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큰롤을 미래로 돌려보낸 사나이
백인인 엘비스가 보컬리스트로서 록음악에 절대적인 여파를 미쳤다고 한다면, 흑인인 척 베리는 곡 쓰기(특히 작사에서)와 연주의 측면에 있어서 같은, 혹은 더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진다.
2009.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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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영욕의 삶이었다. 강도, 매춘, 탈세에 이르기까지 철창행 도합 3회에 빛나는 화려한 이력. 불현듯 찾아온 엄청난 부와 명예, 몰락, 그리고 재기……. 이것은 어느 유명한 범죄자나 갱스터 래퍼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꼬맹이 시절 열광했던 한 편의 영화가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벌이는 모험을 담은 호쾌한 어드벤처 영화. 이름하여 <백 투 더 퓨처>! 세월은 흘러 어느덧 계란 한 판으로 셀 수 있는 나이를 넘어선 지금이지만, 그 영화의 피날레 신을 볼 때면 그 시절 그 순간의 쾌감이 눈사태처럼 밀려드는 건 여전할 따름이다. 주인공 마티(마이클 J. 폭스)가 별안간 무도회장에서 기타를 메고 연주를 시작하는 장면이다. 마티는 조용한 발라드를 연주하는가 싶더니 돌연 록큰롤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피날레의 서막이다.
「Go Johnny go, go!」 그야말로 쾌감의 극치! 꿈과 모험이 펼쳐진 후에, 록큰롤로서 절정을 맞이한다. 처음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매일 밤 이어지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의 리사이틀. 손에는 기타 대신 빗자루가 쥐어져 있었고, 극 중 마티가 하던 오리걸음을 열심히 흉내 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인가 지나고 나서 그 곡의 오리지널을 부른 자가 척 베리였음을 알게 되었다. 마티의 그 멋진 오리걸음 퍼포먼스 또한 그 양반의 오마주였다는 것도 말이다. 사실 원곡을 처음 듣고 나서는 엄청난 실망이 몰려왔다. “이게 뭐야, <백 투 더 퓨처>보다 후지잖아!” 척 베리의 위대함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 진짜 일렉트릭 기타를 손에 넣고 밴드를 시작할 때부터였다.
서설이 길어졌다. 단언하건대 지구상 거의 모든 록 기타리스트들은 척 베리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또 단언컨대 나는 지금 오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만약 기타 리프에도 저작권이란 것이 유효하거나 특허권이 있다면, 그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거부가 되었을 것이다. 록 기타의 교과서라 불릴 만한 「Johnny B Goode」 「Roll Over Beethoven」 등의 곡에서 그가 필살기로 사용했던 예의 그 위대한 기타 리프, ‘쨔쟈쟈쟈쟈쟈쟈쟈쟈쟈쟈…….’를 자신의 곡에 ‘무단 도용’한 적이 없는 뮤지션이란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다. 이것은 그의 이 저명한 리프가 예를 들어 힙합 뮤직에서 비롯된 샘플링에 의한 과거 히트곡의 재사용 따위는 유도되지 않을 만큼 무수한 곡에서 사용되어 왔다는 말이다.
저 유명한 롤링 스톤즈를 예로 들어, 밴드 사운드의 구심점을 맡고 있는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드의 연주가 바로 척 베리의 그것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직접 척 베리에게 헌정하는 의미로 제작한 1986년도의 다큐멘터리(‘록큰롤 만세’쯤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 제목에서 hail은 미국에서 미국 대통령이 대중을 상대로 한 공식 석상에 나올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Hail to the Chief”에도 들어가는 단어다. 대통령이라는 말을 갖다 붙인 것도 아니고 왕이란 말을 갖다 붙인 것도 아니고, 척 베리를 록큰롤 그 자체로 추앙하는, 극도의 찬사를 담은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을 굳이 들먹이지 않는다고 해도 명백하다. 또한 비치 보이스의 61년도 메가 히트곡 「Surfin’ USA」가 사실은 척 베리의 「Sweet Little sixteen」을 살짝 바꾸었을 뿐인 노래라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척 베리가 이에 비치 보이스를 고소하여 승소하였다. 결과는 「Surfin’ USA」란 곡의 작곡자로서 척 베리가 크레디트를 갖고 앨범에 대해 일정한 인세권을 갖기로 되었다.)
