 제가 알 리가 없잖아요. 사실 학생들은 뻔한 질문은 하지 않아요. “영혼이 있는가”, “죽음은 나쁜가” 이런 질문은 ‘죽음’ 강의의 핵심 질문이죠. 이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는 거니까요. 이들의 질문은 대체로 강의 중 나오는 사례에 관한 것들입니다. 제가 제시한 사례에 대한 연장선상에서의 질문들이죠. 해가 바뀌어도 대체로 비슷하지만 요즘은 SF 영화 때문인지 “텔레포트(순간이동)가 가능하다면 영혼도 나뉠 수 있는가”, “남녀가 인격은 그대로인 채 몸이 바뀌었다면 자신의 육체(사실은 이성의 육체)를 보고 성욕을 느끼는가”, “DNA를 통해 기억도 유전된다면 사실상 영생이라고 봐도 되지 않는가” 같은 기발한 질문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덕분에 물리학 책을 여러 권 읽었지요.
생각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201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살아갈 날이 1년 줄어들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삶을 변화시킬 기회도 점점 줄어가고 있어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삶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도 잊게 됩니다. 이 시간이 영원할 것 같다는 착각은 삶의 적절한 긴장감을 놓치게 하죠. 과장된 표현이지만 인생을 아무 생각 없이 살게 될 확률이 높아집니다. 죽음을 직시하면 현재의 삶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삶의 마지막이 누구에게나 조금씩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헛되게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삶의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인간에게 부여된 보편타당한 진리죠. 다시 말해 현재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유일한 진리가 바로 죽음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죽음이 과연 무엇인지, 진정 삶의 끝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는 건지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질문을 던져보고 해답을 찾으려고 해보는 거죠.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내 일입니다. 나는 지금 현명하게 남은 삶을 소비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게 중요합니다.
종교
교수님은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영생을 믿는 종교에 대해서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나요?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출간된 이후 한국 독자 분들로부터 이메일을 자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영혼은 정말 없는가”,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많더군요. 그리고 저를 ‘무신론자’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게도 종교가 있습니다. 저는 유대인이며 유대교 신자입니다. 어려서부터 유대교의 가르침 속에서 자랐습니다. 당연하게도 영혼이나 영생을 믿는 것을 비판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철학적 견지에서 물리주의자 입장을 취하고 있을 뿐 종교는 제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삶에 해악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종교는 우리에게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종교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죽음’ 강의를 하고 이 책을 쓴 게 아닙니다. 종교가 삶과 죽음에 관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철학은 종교가 아닙니다. 세상을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하고 설명하는 학문입니다. 인간의 사유로 영생이나 내세를 증명할 길은 없습니다. 때문에 논리적으로 죽음은 삶의 끝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존재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와 이성의 결론입니다. 종교적 신념과는 다른 맥락입니다.
자살
자살을 ‘합리적인 선택,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셨는데, 자살은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굉장한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까? 이런 면에서 볼 때는 ‘자살’은 본인을 떠나 제2, 제3의 피해자를 만들기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예일대 강의와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해 ‘자살’을 다루고 있습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자살이 합리적 선택일 수 있는지,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죠. 요컨대 저는 경우에 따라서 이 두 가지 요소를 충족시키는, 즉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자살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저를 자살 옹호론자인 것처럼 치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삶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신중하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자살은 크나큰 실수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삶이 극복 불가능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생각이 바로 그 실수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고통이 치유될 수 없고 삶이 나아질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판단은 대부분 착각입니다. 거의 전부 이성이 아닌 감정에 치우쳐 내린 결론입니다. 상처가 커서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는 부도덕한 일입니다. 그 상처를 줄이는 데 시간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동안 우리의 삶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연결돼 있습니다. 나만의 삶이 아닙니다.
조언
현재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끔찍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를 해주신다면, 어떤 말씀을 해주실 건가요?
