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평론가인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나도 한때 ‘임금 노예’였다. 보다시피 과거형. 지금은 그러니까, 이른바 ‘백수’. 통계청의 실업률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이 사회의 비정규직. 다시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는 남자’. 이런저런 날품팔이와 앵벌이로 생계를 지탱하고 있는. 혀를 끌끌 찰 양반도 있겠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도와준 것도 없으면서, 쯧. 사실 생이 마냥 암울하지는 않다. 나름 애환도 있고 다소 불편한 것도 있지만 임금 노예일 때와는 다른 재미와 경험을 만끽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10여 년 동안 지탱해 온 임금 노예에서 벗어나던 때는 그랬다. 배는 불러오고, (물론 임신으로 착각하진 않겠지!) 월급은 마약이었다. 과감한 포기가 진짜 더 큰 행운을 준다고 믿고 싶으면서도 노예의 편안에 솔깃한 나이 즈음. 사람살이는 더 이상 달콤하지도 않을뿐더러 쓰라리고 시큼한 것임을 알 수 있는 나이. 야망과 탐욕이 뒤범벅된 채 라인잡기에 고민하는 사람들을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풍경. 부동산과 아이들 교육(아니, 정확하게는 사육)이 자신의 모든 것인 양 자신의 서사를 지우고 있는 사람들. 이 팍팍하고 강퍅한 사람살이!
아, 더 이상 그러다간 죽을 것 같았다. 그런 풍경에 젖어 살다 보면 다른 철학이 있을 수가 없잖아! 꿈 혹은 내 자신은 저 어디 하수구에 처박힌 채,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알 수 없는. 그럼에도 현실을 핑계로 꾸역꾸역 연명해야 할 것만 같은. 스무 살엔 혁명을 해도, 마흔만 아니 이제는 서른만 넘으면 비루한 현실 속에 귀순하고야 마는 굴레에 풍덩 빠질 것 같은 거라.
내가 거친 대부분 직장도 그랬다. ‘더 세고 많은 것’을 요구할 뿐, ‘세상에 좀더 나은 것’을 만들고자 하는 직장도 그다지 없었다. 영혼이나 철학, 사람이 다 무언가. 그저 경영상의 논리와 사람을 숫자로 치환하는 이윤 동기만 횡행할 뿐. 제멋대로인 ‘쁘레땅 뿌르국’(KBS <개그콘서트>의 코너)이지 뭐.
뭐 여하튼,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라며, 다양한 이유가 범벅돼 10여 년 직장 생활, 고이 접어 나빌레라~ 그리곤 다른 시작을 꼼지락대고 있다. 안으로 충분히 쌓지 못하고 게워내기만 했던 내 안의 이야기들을 다시 만들어갈 수 있도록 충전하면서.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를 비롯한 저자의 책,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백수인 나를 지탱하는 좋은 버팀목이었다.
그리하여, 어찌 이 책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고미숙 지음, 사계절 펴냄) 또한 반갑지 아니할쏜가. 더구나 강연도 열린단다. 제목하여 ‘고전평론가 고미숙, 『임꺽정』으로 쿵푸하다!’. 아니, 임꺽정! 천하를 들었다 놓은 괴력의 장수. 이 땅의 백수를 위해 어떤 강령을 내려 주시려나. 기대 반 설렘 반. 지난 24일, 친구와 함께 신촌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오늘 우리의 만남. 그렇다, 우연이 아니다. 모든 만남은 우연이지만 우연이 우연을 불러 인연이 넓어지고, 인연은 또 다른 세계를 만나는 통로가 되지 않던가. 운명은 그렇게 찾아온다. “우연이 필연이 될 때 운명이라고 하죠. 오늘 우리는 크고 엄청난 내공을 지닌 책(『임꺽정』)을 매개로 만났고, 이것이 운명으로 전환될 수 있어요. 이 책의 힘을 빌려서 서로의 운명을 바꿔보는 실험을 해 봤으면 좋겠어요.”
