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쌀밥 한 그릇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8.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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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본 것 같이나 귀한 쌀. 날마다 먹는 쌀밥. 그러나 그 쌀밥을 조금이라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나는 눈물이 난다. 쌀밥 한 그릇 목구멍에 넣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숱한 눈물을 흘려야 했던가.

쌀밥, 너 오랜만이다

엄마는 내가 아파 칭얼대면 늘 이런 말로 나를 달랬다.

“미역국에 쌀밥 말아주께 언능 인나소 와.”

무엇무엇 하소 와, 라고 전라도 엄마들이 말할 때, 아픈 전라도 아이들은 혼몽 중에도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번지기 십상이었다. 더군다나 미역국에 쌀밥이라니. 사시사철 국이라곤 막된장 푼 토장국이었다. 미역국은 생일날과 명절에만 먹는 국이었다. 그런 귀한 국에 보리밥도 아니고 무밥도 아니고 조밥도 아니고 고구마밥도 아닌 쌀밥이라니!

미역국에 쌀밥이 있기는 있었던 것일까. 나도, 엄마도 알고 있었다. 엄마가 말한 것은 단지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임을. 엄마는 김이 펄펄 나는 미역국에 윤기 자르르 흐르는 쌀밥 한 그릇을 오지게 말아 내 입에 넣어주기만 하면 내가 나을 것만 같아서 그랬을 것이다. 아픈 입에 사실 토장국은 그 얼마나 짜고 쓴가. 그리고 사실 말해서 된장국, 토장국에는 쌀밥보다는 보리밥이 어울린다. 만날 먹는 게 보리밥이라서, 그래서 또 만날 우리 동네 가난한 사람들은 된장국만 끓일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지금도 아이들이 아프면 미역국에 쌀밥을 한다. 아무리 잡곡밥이 몸에 좋다 해도 아플 때는 미역국에 쌀밥이 최고다.

쌀! 쌀을 발음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쌀은 그냥 쌀이라고 안 해지고 늘 ‘귀한 쌀’이라고 저절로 뇌어진다. 귀한 쌀. 쌀은 정말로 한 톨도 귀했다. 언젠가 보리밥에 뉘처럼 끼어 있는 하얀 쌀 한 톨을 발견하고 나는 내 밥에 쌀 있는 거 누가 볼세라 가슴이 막 뛰기까지 했었다.

밥을 손에 들고 호호 불면서 마치 빵처럼 뜯어 먹던 사람들

우리 집은 논이 없었다. 농촌에 살면서 논 없이 사는 것처럼 고달픈 것이 없다. 논 많은 집은 그 많은 농사 다 지어 먹고 사느라 고달프겠지만, 논 없는 집은 사시사철 그놈의 쌀 결핍증으로 고달프다. 촌에서 쌀 없으면 돈 사기도 어렵다. 쌀 한 되가 삼천 원이라면 그 삼천 원을 사기 위해 보리쌀은 열 되를 퍼주어야 한다. 그러니 고달프다. 돈을 사서 학비를 하고 가용을 하자면 배를 곯아야 하기에.

그럼 논 없으면 쌀이라고 생긴 건 구경도 못할쏘냐. 그런 건 아니다. 쌀이 꼭 논에서만 나느냐. 쌀은 밭에서도 난다. 그 이름하여 산두쌀. 아버지는 논 살 돈을 마련하러 서울로, 어디로 돈 벌러 다니고, 엄마는 어린 우리들을 데리고 산두쌀을 뿌렸다. 논에는 모를 심지만 밭에는 보리처럼 씨를 뿌린다. 남들이 논에서 논매기를 할 때 엄마랑 우리는 밭매기를 한다. 그래도 희한한 건 가을걷이할 때 사람들이 우리 집 산두쌀이 맛있다고, 그렇게 쌀 많은 집들이 우리 집 산두쌀 맛 좀 보자고 자꾸자꾸 우리 집에 오는 것이다. 그러면 엄마는 그러냐고, 그러지야, 하고 귀하기가 금쪽같은 산두쌀밥을 푹푹 퍼준다. 사람들은 손에 들고 호호 불면서 밥을 마치 빵처럼 뜯어 먹는다.

