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장동 우시장처럼 로마에도 도축장 옆에 큰 시장이 있다. 바로 테스타초 시장이다. 소를 도축하고 남은 내장을 팔다가 자연스레 형성된 곳이다. 시장 옆 곱창집, 소머리 국밥집처럼 테스타초 시장 근처에도 내장 냄새 물씬 풍기는 실비집들이 있다. 도축장은 이미 사라졌지만, 시장과 실비집들은 그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역사 깊은 맛집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펠리체는 빼놓을 수 없다. 항상 꽉꽉 차 있는 예약에서도 알 수 있지만, 로마 유명 레스토랑 주인들과 맛집 얘기를 나눌 때도 항상 빠지지 않았던 곳이다.
“펠리체, 나도 오래전부터 그곳의 단골이지요.”
어릴 적 엄마 손 잡고 드나들던 때가 떠오르는지 이곳을 얘기하며 입맛을 다시곤 했다. 그런 그곳의 주방을 엿볼, 아니 당당히 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주방을 보여 줄게요. 하지만 영업 시작 1시간 전에 꼭 시간을 맞춰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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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시간에 칼같이 맞춰 갔는데 레스토랑은 금요일 저녁 영업 준비로 분주하다. 주인은 나의 방문이 그다지 탐탁지 않은지 표정이 굳어 있다. 슬슬 눈치를 보고 있는데 안에서 주방장 모자를 쓴 남자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면서 나타난다. 이곳의 셰프인 살바토레 티스초네.
‘그냥 주방만이 아니라 요리하는 모습도 볼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스쳐 가기 무섭게 그는 나를 잡아끈다.
“주방을 볼래요? 파스타 만드는 것을 보여 줄게요.”
동작이 재빠르면서도 어딘가 여유가 넘쳤다.
“카초 페페Cacio Pepe를 만들 거예요.”
그대로 해석한다면 후추 치즈 파스타. 로마의 공식 파스타라 할 정도로 이곳에서 즐겨 먹는 파스타다. 로마 대표 트라토리아(Trattoria, 고급 레스토랑보다 좀 더 대중적인 형태의 식당)에서 주방장이 로마 대표 파스타를 보여 준다니, 아주 신이 났다.
먼저 파스타를 삶을 물에 소금을 뿌린다. 종이에 싸 두었던 생면을 한 움큼 쥐고 손으로 톡톡 흔들며 넣어 준다. 그리고 면을 삶기 시작한다. 한 5분쯤 지났을까? 면을 몇 가닥 들어 본다. 잘 익었는지를 한눈에 알아보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면을 건져 내어 금속 통에 담는다. 일부를 하얀 접시에 담고 거친 후추를 팍팍 뿌린다. 올리브유도 살짝 끼얹고 파스타 삶은 물을 슬슬 뿌린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페코리노 치즈를 들이붓다시피 듬뿍 뿌리고 자장면 비비듯 쓱쓱 비빈다.
한 1분쯤 걸렸을까. 그런데, 그걸로, 끝이다. 너무도 간단한 과정에 맥이 조금 풀린다. 이것이 로마 최고의 트라토리아에서 대표 메뉴를 만드는 과정이라니. 하긴 이탈리아의 진짜 맛들은 항상 이러한 단순함 속에 있었다. 갓 짜서 향내가 진동하는 에메랄드빛 올리브유, 담백하고 신선한 치즈, 만드는 사람의 솜씨만 좋으면 거기에 두어 가지 재료만으로 ‘진짜 이탈리아 요리’ 뚝딱이다. 로마를 대표하는 파스타, 카초 페페. 사실 치즈도, 후추도, 올리브유도 어찌 보면 소스라기보다는 그냥 파스타 면의 맛을 내는 양념에 가깝다. 그리고 이것이 진짜 이탈리아 파스타다. 사실 카초 페페에는 아주 옛날부터 파스타를 만들던 방식이 담겨 있다. 우리가 보통 스파게티 소스라고 알고 있는 토마토소스가 쓰인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16세기 초에 토마토가 유럽에 전해졌지만, 그것을 스파게티 소스로 만들어 먹게 된 것은 그로부터 300년이 지나서이다. 그전까지 보통 사람들은 파스타 면에 치즈 가루를 뿌리고 적당히 비벼 손으로 집어 먹곤 하였다.