그리곤 임꺽정과 만난 인연, 그 운명을 잠시 풀어놓는다. “저는 『열하일기』로 인생을 한 번 바꿨고, 그 이후, 그전과는 다르게 살고 있어요. 공동체(‘수유 너머’), 책, 등 모든 것들이 『열하일기』를 만나고 나서 이뤄진 것이죠. 그런데 작년에 『임꺽정』을 만났어요. 어이없는 인연이죠. 뜬금없어요. 의적을 동경하는 것도 아니고, 주로 보는 것도 18세기 조선 후기고. 겹쳐지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이게 사람이 연결되면 또 이렇게 만나지더라고요. 사계절 출판사와 그렇게 만났고, 덜컥 약속을 해버렸어요. 작년 8월에 (『임꺽정』을) 읽으면서 ‘내가 미쳤지, 왜 약속을 해서…….’라고 생각도 했지만, 제 정치 이데올로기가 ‘약속은 지킨다’거든요. (웃음)”
어쩌면 마지못해, 자신을 존중하기 위한 약속 때문에 시작한 일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임꺽정이 고미숙을 낚은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고미숙이 임꺽정에게 그만 빠졌다. “한 번 읽어서 원고를 쓸 수는 없잖아요. 더구나 한 번 읽어서 끝나는 건 고전이 아니죠. 두세 번 읽고 ‘이 책을 만난 것이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라고 느껴지는 게 고전이죠. 『임꺽정』을 세 번 읽고부터는 약속을 지킨다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내가 이 이야기를 전파하기 시작했어요.”
그의 동선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임꺽정이 저자의 욕망과 관계의 배치를 바꾼 셈. 그리하여 ‘책이 인생을 바꾼다’는 격언은 단순한 은유나 수가가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전언. 인생의 동선을 바꾸기 위해서는 ‘책’을, 그리고 ‘쿵푸’(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씀. 무엇보다 잊지 마시라. 작업의 으뜸도 역시 책 그리고 공부다.
글쓰기 또한 책과 공부를 통해 이루어진다. 언어가 신체에 들어오면 세포가 도발한단다. 그래서 말이 튀어나오고, 머리가 아닌 몸 전체 세포가 움직이면서 글쓰기가 이루어진다는 것. 몸으로 밀어붙이는 글쓰기가 중요한 이유. “머리로 한다면 너무 빈곤하잖아요. 기억도 잘 안 나고. 책 읽고 느낌을 말할 수는 있어도 디테일은 나오지 않아요. 그런데 텍스트가 몸으로 쏙 들어오면 핏줄이나 경락을 타고 움직이다가 툭툭 튀어나와요. 이것이 글쓰기의 중요한 코스예요. 텍스트랑 몸을 섞는 것. ‘말문이 막힌다’는 말이 있는데, 말도 길이 있어야 다녀요. 말이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계속 훈련하는 것도 중요하죠.”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또한 친구. “날 어떻게 생각하든 미워하든 간에 공동체 혹은 내 말을 들어주는 친구가 있어야 해요. 공부는 혼자가 아니고 네트워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거든요.” 이 정도만 해도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지 않은가. 이 넓은 세상 위에, 그 길고 긴 시간 속에, 수많은 사람들 속에 책을 매개로 모인 사람들. 그리고 이것을 읽는 당신.
임꺽정과 그 무리는 의적이 아니다, 그저 ‘노는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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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번 떠올려 보자. 임꺽정. 어떤 생각부터 드는가? 의적? 민중의 대변자? 그건 80년대의 시선이다. 저자는 “가끔 의적 노릇을 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아니”란다. 의적이 되겠다는 생각도 없다. 의적이 되겠다는, 의적이 되어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하겠다는 명분 따윌랑도 없다. 많은 뜻있는(?) 독자들과 비평가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하겠나.