그 사람들이 나중에 쌀을 갖다 줬는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때 사람들은 쌀을 갖다 줘도 꼭 아무도 안 볼 때 살짝 놓고 가버렸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우리 집 뚤방(*토방의 전라도 방언.)에 쌀 함지가 놓여 있는 줄도 모르고 새벽에 변소를 가다가 그만 함지를 엎어뜨린 적이 있다. 그 쌀은 누가 갖다 줬을까. 시어머니 눈 무서워 야밤을 틈탄 어느 집 며느리였을까. 밥을 빵처럼 뜯어 먹던 주막 아짐이었을까. 어둠 속에서 쌀이 하얗게 흩어진 모습은 마치 꿈속 같았다.

꿈에 본 것 같이나 귀한 쌀. 날마다 먹는 쌀밥. 그러나 그 쌀밥을 조금이라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나는 눈물이 난다. 쌀밥 한 그릇 목구멍에 넣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숱한 눈물을 흘려야 했던가. 이 땅에 사는 사람들한테서 쌀을 빼놓고는 사실 아무 얘기도 할 수가 없다. 쌀은 단순히 입 안으로만 들어갔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몸을 이루고 정신을 이룬다. 쌀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이루는 처음과 끝이다.


한 그릇 쌀밥 속에 가득한 향기, 소리

초등학교, 중탇교 시절 농번기라는 것이 있었다. 모내기철, 추수철이 바로 농번기다. 농번기에는 모든 아이들이 수업을 중단하고 모내기, 나락 베기 노력봉사를 나갔다. 모내기철에는 새벽부터 애향단(愛鄕團) 깃발 아래 그날 모내기할 논으로 간다. 고학년들은 모판에서 모를 찌고 저학년들은 모내기할 논으로 못다발을 나른다. 온 들판에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새까맣게 나와서 모를 낸다. 시꺼먼 거머리가 장딴지에 들러붙어 피가 줄줄 흐르는 줄도 모르고 모를 낸다. 못줄을 잡고 있던 도회지 출신 여선생님이 비명을 지르고서야 아이들은 거머리에 물린 줄을 안다. 그 선생님이 나중에 헌 스타킹을 갖다 줘서 우리는 난생 처음 스타킹이라는 것을 신고 모를 내기도 했었다.

넓은 들에서 하루 종일 모내기 노력봉사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집으로 가는 길에도 애향단 깃발 아래 행진을 하였다. 그러다가 산모롱이 다랑논에 늙은 할아버지 할머니 둘이서 외롭게 모심기하는 것을 보고 또 이 애향단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쭐우쭐 논으로 들어가 순식간에 온달만큼 남았던 논을 반달만큼, 초승달만큼, 손톱만큼, 그러다가 다 심었다. 모내기 끝난 논물에 석양빛이 붉게 붉게 담겨 있었다. 석양빛은 아이들 얼굴에도 붉게 붉게 채색되어 있었다.

논둑길을 밟으며 ‘맹호부대 용사들아’(베트남 파병부대의 군가)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들은 마치 전투를 끝내고 돌아오는 전사들 같았다. 모내기 노력봉사를 하고 돌아온 컴컴한 집에 엄마는 없었다. 내가 남의 집 논에 모내기를 하는 동안, 엄마는 하루 종일 산밭에서 산두밭을 맸을 것이다. 내가 엄마를 마중 나가면 엄마는 저만치 어둠 속에서 손에 호미를 쥐고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었다. 엄마 뒤에서 보름달이 엄마를 따라오고 엄마 옷자락에서는 찔레꽃 향기가 났다.

한 그릇의 쌀밥 속에서 나는 찔레꽃 향기를 맡는다. 쌀밥 속에 들어 있는 게 어디 향기뿐인가. 쌀밥을 보면서 나는 뻐꾸기 소리도 듣는다. 내가 밥을 먹으면 찔레꽃 향기와 뻐꾸기소리도 함께 내 속으로 들어온다. 만날 여름만 계속되는 베트남 쌀보다 우리나라 쌀이 맛있는 이유는 아마 봄의 찔레꽃 향기와 뻐꾸기 소리, 여름의 매미 소리와 칡꽃 향기, 가을의 국화꽃 향기와 바람 냄새, 쓰르라미 소리들이 모두 그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엄마아, 쌀밥 해줘어

쌀이 없다면 생일도, 명절도, 제사도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쌀이 없으면 사는 것이 아무 재미도 없을 것이다. 요즘이야 모든 맛난 것이 다 밀가루로 되어 있지만, 우리게 아이들에겐 밀가루로 해 먹는 맛난 거라야 막걸리 넣은 빵 정도. 모든 맛난 것은 다 쌀로 해 먹었다. 평소에 쌀밥은 못 해 먹어도 명절에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쌀로 만드는 모든 것을 했다. 논 한 뙈기 없던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겨우내 동네에는 튀밥장수가 들어와 살았다. 쌀 한 되하고 사카린 서너 알, 장작 두어 개를 들고 가 튀밥을 튀겨가지고 와서 그냥도 먹고 ‘옥꼬시’도 만들어 먹었다. 쌀튀밥을 따끈따끈한 조청에 버무려서 방망이로 판판하게 치대어 칼로 썩둑썩둑 썰어놓은 게 옥꼬시다. 우리말로 하고 싶어도 엄마가 ‘옥꼬시 옥꼬시’라고 하시던 통에 나도 그냥 옥꼬시라고밖에는 어떻게 말하기가 그렇다.