자신의 삶이 극복 불가능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생각이 과연 ‘사실’인지 깊게 고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자살에 관하여’ 장에서 그래프까지 그려가며 자살이 합리적 선택이고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 즉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나은’ 지점이 어디인지 제시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살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지점이 오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큰 실수죠. 삶이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결코 삶의 가치를 경솔하게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라는 판단은 착각인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삶
“죽음의 본질을 이해하면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삶을 의미할까요?
살아가는 이유가 명확한 삶을 말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목표를 신중히 세웠는지,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삶의 이유가 각기 다르겠죠. 삶에서의 목표가 다를 것이고 추구하는 행복의 양상이 다를 것입니다. 사실 ‘가치 있는 삶’은 오늘날 ‘행복한 삶’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어요. 명예를 위해 목숨을 던지거나, 신념을 지키고자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일은 거의 없죠. 내가 행복하고 나아가 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나는 분명히 내 이익을 위해 행동했는데 그것이 결국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남을 위해 이타적으로 행동했는데 오히려 나에게 득이 되는 상황도 경험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렇지요? 여기서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저는 “어떻게 하면 삶을 가치 있게 살 수 있는가”라는 이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스로에게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은지(후회를 덜 하게 하는지) 힌트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스스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경우라 해도, 이 질문은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질문하고 생각하고, 이것이 올바른 삶의 태도인 것 같습니다.
정의
‘죽음’에 대해 가장 정확한 정의를 내린 철학자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저 혼자만의 생각으로 쓰여진 게 아닙니다. 말도 안 되지요.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부터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그리고 쇼펜하우어를 거쳐 토머스 네이글, 프레드 펠드먼, 데렉 파피트 등 현대 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위대한 철학자들, 거기에 제게 깊은 영감을 준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조너선 스위프트, 찰스 디킨스와 같은 훌륭한 작가들, 이 밖에도 이 책에서 사례로 등장하는 시인, 배우, 코미디언, 영화감독 등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죽음’은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각각의 여러 관점들이 있을 뿐이죠. 이 책은 철학적 관점에서 죽음에 관한 다양한 정의와 해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론 그 중에서 물리주의 관점을 취하고 있는 거고요. 그렇다고 제 관점이 옳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답은 아직 모릅니다. 우리 중엔 죽은 사람이 없고, 죽은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요.
철학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으며, 왜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교수님의 어린 시절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고등학교 때부터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걸 즐겼어요. 좀 더 정확하게는 뭔가 설명하기를 좋아했지요. 반대로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도 좋았어요. 생각을 많이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대부분 망상이었지만. 어린 시절 제 꿈은 목동이었어요. 드넓은 들판에 백여 마리 양을 풀어놓고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는, 양치기는 개가 하고… 아마 게으른 목동이 됐을 거예요. 전 소박하고 털털한 사람입니다. 평소 이런 복장을 좋아하는 것도 아마 이런 성향이 반영됐을 테지요.
힐링
한국은 최근 힐링(healing)에 대한 서적이 인기를 끌고 있고, 교수님의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도 베스트셀러에 올랐습니다. 위로를 받고 싶어 하는 마음 한편에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 이유에서 벌어진 현상일까요?