백인인 엘비스가 보컬리스트로서 록음악에 절대적인 여파를 미쳤다고 한다면, 흑인인 척 베리는 곡 쓰기(특히 작사에서)와 연주의 측면에 있어서 같은, 혹은 더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진다. 안타깝게도 그는 모든 영광을 스스로 저지른 과오에 의해 순식간에 잃게 되고, 그 후 오랫동안 그의 음악이 가지는 빛나는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게 된다.
척 베리는 1926년 10월 18일 캘리포니아 주의 산호세에서 태어났다. 무려 여섯 명의 자녀를 슬하에 둔 그의 부친은 좀 더 번듯한 일자리를 찾아 세인트루이스로 이주를 하게 된다. 대부분의 흑인 아티스트가 그러했듯, 척 베리도 여섯 살 무렵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어린 시절 회고에 따르면 그는 날마다 부친이 만든 ‘허니 밀크’를 마셨다고 하는데, 그 덕분인지 남달리 우람한 체격의 거친 머슴아로 성장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능과 취미를 가졌던 척 베리가 청중 앞에 처음 나선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그리하여 음악에 꿈을 품는가 싶더니, 비슷한 무렵에 동네 나쁜 형아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그는 열일곱 나이에 자동차를 훔친 죄로 소년원에 입소, 첫 번째 훈장을 달고 만다.
수감 기간 3년 동안 절치부심한 그는 출소 후 뮤지션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어느 시점엔가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 굶어 죽을 걱정은 없었다고 한다. 당시 세인트루이스는 재즈뿐만이 아닌, 리듬 앤 블루스의 중심지로도 명성이 높았다. 냇 킹 콜 같은 스탠더드 재즈 싱어에서부터 티 본 워커나 머디 워터스 같은 블루스 맨 그리고 재즈 기타리스트 찰리 크리스천 등의 레전드급 아티스트들이 그곳 출신이었고, 이들의 음악은 향후 척 베리의 음악적 모태가 되었다. 그는 코스모폴리탄이라는 클럽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곧 자신의 밴드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클럽 활동을 하던 와중에도, 먹여 살릴 처자식이 있었던 그는 GM 자동차 공장에 다녔다. 이용/미용사 자격증에 자동차 공장까지, 그는 꿈을 좇겠다고 현실의 생활 문제는 나 몰라라 한다기보다는 생활을 이끌어가기 위해 꽤나 바지런을 떨던 생계형 뮤지션이었던 셈이다. 무명의 뮤지션이야 음악으로 소득원을 찾기가 힘드니 자의든 타의든 ‘투 잡’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클럽에 들른 블루스의 대가 머디 워터스가 척의 연주를 눈여겨보고 자신이 소속해 있던 레이블 체스의 사장에게 직접 소개하기에 이른다. “오호라~ 기회는 찬스다!” 1955년 시카고 체스 스튜디오에서 대망의 첫 싱글 「Maybellene」을 녹음한다. 이곡은 당시 인기 DJ였던 앨런 프리드(일명 ‘미스터 록큰롤’인 그는 초기 록큰롤 음악 보급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나, 1959년 뇌물 수수 사건에 휘말려 신세를 망치고 만다)의 입김에 힘입어 전미 차트 5위에 오르게 되고, 블루스에 컨트리 리듬을 믹스한 최초의 크로스오버 중 하나로 기록된다(이 곡이야말로 최초의 록큰롤 넘버라는 견해도 있다).