“고전은 프리즘을 바꾸면 다른 각도에서 읽을 수 있어요. 시대를 바꿔가며 재해석되죠. 『논어』가 왜 아직까지 읽힐까요? 한 번 보고 접는 교과서와는 달라요. 졸업 뒤에 교과서를 꺼내 감동을 되새기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아요? 교과서에 실린 글만큼 좋은 것도 드문데, 대부분은 왜 그것들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지 않을까요? 거기 있는 텍스트는 단 하나로만 해석됐기 때문입니다. 교과서에 실리는 순간 ‘지식 통조림’이 되죠. 단 하나의 척도로만 해석되는 것은 폭력적이에요.”
모름지기 생명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이질적이어야 한다. “계속 재해석될 수 있다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어요. 똑같은 해석의 지평을 갖는 것은 생명력이 없어요. 『열하일기』라는 텍스트가 200년 뒤 나에게 말을 걸고, 나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느낌이었어요. 『임꺽정』이 80년대 ‘민중 변혁’으로 끝났으면 고전이 되지 못했을 거예요. 말의 웅성거림을 들려주고 내 몸의 세포들이 참지 못하고, 그래서 내가 (『임꺽정』을) 세상에 전달하게 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시 돌아가서, 임꺽정은 의적으로 보기엔 상당히 하자(?)가 많다. 임꺽정 입장에서도 “왜 의적으로 살아야 해?”라고 버럭 화를 낼지도 모른다. “백정이지, 힘은 장사지, 자존심은 더럽게 세고……. 그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반역자밖에 없죠. 무슨 이념이나 그런 걸 갖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내가 나답게 살려는 힘이 강한 겁니다. 살다 보니 청석골에 가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80년대를 비롯, 오랫동안 금서로 묶여 있던, 의적도 아니요, 민중의 대변자도 아닌 임꺽정과 그 청석골 무리가 지금에 와서 저자를 도발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얘들이 다 백수, 노는 남자들이라는 게 저를 감동시켰어요. 감동을 넘어 경이로웠죠. 이들은 계급이나 신분을 뛰어넘겠다는 욕망도 없어요. ‘어떠한 정규직도 갖고 싶지 않다!’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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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조선의 선비들도 그렇지만, 그리스 시대에도 자유인은 직업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 시절 노예란 정규직을 가진 이들이었다. 평생 한 가지 직장과 일에 붙박여야 하는 것, 그것이 노예의 저주받은 숙명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토록 정규직을 열망하는가? 과연 그게 자연스러운 생존 본능일까? 백수는 임금 노예인 정규직을 얻지 못해서 안달복달하고, 정규직은 언제 거리로 내몰릴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그래서 결국 백수나 정규직 모두 노예가 되어버리는 오늘날의 기막힌 현실! 이 현실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우리를 꺽정이와 그의 친구들은 이렇게 선동한다. 제발 그렇게 한심하게 살지 말라고. 길 위에도 얼마든지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 존재한다고. 그러고는 이렇게 다짐한다. 길 위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수해주겠노라고.”(p.20)
지금 시대의 통념에서 벗어난 이들이 가진 놀라운 에너지. 노는 데서 나오는 그 에너지. 의사 혹은 변호사와 같은 고소득 전문직을 선망하는 시대에서 빗겨난 반역의 에너지. “지금은 잉태했을 때부터, 의사가 임신 몇 개월이라고 얘기할 때부터 대학에 가야 한다는 임무가 있잖아요. 내 아이의 ‘싱크빅’을 위해서 태교를 하고. 그런데 의사가 돼서 병들고 불편한 사람들을 좀더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그런 말은 별로 못 들었어요. 잉태되는 순간부터도 고액 연봉의 정규직이 되겠다는 욕망만 있고. 그건 고소득층뿐 아니라 중산층, 빈곤층까지 똑같습니다. 아까 말한 교과서적인 사회, 단 하나의 척도 밖에 없는. 역사 이래, 지금처럼 정신줄 놓은 세대는 없을 거예요. (웃음)”
청석골, 그 야생적인 삶을 위해
노는 남자들이 활개를 치는 청석골은 어떤 곳일까. 연인의 사랑보다 진하고 핏줄보다 더 질긴 칠두령의 사랑이 있고, 그런 인연들이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일종의 인디언 부락. “추방당한 존재들이다 보니 이들에겐 정착민의 규범이 부재한다. 어떤 권위나 습속에도 예속될 필요가 없다. 대신 현장이 요구하는 윤리적 규칙들이 그때그때 만들어진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유동성, 낡은 가치들을 교란하는 불안정성, 그리고 그것이 유발하는 역동적인 야생성 등 이것이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특이성이다.”(p.21)
이곳엔 백수들의 야생의 삶이 있다. “청석골에는 싸우면서도 코믹과 해학이 함께합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삶. 이것이 지금 필요한 야생적인 삶이죠. 이런 이질적 삶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어요. 천민, 추방자, 아무것도 없는 존재들이 펼치는 파노라마를 우리 시대 중산층의 교과서적인 삶과 비교할 때, 우리는 너무 허접하게 사는 것 아닐까요. 연봉이 5천만 원이 돼도 피가 말라요. 연봉이 1억 원이 돼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2억 원을 벌어야 하고. 사회적으로 어떤 기득권이 없음에도 자유로운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영양 과잉의 시대죠. 밥이 얼마나 위대한지도 모르는…….”