치유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학적으로 할 수 있는 ‘물리적’ 치유가 있겠고, 감성을 보듬는 ‘심리적’ 치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 더, 이성을 견고하게 해주는 ‘철학적’ 치유도 있을 수 있겠죠. 물론 이런 식으로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현상을 분석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측면이 있어요. 하지만 크게 무관하지는 않은 듯 보입니다. 실제로 살면서 겪게 되는 피로를 이성의 환기로 치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삶이 우울할 때 심리 치유 에세이가 아닌 실존주의나 생철학을 파고들죠. 하이데거와 니체, 샤르트르를 읽습니다.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우리의 이성을 차갑고 단단하게 해줍니다. 세파에 쉽게 휩쓸리지 않게 돕지요.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은 ‘죽음’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직 논리와 이성으로 삶과 죽음의 관계를 다루죠. 세상을 좀 더 명확하게 보게 해주려는 게 이 책의 목적입니다. 그것이 설령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해도 말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왜 그것이 합리적이지 않은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혀 다른 차원의 위안과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국 독자들이 최근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보여준 뜨거운 관심은 아마 오랫동안 죽음에 대한 의문들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셸리 케이건 교수는 “죽음을 바라보면서 이를 거대한 미스터리, 너무 두려운 나머지 감히 마주할 수 없는 압도적이고 위협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결코 합리적인 태도가 아니며, 부적절한 반응이라고 말한다. 다만 너무 빨리 죽는다는 사실에 슬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삶의 기회를 부여받은 게 얼마나 놀라운 행운인지 이해함으로 인생의 균형을 잡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죽음, 영혼, 영생, 자살 등 다양한 질문과 주장을 논하고 있지만,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정말로 중요한 건 이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
죽음
교수님께서는 언제부터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죽음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방법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주제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철학 교수가 되고 나서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철학을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는가’였죠. 나아가 ‘철학이 삶의 나침반으로서 기능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철학을 위한 철학은 싫었습니다. 삶과 동떨어진 학문은 결국 학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합니다. 하지만 원래 철학은 늘 인간의 삶과 함께 있었어요. 경제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이면서 언제부턴가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으로 인식됐습니다. 다시 삶 속으로,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기존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으로 말이죠. 흔히 삶의 반대말로 죽음을 꼽습니다. 그런데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있어요. 삶과 죽음의 역설, 바로 이거였죠. 다행히 첫 학기부터 학생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강좌가 개설될 때마다 수강 신청자 수가 늘었어요. 또한 제가 있는 예일대도 일찍이 학문의 대중화에 대한 열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열린예일강좌(Open Yale Courses)’ 프로젝트는 그 일환이죠. ‘죽음(DEATH)’ 강의도 당연히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이메일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강의실이라는 공간적 한계를 넘어 대중과 소통하게 된 것입니다.
변화
예일대 강의를 비롯해 25년간 죽음에 대해 강의를 해오고 계신데, 그간의 변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초기 강의와 현재 강의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예일대 이후와 이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음’ 강의를 처음 시작한 것은 제가 시카고 일리노이대에서 교편을 잡았던 1985년의 일입니다. 25년이 넘었죠. 물론 ‘죽음’처럼 교양철학 강의만 하는 건 아닙니다. 제 전공 수업은 윤리학입니다. 어쨌든 처음 이 ‘죽음’ 강의를 했던 때와 지금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좌 수가 늘어났죠. 지금은 마지막 3강에 ‘자살’이 추가돼 총26강 과정으로 진행하고 있지만 초창기에는 ‘자살’ 파트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죽을 운명에는 ‘스스로’ 삶을 마감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으므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판단했습니다. 더욱이 우리 사회에서는 자살을 끔찍하고 무서운 행위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인데, 정말로 그런지 이를 철학적으로 풀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이 밖에도 ‘죽음’과 관련해 논의해볼 수 있는 주제는 더 있겠죠. 가령 ‘타인에 의한’ 죽음인 ‘살인’이나 ‘사형’ 같은 주제가 강좌에 추가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통해 삶을 고찰한다’는 기본 취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질문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무엇인가요? 시대에 따라 질문도 변했을 것 같은데요.
매우 다양한 질문이 나옵니다. 하지만 제가 답해주지 못하는, 아니 답할 수 없는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일테면 “영원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야 하는가”와 같은 물음이죠. 제가 알 리가 없잖아요. 사실 학생들은 뻔한 질문은 하지 않아요. “영혼이 있는가”, “죽음은 나쁜가” 이런 질문은 ‘죽음’ 강의의 핵심 질문이죠. 이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는 거니까요. 이들의 질문은 대체로 강의 중 나오는 사례에 관한 것들입니다. 제가 제시한 사례에 대한 연장선상에서의 질문들이죠. 해가 바뀌어도 대체로 비슷하지만 요즘은 SF 영화 때문인지 “텔레포트(순간이동)가 가능하다면 영혼도 나뉠 수 있는가”, “남녀가 인격은 그대로인 채 몸이 바뀌었다면 자신의 육체(사실은 이성의 육체)를 보고 성욕을 느끼는가”, “DNA를 통해 기억도 유전된다면 사실상 영생이라고 봐도 되지 않는가” 같은 기발한 질문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덕분에 물리학 책을 여러 권 읽었지요.