뒤이은 싱글 「Roll Over Beethoven」이 발표될 즈음엔 이미 록큰롤의 아이돌 스타로 자리 매김 되고 있었다. 동시대 엘비스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 제작자 같은 인사들이 벌떼처럼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고, 몇 편의 영화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57년에서 58년 사이에 「School Day」 「Rock and Roll Music」 「Sweet Little Sixteen」 「Johnny B Goode」 「Carol」 같은 록의 고전을 잇달아 발표하며 명실상부 최정상의 위치에 군림하게 된 척 베리. 일개 피라미 범죄자에서 ‘안타 제조기’로 단박에 신화적 존재가 되어버린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몸소 실천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성공의 달콤함도 잠시……. 곧이어 닥칠 시련의 나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미국의 기성세대들은 요란한 비트와 방탕한 노랫말에 열광하는 아이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록큰롤 가수들이 일제히 ‘악의 무리’로 규정지어졌다. “백 번 양보해서 엘비스는 그렇다 쳐도, 깜둥이라니!” 척 베리는 흑인 최초의 아이돌이자 록 스타였고 그를 향한 백인 꼰대들의 시선이 고울 리 만무했다. 이내 올가미가 씌워지는데, 1959년 12월 그는 ‘The White Slave Traffic Act’(이 법안은 ‘매춘 등의 부도덕한 목적으로 부녀자를 데리고 주 경계선을 넘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법 조항으로 발의한 제임스 로버트 만의 이름을 따서 만의 법령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라는 법령에 의거하여 체포된다. 그는 열네 살의 백인 소녀를 뉴멕시코라든가, 텍사스라든가, 하여간 남부 어느 주에서 데리고 그의 전미 투어에 동행하며 매춘을 강요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는다. 다분히 인종차별적인 표적 수사이며 가혹한 처사라는 동정 여론이 일어난 덕분에 곧 징역 3년으로 감형되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커리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을 철창 속에서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1963년에 비로소 두부를 얻어먹게 된 척 베리는 곧바로 음악 활동을 재개한다. 하지만 오리지널 록큰롤의 시대는 이미 지난 지 오래, 출소를 해보니 영국에서 대서양 물을 건너온 네 명의 꼬마들이 전 미국을 뒤흔들며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었다.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시작과 함께 그 덕을 아주 못 본 바는 아니다. 하지만 간간히 근근한 히트곡을 발표하며 활동을 이어갔음에도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60년대가 지나 1972년 「My Ding a Ling」(의역하자면 ‘나의 OO’)이란 노래가 느닷없이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땐 이미 중늙은이가 된 왕년의 스타일뿐이었다. 그러던 중 1979년에는 탈세 혐의로 또다시 3개월간 콩밥을 먹어야 하는 신세가 된다.
그렇게 잊혀져 가던 찰스에게 온정의 손길을 뻗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롤링 스톤즈의 키스 리처드 되겠다. 그는 롤링 스톤즈의 전성기였던 60년대를 걸쳐 척 베리에 대한 존경을 공공연히 토로한 바 있다. (롤링 스톤즈의 데뷔 싱글 또한 척 베리의 「Come on」이었다.) 어려서부터 흠모해 마지않던 히어로의 씁쓸한 뒤안길을 조용히 지켜본 리처드는 1986년 척 베리의 예순 살 생일 파티를 겸한 콘서트를 마련한다. 참으로 질펀한 환갑잔치가 아닐 수 없었다. 그 공연 실황을 담은 영화가 같은 해이란 제목으로 공개되며 다시 한번 세간에 척 베리의 존재를 되살리는 계기가 된다. (그 공연에는 키스 리처드 외에 에릭 클랩튼, 제프 벡, 로버트 크레이 등 록의 거물들이 대거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의 다사다난했던 삶은 곧 록큰롤 역사의 연대기 그 자체라 말할 만하다. 그는 당시 댄스 뮤직에 불과했던 록큰롤에 음악인으로서의 자의식을 투영시킨 최초의 아티스트다. 그는 전자기타 사운드를 록음악의 중심에 자리하게 한 첫 번째 뮤지션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아버지들이라 불렀던 델타와 시카고 블루스 맨들의 전통을 계승하며 그것이 백인 청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교두보를 마련하였고, 백인의 컨트리나 라틴뮤직, 재즈의 요소를 결합, 록 음악의 기본 품새를 만들어냈다. (50년대의 록큰롤은 태권도에서 말하는 ‘태극형’과 같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특유의 ‘덕 워크duck walk’(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뒤뚱거리는 스텝이 흡사 오리가 걷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을 비롯한 곡예와도 같은 퍼포먼스는 이후 지미 헨드릭스나 더 후The Who의 피트 타운셴드, AC/DC의 앵거스 영 같은 쇼맨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가사 쓰기에서도 그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운문 형식의 상투적인 노랫말이 대부분이었던 시대에 학교생활, 댄스파티, 자동차, 연애 등을 소재로 한 신변잡기적 가사들은 특유의 서사적인 전개에 힘입어 생생히 살아 있는 듯한, 그들의 언어로 노래하는 곡, 그러니까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말하자면 ‘청춘 서사시’를 탄생시켰다.