‘노는 남자’들을 통한 생존 노하우가, 그렇다, 여기에 있다. “이들은 세상의 차별과 모순에 대한 울분은 강했을지언정 땅이나 직업에 대한 욕구,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가장 콤플렉스’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그럭저럭 먹고들 산다. 어디 그뿐인가. 놀랍게도 이들은 모두 달인들이다. (…) 놀면서도 당당하고, 심지어 배울 건 다 배운다! (이럴 수가!) 고액의 연봉을 받고도, 평생 직장에 매여 있으면서도, 늘 가족들한테 죄의식을 느껴야 하는 우리 시대 가장들로선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경지 아닌가. 이 미스터리를 풀어 보면 조선조 부락공동체의 경제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뿐더러, 우리 시대 백수들의 ‘생존 노하우’를 터득할 수 있을지도.”(p.28)
부러우면 지는 거? 아니, 부러우면 따라 해라.
그런 게 부러우면 우리도 해야 한다. 부러우면 그들을 벤치마킹 하라. “이들은 추방당한 존재들이면서 또한 탈주하는 자들이기도 했다. - 추방과 탈주!”(p.52) 따지고 보면 비정규직, 실업자 등도 사회에서 추방당한 자들. 추방당했다고 좌절과 우울에 빠져 있을 것인가. 천만에.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탈주와 연대.
저자는 과객문화의 부활을 강조한다. “밥은 기본적으로 나눠 먹는 것이 원칙이에요. 시공간이 열려 있으니까 백수로 먹고 살 수 있는. 지금은 연봉이나 저축이 없으면 불안하고, 내 것이 없으면 굶어 죽거나 왕따가 되죠. 그래서 ‘등처가’도 필요하고. 어쩌면 이네들은 하나같이 다 백수일까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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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네들의 삶이 완전하고 완벽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시대의 획일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아닌 다른 상상력을 끄집어내기. 하나의 유형에 불과한 것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임꺽정』에서 볼 수 있듯이) 사돈처녀에게 얻어먹는 것이 왜 쪽팔려야 하나요. 결혼을 해도 지금 한쪽이 경제력이 약하면, 눈치 보고 라이벌 의식 느끼고 그러죠. 그러면 결혼하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경제적으로 개길 수 있는 것이 많아지는 게 가족 아닙니까. 『임꺽정』에서는 헤쳐모여 살고, 떠나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집을 선물하고 갑니다. 이 얼마나 좋은 미풍양속입니까. 미풍양속을 보존하고 이어받자면서, 왜 이런 것은 이어받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과객문화, 집 선물, 사돈이 팔촌과 같이 사는 것.”