그 단순함이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일까? 포크를 쥐여주며 먹어 보라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통통한 면발에 후추와 진한 페코리노 치즈가 녹아내린다. 첫맛에 ‘와’ 하게 되는 맛은 아니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포크를 놓지 못하게 하는 맛. 입에 착착 달라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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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토레는 여기서 끝내지 않고 교과서처럼 끊임없이 ‘로마 대표 요리’를 선보인다. 오븐을 열어 구운 양고기 요리를 통째로 꺼내 보인다. 아바키오(Abbacchio, 풀을 한 번도 뜯어 본 적 없는, 우유만 먹은 어린 양을 통째로 구운 로마식 구이 요리) 한 토막을 쓱 썰어 접시에 내놓는다. 토마토소스를 듬뿍 묻힌 대구 요리, 로마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티초크 한 덩이도 식탁을 채운다. 그야말로 로마식의 푸짐한 상차림 완성. 거기에 나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귀여운 요리사들이 자기도 사진을 찍겠다며 자연스레 어깨동무를 하며 포즈를 잡아 준다. 어느새 얼굴이 누그러진 주인아저씨까지 가세해 자연스레 그림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마스카르포네 치즈(Mascarpone, 이탈리아의 부드러운 크림치즈)가 향기로운 특제 티라미수를 맛보고 일어날 채비를 하였다. 돌아 나오며 홀을 둘러보니 여럿이 둘러앉는 테이블이 유독 많다. 왠지 연인보다는 편한 친구 여럿이, 아니면 가족들과 함께 오고 싶은 곳. 단순하고 짭짤한 맛의 카초 페페를 허물없는 사람들과 실컷 나눠 먹고 싶다.
어떤 이들은 이런 이탈리아 음식을 쿠치나 포베라(Cucina Povera, 가난한 음식)라고 한다. 땅에서 나는 질 좋은 재료로 신선하게 만든 건강 음식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프랑스 요리처럼 세련되지 못함을 비꼬는 말로도 쓰인다. 그러나 가난한 음식을 거꾸로 얘기하면 부자는 못 따라가는 음식이다. 아무리 최신 교육으로 무장한 날렵한 셰프라도 엄마의 따뜻한 손바닥 체온과 채소 주무르는 힘을 따라갈 수 있을까? 귀한 재료 다 들어간 신선로보다 엄마가 만든 시래깃국이 자꾸 먹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그 솜씨도, 그 재료도 그 땅에서 묵혀 온 것이 최고다. 그 땅의 풀을 먹고 자란 소에서 짠 우유로, 그곳 물에 씻긴 치즈는 그곳 바람에 솔솔 익어 간다. 언제 적부터인지(족보 한 권도 넘칠 듯한) 알 수도 없이 대대로 내려오는 손맛. 살다 보면 할머니와 엄마의 손끝은 온도도 닮아 간다. 몇 그램을 넣고 몇 센티로 썰라는 메모 한 장 내려온 적 없지만 엄마의 딸들은, 그리고 또 그 딸들은 엄마의 비법에 자연스레 동화된다. 그래서 다른 피가 흐르고, 다른 땅을 밟고 살았던 사람들은 절대로 똑같이 맛을 낼 수 없는 음식. 그런 이탈리아 음식이 좋다.
끊임없는 도전과 변화, 이러한 가치를 만만하게 보는 건 아니다. 그러나 항상 그리운 것은 멋진 음식보다는 편하고 따뜻한 음식. 이탈리아 어디를 가나 제대로 된 집에서 먹는 옛날 메뉴들은 국수 한 접시에도 엄마의 손맛이 난다(그리고 진짜 엄마 요리사들이 많다). 첫맛에 눈이 번쩍 뜨이진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간간이 생각나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펠리체 Felice
주소 Via Mastro Giorgio 29
전화 06 574 6800
오픈 월~토요일 12:30~15:00, 20:00~23:30, 일요일 12:30~15:00
휴무 8월 셋째 주
예산 25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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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9
천사
2012.03.15
앙ㅋ
2012.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