데뷔 이래 척 베리는 언제나 현역이었다. 팔순을 훌쩍 넘긴 지금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뭐 나이란 것이 대수겠는가? 비단 버디 홀리와 함께 쌍두마차로서 이끈 효시로서 그가 여전히 생존해 있어서뿐만이 아니라, 록큰롤은 언제나 젊을 수밖에 없다. 자, 그러니 따라 말해 보자. ‘록큰롤’이라고 쓰고 ‘척 베리’라고 읽는다. 오리걸음으로 가는 인생인 거다. Go Johnny Go,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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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꼬맹이 시절 열광했던 한 편의 영화가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벌이는 모험을 담은 호쾌한 어드벤처 영화. 이름하여 <백 투 더 퓨처>! 세월은 흘러 어느덧 계란 한 판으로 셀 수 있는 나이를 넘어선 지금이지만, 그 영화의 피날레 신을 볼 때면 그 시절 그 순간의 쾌감이 눈사태처럼 밀려드는 건 여전할 따름이다. 주인공 마티(마이클 J. 폭스)가 별안간 무도회장에서 기타를 메고 연주를 시작하는 장면이다. 마티는 조용한 발라드를 연주하는가 싶더니 돌연 록큰롤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피날레의 서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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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Johnny go, go!」 그야말로 쾌감의 극치! 꿈과 모험이 펼쳐진 후에, 록큰롤로서 절정을 맞이한다. 처음 그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매일 밤 이어지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의 리사이틀. 손에는 기타 대신 빗자루가 쥐어져 있었고, 극 중 마티가 하던 오리걸음을 열심히 흉내 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인가 지나고 나서 그 곡의 오리지널을 부른 자가 척 베리였음을 알게 되었다. 마티의 그 멋진 오리걸음 퍼포먼스 또한 그 양반의 오마주였다는 것도 말이다. 사실 원곡을 처음 듣고 나서는 엄청난 실망이 몰려왔다. “이게 뭐야, <백 투 더 퓨처>보다 후지잖아!” 척 베리의 위대함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 진짜 일렉트릭 기타를 손에 넣고 밴드를 시작할 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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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설이 길어졌다. 단언하건대 지구상 거의 모든 록 기타리스트들은 척 베리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또 단언컨대 나는 지금 오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만약 기타 리프에도 저작권이란 것이 유효하거나 특허권이 있다면, 그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거부가 되었을 것이다. 록 기타의 교과서라 불릴 만한 「Johnny B Goode」 「Roll Over Beethoven」 등의 곡에서 그가 필살기로 사용했던 예의 그 위대한 기타 리프, ‘쨔쟈쟈쟈쟈쟈쟈쟈쟈쟈쟈…….’를 자신의 곡에 ‘무단 도용’한 적이 없는 뮤지션이란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다. 이것은 그의 이 저명한 리프가 예를 들어 힙합 뮤직에서 비롯된 샘플링에 의한 과거 히트곡의 재사용 따위는 유도되지 않을 만큼 무수한 곡에서 사용되어 왔다는 말이다.
저 유명한 롤링 스톤즈를 예로 들어, 밴드 사운드의 구심점을 맡고 있는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드의 연주가 바로 척 베리의 그것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직접 척 베리에게 헌정하는 의미로 제작한 1986년도의 다큐멘터리
백인인 엘비스가 보컬리스트로서 록음악에 절대적인 여파를 미쳤다고 한다면, 흑인인 척 베리는 곡 쓰기(특히 작사에서)와 연주의 측면에 있어서 같은, 혹은 더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진다. 안타깝게도 그는 모든 영광을 스스로 저지른 과오에 의해 순식간에 잃게 되고, 그 후 오랫동안 그의 음악이 가지는 빛나는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게 된다.