“한편으로 가족으로부터 탈주하고, 다른 한편으론 사돈의 팔촌까지 서로 뒤엉켜서 새로운 패밀리를 이루는 것. 이 둘은 아주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깊이 연동되어 있다. 가볍게 떠날 수 있는 자만이 언제든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법이므로. 그에 비하면 우리 시대 가족 관계는 얼마나 무겁고 고달픈지. 고작 3, 4인에 불과한 핵가족임에도 늘 소통의 결핍에 시달리고, 그럴수록 더더욱 서로에게 집착한다. 떠날 수도 없고 머물 수도 없는, 집착과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성(城) 혹은 감옥. 가족이 세상과 소통하는 출구가 아니라, 그 출구를 봉쇄하는 창살이 되어버린 시대. 가족주의와 사적 소유를 오버랩 시킨 대가치고는 참 가혹하지 않은가.”(p.34)
‘교포박’(교수를 포기한 박사)이라고 불린 저자는 본의 아니게 그런 삶을 살게 됐다. ‘수유 너머’가 비빌 수 있는 바닥이고. “이제는 스스로 탈주해야 해요. 내 자유를 위해서. 나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욕망의 배치가 바뀔 때 삶의 생성이 일어납니다.”
진짜 사랑과 성도 청석골에 있다
저자는 청석골의 억세고 드센 여성들은 물론, 무엇보다 그네들이 만드는 사랑에 감탄했다. “사랑을 하는 것은 의식과 이성의 영역이 아닌, 몸 안의 굉장히 다양한 자연의 지침이 신호를 보내 주는 겁니다. 대상이 바뀌어도 똑같은 건, 내 안의 지층이 아직 살아나지 않은 거죠. 나를 아직 모르는 겁니다. 여기서 읽은 그런 얘기들을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를 교정할 때 막 넣기도 했어요. (웃음) 내 안에 있는 원초적 세포가 움직일 때는 사회적으로 어떤 압력이 와도 꿈쩍 않아요. 태풍의 눈과 같은 거죠.”
저자는 연암 박지원에서 2퍼센트 부족한 것을 임꺽정과 그 무리들에게서 찾았고 해소했다. 성과 사랑. 연암은 인텔리다 보니 성에 대해선 노코멘트. “조선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면 이 책을 보면 됩니다. 어법이나 불타는 풍속도를 리얼하게 보여 줍니다. 홍명희도 그런 야담이나 야사, 풍속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노래도 있지만, 그렇다, 사랑은 아무나 한다! 소유나 출신, 외모와 학벌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다만 필요한 건 낯선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충만한 몸뿐이다. 그런 점에서 길이야말로 에로스의 거처다. 집과 가문의 울타리에서라면 절대 불가능한 마주침이 길에서는 흘러넘친다. 예기치 않은 만남과 열정이 폭발하는 사랑의 성소, 그곳이 바로 길이다. 그 위에서 ‘충만한 신체, 충만한 대지’가 뜨겁게 교차한다.”(p.164)
책에 나온 꺽정이와 운총이의 사랑도 잠깐 언급하자. “병해대사를 따라 백두산을 유람하다 운총이를 만났고, 이제 다시 백두산을 떠나 어디론가 가야만 한다. 목적도 방향도 없고, 언제 어디서 끝날지도 기약할 수 없는 길. 그런 길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랑도 사실 기약이 없다. 언제 만날지, 아니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알 수 없다. 헌데 중요한 건 그럼에도 사랑을 하고 혼인을 한다는 사실이다. 놀랍지 않은가? 사랑은 반드시 미래가 보장되어야 하고, 결혼을 하기 위해선 만반의 준비ㅡ직업, 아파트, 자가용, 기타 등등ㅡ를 갖추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 우리 시대 청춘들로선 가히 ‘혁명적인’, 아니 ‘미친 짓’이다. 하지만 꺽정이와 그의 친구들에겐 이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랑이란 본디 그런 자질구레한 기준과 통념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 아니던가. 이것저것 재고,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보고, 그러다 언제 사랑을 한담? 아니, 그리고 그런 게 뭔 사랑이람? 하고 도리어 우리에게 반문할 것이다.”(p.157)
“좋은 앎이 좋은 몸, 좋은 삶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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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획일적인 압박과 폭력에 포박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공부다. ‘공부의 힘’이 백수를 자유롭게 한다. 삶하고 분리된 공부가 아닌. 저자 왈, “좋은 앎은 좋은 몸을 만듭니다.” 말과 글, 글과 삶, 그 사이가 먼 우리에게 제대로 된 앎이 필요하다는 말이렷다. “사회적 장벽과 경계를 가로지를 수 있는 가치는 공부와 앎, 오직 이것뿐이다.”(p.42)
모름지기 잘 사는 것은 돈이 많거나 권력을 쥐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간극이 없는 것이다. “지금 대학들은 뇌사 상태고, 지식은 무용지물이에요. 자본주의 측면은 물론 인생에서도 도움이 안 돼요.” 더 많고 풍요해졌음에도 우리가 잘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이유.