생각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201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살아갈 날이 1년 줄어들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삶을 변화시킬 기회도 점점 줄어가고 있어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삶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도 잊게 됩니다. 이 시간이 영원할 것 같다는 착각은 삶의 적절한 긴장감을 놓치게 하죠. 과장된 표현이지만 인생을 아무 생각 없이 살게 될 확률이 높아집니다. 죽음을 직시하면 현재의 삶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삶의 마지막이 누구에게나 조금씩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헛되게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삶의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인간에게 부여된 보편타당한 진리죠. 다시 말해 현재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유일한 진리가 바로 죽음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죽음이 과연 무엇인지, 진정 삶의 끝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는 건지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질문을 던져보고 해답을 찾으려고 해보는 거죠.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내 일입니다. 나는 지금 현명하게 남은 삶을 소비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게 중요합니다.
종교
교수님은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영생을 믿는 종교에 대해서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나요?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출간된 이후 한국 독자 분들로부터 이메일을 자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영혼은 정말 없는가”, “천국과 지옥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많더군요. 그리고 저를 ‘무신론자’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게도 종교가 있습니다. 저는 유대인이며 유대교 신자입니다. 어려서부터 유대교의 가르침 속에서 자랐습니다. 당연하게도 영혼이나 영생을 믿는 것을 비판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철학적 견지에서 물리주의자 입장을 취하고 있을 뿐 종교는 제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삶에 해악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종교는 우리에게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종교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죽음’ 강의를 하고 이 책을 쓴 게 아닙니다. 종교가 삶과 죽음에 관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철학은 종교가 아닙니다. 세상을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하고 설명하는 학문입니다. 인간의 사유로 영생이나 내세를 증명할 길은 없습니다. 때문에 논리적으로 죽음은 삶의 끝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존재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와 이성의 결론입니다. 종교적 신념과는 다른 맥락입니다.
자살
자살을 ‘합리적인 선택,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셨는데, 자살은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굉장한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까? 이런 면에서 볼 때는 ‘자살’은 본인을 떠나 제2, 제3의 피해자를 만들기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예일대 강의와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해 ‘자살’을 다루고 있습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자살이 합리적 선택일 수 있는지,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죠. 요컨대 저는 경우에 따라서 이 두 가지 요소를 충족시키는, 즉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자살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저를 자살 옹호론자인 것처럼 치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삶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신중하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자살은 크나큰 실수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삶이 극복 불가능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생각이 바로 그 실수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고통이 치유될 수 없고 삶이 나아질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판단은 대부분 착각입니다. 거의 전부 이성이 아닌 감정에 치우쳐 내린 결론입니다. 상처가 커서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는 부도덕한 일입니다. 그 상처를 줄이는 데 시간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동안 우리의 삶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연결돼 있습니다. 나만의 삶이 아닙니다.
조언
현재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끔찍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를 해주신다면, 어떤 말씀을 해주실 건가요?
자신의 삶이 극복 불가능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생각이 과연 ‘사실’인지 깊게 고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자살에 관하여’ 장에서 그래프까지 그려가며 자살이 합리적 선택이고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 즉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나은’ 지점이 어디인지 제시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살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지점이 오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큰 실수죠. 삶이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결코 삶의 가치를 경솔하게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라는 판단은 착각인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삶
“죽음의 본질을 이해하면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삶을 의미할까요?
살아가는 이유가 명확한 삶을 말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목표를 신중히 세웠는지,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삶의 이유가 각기 다르겠죠. 삶에서의 목표가 다를 것이고 추구하는 행복의 양상이 다를 것입니다. 사실 ‘가치 있는 삶’은 오늘날 ‘행복한 삶’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어요. 명예를 위해 목숨을 던지거나, 신념을 지키고자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일은 거의 없죠. 내가 행복하고 나아가 내 주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나는 분명히 내 이익을 위해 행동했는데 그것이 결국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남을 위해 이타적으로 행동했는데 오히려 나에게 득이 되는 상황도 경험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렇지요? 여기서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저는 “어떻게 하면 삶을 가치 있게 살 수 있는가”라는 이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스로에게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은지(후회를 덜 하게 하는지) 힌트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스스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경우라 해도, 이 질문은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질문하고 생각하고, 이것이 올바른 삶의 태도인 것 같습니다.