척 베리는 1926년 10월 18일 캘리포니아 주의 산호세에서 태어났다. 무려 여섯 명의 자녀를 슬하에 둔 그의 부친은 좀 더 번듯한 일자리를 찾아 세인트루이스로 이주를 하게 된다. 대부분의 흑인 아티스트가 그러했듯, 척 베리도 여섯 살 무렵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어린 시절 회고에 따르면 그는 날마다 부친이 만든 ‘허니 밀크’를 마셨다고 하는데, 그 덕분인지 남달리 우람한 체격의 거친 머슴아로 성장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남다른 재능과 취미를 가졌던 척 베리가 청중 앞에 처음 나선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그리하여 음악에 꿈을 품는가 싶더니, 비슷한 무렵에 동네 나쁜 형아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그는 열일곱 나이에 자동차를 훔친 죄로 소년원에 입소, 첫 번째 훈장을 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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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 기간 3년 동안 절치부심한 그는 출소 후 뮤지션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어느 시점엔가 미용사 자격증을 취득, 굶어 죽을 걱정은 없었다고 한다. 당시 세인트루이스는 재즈뿐만이 아닌, 리듬 앤 블루스의 중심지로도 명성이 높았다. 냇 킹 콜 같은 스탠더드 재즈 싱어에서부터 티 본 워커나 머디 워터스 같은 블루스 맨 그리고 재즈 기타리스트 찰리 크리스천 등의 레전드급 아티스트들이 그곳 출신이었고, 이들의 음악은 향후 척 베리의 음악적 모태가 되었다. 그는 코스모폴리탄이라는 클럽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곧 자신의 밴드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클럽 활동을 하던 와중에도, 먹여 살릴 처자식이 있었던 그는 GM 자동차 공장에 다녔다. 이용/미용사 자격증에 자동차 공장까지, 그는 꿈을 좇겠다고 현실의 생활 문제는 나 몰라라 한다기보다는 생활을 이끌어가기 위해 꽤나 바지런을 떨던 생계형 뮤지션이었던 셈이다. 무명의 뮤지션이야 음악으로 소득원을 찾기가 힘드니 자의든 타의든 ‘투 잡’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클럽에 들른 블루스의 대가 머디 워터스가 척의 연주를 눈여겨보고 자신이 소속해 있던 레이블 체스의 사장에게 직접 소개하기에 이른다. “오호라~ 기회는 찬스다!” 1955년 시카고 체스 스튜디오에서 대망의 첫 싱글 「Maybellene」을 녹음한다. 이곡은 당시 인기 DJ였던 앨런 프리드(일명 ‘미스터 록큰롤’인 그는 초기 록큰롤 음악 보급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나, 1959년 뇌물 수수 사건에 휘말려 신세를 망치고 만다)의 입김에 힘입어 전미 차트 5위에 오르게 되고, 블루스에 컨트리 리듬을 믹스한 최초의 크로스오버 중 하나로 기록된다(이 곡이야말로 최초의 록큰롤 넘버라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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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은 싱글 「Roll Over Beethoven」이 발표될 즈음엔 이미 록큰롤의 아이돌 스타로 자리 매김 되고 있었다. 동시대 엘비스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 제작자 같은 인사들이 벌떼처럼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고, 몇 편의 영화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57년에서 58년 사이에 「School Day」 「Rock and Roll Music」 「Sweet Little Sixteen」 「Johnny B Goode」 「Carol」 같은 록의 고전을 잇달아 발표하며 명실상부 최정상의 위치에 군림하게 된 척 베리. 일개 피라미 범죄자에서 ‘안타 제조기’로 단박에 신화적 존재가 되어버린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몸소 실천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성공의 달콤함도 잠시……. 곧이어 닥칠 시련의 나날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미국의 기성세대들은 요란한 비트와 방탕한 노랫말에 열광하는 아이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록큰롤 가수들이 일제히 ‘악의 무리’로 규정지어졌다. “백 번 양보해서 엘비스는 그렇다 쳐도, 깜둥이라니!” 척 베리는 흑인 최초의 아이돌이자 록 스타였고 그를 향한 백인 꼰대들의 시선이 고울 리 만무했다. 이내 올가미가 씌워지는데, 1959년 12월 그는 ‘The White Slave Traffic Act’(이 법안은 ‘매춘 등의 부도덕한 목적으로 부녀자를 데리고 주 경계선을 넘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법 조항으로 발의한 제임스 로버트 만의 이름을 따서 만의 법령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라는 법령에 의거하여 체포된다. 그는 열네 살의 백인 소녀를 뉴멕시코라든가, 텍사스라든가, 하여간 남부 어느 주에서 데리고 그의 전미 투어에 동행하며 매춘을 강요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는다. 다분히 인종차별적인 표적 수사이며 가혹한 처사라는 동정 여론이 일어난 덕분에 곧 징역 3년으로 감형되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커리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을 철창 속에서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1963년에 비로소 두부를 얻어먹게 된 척 베리는 곧바로 음악 활동을 재개한다. 하지만 오리지널 록큰롤의 시대는 이미 지난 지 오래, 출소를 해보니 영국에서 대서양 물을 건너온 네 명의 꼬마들이 전 미국을 뒤흔들며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었다.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시작과 함께 그 덕을 아주 못 본 바는 아니다. 하지만 간간히 근근한 히트곡을 발표하며 활동을 이어갔음에도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60년대가 지나 1972년 「My Ding a Ling」(의역하자면 ‘나의 OO’)이란 노래가 느닷없이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땐 이미 중늙은이가 된 왕년의 스타일뿐이었다. 그러던 중 1979년에는 탈세 혐의로 또다시 3개월간 콩밥을 먹어야 하는 신세가 된다.