그러면 어떤 공부가 좋을까. 저자는 고전을 권한다. 고전은 아까도 말했듯 시대에 따라 재해석되고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것. 그것은 “너무 깊고 넓”기에 가능하다. 히말라야에 끊임없이 오르는 것과 같다. 히말라야는 오를 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크고 넓은 바다를 끝없이 가도 새로운 길이 보이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아는 성경, 불경, 『논어』 등은 정말 소박한 말들로 되어 있는데, 그럼에도 넓고 깊은 비전이 있어요. 『임꺽정』은 아직 얼마나 폭이 넓은지 알 수 없으나 어휘나 관계, 동선이 지금 우리 시대의 소설보다 강도나 밀도 면에서 시대를 더욱 잘 읽게 해 줘요.”
고전을 읽는 이유는, 그리하여, 지금 여기의 삶을 위해서! “나의 삶을 변환하기 위한 힘으로 고전만큼 든든한 빽이 없습니다.” 고전과 함께 필요한 것은 자아의 증식을 가능하게 해 주는 사람. 병들고 소멸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함께 놀고 공부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스승, 친구라면 더욱 얼쑤~
“요컨대 친구란 초월적 가치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생을 함께 구성해 가는 동반자를 의미한다. 이처럼 시공간을 넘어 주류적 사상의 지형에서 탈주한 이들의 윤리적 무기는 언제나 우정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주류적 질서란 늘 수직적 위계를 중심으로 구축된다. 따라서 그로부터 탈주하기 위해서는 수평적 연대로 이동해야 한다. 수직적 위계에서 수평적 연대로! 탈주와 전복은 거의 예외 없이 이런 흐름을 탄다. 우정의 윤리가 부각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우정보다 더 수평적이고 역동적인 가치는 없는 법이다.”(p.141)
저자는 바란다. 길의 시대에 비전, 이들의 힘과 지혜를 세상에 널리 전파하는 전령사가 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이 땅의 모든 백수들 혹은 백수를 꿈꾸는 이들이 길 위에서 살아가는 배짱과 기예를 터득할 수 있기를. 또 그리하여 길이 곧 삶이 생성되는 장소가 될 수 있기를. 그 생성이 이 세계를 한없이 불온한 열정으로 뒤덮을 수 있기를. 청석골 칠두령이 그 옛날 그랬던 것처럼.”(p.21)
이날의 마무리도 그리 하였도다. “애인이나 애인을 삼고 싶은 사람과 『임꺽정』을 같이 읽으세요. 2~3개월 같이 읽다 보면 저절로 다 됩니다. (웃음)”
거듭 생각한다. 누구 말마따나 새로운 모럴을 창조하지 못하면 저항이든 혁명이든 아무 소용이 없다. 이 시대에 바이러스처럼 퍼진 획일적인 모럴만 가지고선 우리에게 자유는 없다. 자존심을 지킬 수도 없다. 만국의 백수들에게 지금 필요한 건 뭐? 임꺽정! 놀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노는 임꺽정을 만나자. 그리고 연애가 고픈 자들에게도. 연애하고 싶다고 징징거리지만 말고 『임꺽정』을 펴라. 그전에 애피타이저로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을 읽어도 좋겠다. 빙고~!
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
prognose
2012.06.27
루체오페르
2009.08.07
캔디
2009.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