정의
‘죽음’에 대해 가장 정확한 정의를 내린 철학자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저 혼자만의 생각으로 쓰여진 게 아닙니다. 말도 안 되지요.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부터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그리고 쇼펜하우어를 거쳐 토머스 네이글, 프레드 펠드먼, 데렉 파피트 등 현대 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위대한 철학자들, 거기에 제게 깊은 영감을 준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조너선 스위프트, 찰스 디킨스와 같은 훌륭한 작가들, 이 밖에도 이 책에서 사례로 등장하는 시인, 배우, 코미디언, 영화감독 등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죽음’은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각각의 여러 관점들이 있을 뿐이죠. 이 책은 철학적 관점에서 죽음에 관한 다양한 정의와 해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론 그 중에서 물리주의 관점을 취하고 있는 거고요. 그렇다고 제 관점이 옳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답은 아직 모릅니다. 우리 중엔 죽은 사람이 없고, 죽은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요.
철학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으며, 왜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교수님의 어린 시절의 꿈은 무엇이었나요?
고등학교 때부터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걸 즐겼어요. 좀 더 정확하게는 뭔가 설명하기를 좋아했지요. 반대로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도 좋았어요. 생각을 많이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대부분 망상이었지만. 어린 시절 제 꿈은 목동이었어요. 드넓은 들판에 백여 마리 양을 풀어놓고 나무 그늘에 앉아 책을 읽는, 양치기는 개가 하고… 아마 게으른 목동이 됐을 거예요. 전 소박하고 털털한 사람입니다. 평소 이런 복장을 좋아하는 것도 아마 이런 성향이 반영됐을 테지요.
힐링
한국은 최근 힐링(healing)에 대한 서적이 인기를 끌고 있고, 교수님의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도 베스트셀러에 올랐습니다. 위로를 받고 싶어 하는 마음 한편에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 이유에서 벌어진 현상일까요?
치유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학적으로 할 수 있는 ‘물리적’ 치유가 있겠고, 감성을 보듬는 ‘심리적’ 치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 더, 이성을 견고하게 해주는 ‘철학적’ 치유도 있을 수 있겠죠. 물론 이런 식으로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현상을 분석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측면이 있어요. 하지만 크게 무관하지는 않은 듯 보입니다. 실제로 살면서 겪게 되는 피로를 이성의 환기로 치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삶이 우울할 때 심리 치유 에세이가 아닌 실존주의나 생철학을 파고들죠. 하이데거와 니체, 샤르트르를 읽습니다.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우리의 이성을 차갑고 단단하게 해줍니다. 세파에 쉽게 휩쓸리지 않게 돕지요.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은 ‘죽음’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직 논리와 이성으로 삶과 죽음의 관계를 다루죠. 세상을 좀 더 명확하게 보게 해주려는 게 이 책의 목적입니다. 그것이 설령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해도 말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왜 그것이 합리적이지 않은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혀 다른 차원의 위안과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 DEATH 죽음이란 무엇인가 셸리 케이건 저/박세연 역 | 엘도라도
이 책은 셸리 케이건 교수가 1995년부터 예일대에서 진행해온 교양철학 정규강좌 ‘DEATH’를 새롭게 구성한 것으로, ‘죽음’의 본질과 ‘삶’의 의미 그리고 ‘생명’의 존엄성을 고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DEATH’는 하버드대 ‘정의’및 ‘행복’과 함께 ‘아이비리그 3대 명강’으로 불리는 강의이며,17년 연속 예일대 최고의 명강의로 꼽혔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동안 우리가 생각해왔던 심리적 믿음과 종교적 해석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논리와 이성으로 죽음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고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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