그렇게 잊혀져 가던 찰스에게 온정의 손길을 뻗친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롤링 스톤즈의 키스 리처드 되겠다. 그는 롤링 스톤즈의 전성기였던 60년대를 걸쳐 척 베리에 대한 존경을 공공연히 토로한 바 있다. (롤링 스톤즈의 데뷔 싱글 또한 척 베리의 「Come on」이었다.) 어려서부터 흠모해 마지않던 히어로의 씁쓸한 뒤안길을 조용히 지켜본 리처드는 1986년 척 베리의 예순 살 생일 파티를 겸한 콘서트를 마련한다. 참으로 질펀한 환갑잔치가 아닐 수 없었다. 그 공연 실황을 담은 영화가 같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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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사다난했던 삶은 곧 록큰롤 역사의 연대기 그 자체라 말할 만하다. 그는 당시 댄스 뮤직에 불과했던 록큰롤에 음악인으로서의 자의식을 투영시킨 최초의 아티스트다. 그는 전자기타 사운드를 록음악의 중심에 자리하게 한 첫 번째 뮤지션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아버지들이라 불렀던 델타와 시카고 블루스 맨들의 전통을 계승하며 그것이 백인 청중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교두보를 마련하였고, 백인의 컨트리나 라틴뮤직, 재즈의 요소를 결합, 록 음악의 기본 품새를 만들어냈다. (50년대의 록큰롤은 태권도에서 말하는 ‘태극형’과 같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특유의 ‘덕 워크duck walk’(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뒤뚱거리는 스텝이 흡사 오리가 걷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을 비롯한 곡예와도 같은 퍼포먼스는 이후 지미 헨드릭스나 더 후The Who의 피트 타운셴드, AC/DC의 앵거스 영 같은 쇼맨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가사 쓰기에서도 그의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운문 형식의 상투적인 노랫말이 대부분이었던 시대에 학교생활, 댄스파티, 자동차, 연애 등을 소재로 한 신변잡기적 가사들은 특유의 서사적인 전개에 힘입어 생생히 살아 있는 듯한, 그들의 언어로 노래하는 곡, 그러니까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말하자면 ‘청춘 서사시’를 탄생시켰다.
데뷔 이래 척 베리는 언제나 현역이었다. 팔순을 훌쩍 넘긴 지금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뭐 나이란 것이 대수겠는가? 비단 버디 홀리와 함께 쌍두마차로서 이끈 효시로서 그가 여전히 생존해 있어서뿐만이 아니라, 록큰롤은 언제나 젊을 수밖에 없다. 자, 그러니 따라 말해 보자. ‘록큰롤’이라고 쓰고 ‘척 베리’라고 읽는다. 오리걸음으로 가는 인생인 거다. Go Johnny Go, Go!!
“If you tried to give rock'n'roll another name,
you might call it Chuck Berry.”
“만약 록큰롤에 이름을 또 하나 붙여주고 싶다면,
척 베리라고 부르면 될지어다.”
- 존 레논 -
you might call it Chuck Berry.”
“만약 록큰롤에 이름을 또 하나 붙여주고 싶다면,
척 베리라고 부르면 될지어다.”
- 존 레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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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차승우
밴드 문샤이너스에서 기타와 보컬을 맡고 있다. 초등학교 때 뱀이 그려진 전자 기타를 외할머니에게 선물로 받아 처음 기타를 잡았고, 고등학교 때 크라이베이비라는 밴드로 활동을 시작했다. 역시 고등학교 때 노브레인을 결성하여 2집까지 활동한 후 일본의 도쿄 스쿨 오브 뮤직으로 기타를 공부하러 갔다. 하이라이츠라는 밴드를 거쳐 문샤이너스를 결성했다. 최근에 문샤이너스 정규 1집인 <모험광백서>를 펴내고 열렬하게 활동 중에 있다.
달의여신
2012.08.21
느낌이 들어요.ㅎㅎ 흑인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것이 soul계통의 음악인데 그때 당시
인종차별의 벽을 넘어서서 한획을 그은 분에게 정말 존경을 표합니다.
앙ㅋ
2012.01.30
higman
2009.12.30
아.. 글 잘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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