쌀로 만든 것 중에 또 하나 맛난 것은 유과다. 나는 완성품 유과보다, 유과가 되기 전의 과정 속에 있는 쌀들이 더 맛있다. 유과를 하려면 찹쌀에 소금을 조금 넣고 고두밥을 찌는데, 갓 쪄나온 약간 간이 든 찹쌀 고두밥은 진짜 맛있다. 나는 그것으로 주먹밥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먹었다. 그 다음에는 청주를 조금 넣고 고두밥을 확독에 친다. 약간 달고 약간 술맛이 나면서 고두밥은 이제 쭈우쭉 늘어지는 떡이 된다. 그 떡이 또 그렇게 맛있다.

그것을 고물을 뿌린 암반 위에 편 다음 홍두깨로 판판하게 민다. 그런 다음 밥그릇 같은 것을 놓고 동그랗게 잘라서 따끈따끈한 아랫목에 흰 종이를 깔고 말린다. 꼬득꼬득 말라가는 그것이 또 나는 왜 그렇게 맛있던지, 엄마 몰래 솔개솔개 잘도 ‘돌라’ 먹었다. 적당히 잘 마르면 드디어 무쇠솥 안에 곱돌을 구워서 유과를 구운 곱돌 위에서 굽는다.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유과를 기름에 튀기는 것 같았는데, 그러면 요새 먹는 유과의 고소한 맛은 기름 맛이던가?

아, 아무리 이러고저러고 해도, 쌀로 만든 것 중에 가장 맛있던 것은 쌀밥이더라! 방앗간에서 막 찧어온 푸르스름한 햅쌀로 가마솥에 지어낸 푸짐한 쌀밥 한 그릇이더라! 내가 엄마 치마꼬리 붙잡고 눈물 그렁한 채 무수히 외었던 그 말, ‘엄마아, 쌀밥 해줘어’ 했던 바로 그 밥이더라!

1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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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aaosldk

2008.07.01

언제부터 쌀밥이 이렇게 보편화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이토록 쌀밥에 사연이 많은 줄은 몰랐습니다.. 이글을 읽으니 갑자기 쌀밥이 당연시되던 저의 매일 아침이 조금이나마 귀하게 느껴지네요.. 앞으로 많은 분들이 좀더 쌀을 귀하고 밥상위의 보석처럼 여기며..(오버인가?) 막 대하지 않기를 바라며 이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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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2008.06.30

책을 읽다보면 '사랑' 못지않게 '먹을거리'가 가슴에 와닿곤하죠. [수용소의 하루]에서 매트리스안에 절반만 아껴아껴 뜯어먹은 빵을 넣고 다른 사람이 못 보게 바느질까지 해가며 숨겨놓고, 따뜻한 홍차 한 잔과 함께 빵을 먹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주인공. 또 어느 소설엔, 가난한 시절. 돼지고기 몇 점을 약으로 여겨 잔칫날 얻어 먹는 것. 비오는 날에 국수를 먹는 것. 떠오르는 게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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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enkind

2008.06.30

미각이 까다로운 것에 비해 섬세하지는 못하기에 쌀맛을 구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외국에서 살 적에 값이 싼 베트남이나 태국에서 수입된 쌀을 먹다가 한국에서 와서 엄마가 해준 우리쌀 밥을 먹으니 쌀이 어떻게 다르고, 그 쌀로 지은 밥이 어떠한지 그제서야 알겠더군요. 한번은 좀 비싼 일본쌀을 먹은 적이 있는데 룸메이트인 베트남 친구가 쌀이 약간 찰져서 독특하다고 했던가 싶습니다. 쌀을 주식으로 삼는 한국이나 다른 아시아인들에게 쌀은 어디에 가서 살고 있던 유전자에 각인된, 과거의 역사고 현재의 삶이며 아마도 미래에도 우리 곁에 있을 소중한 것들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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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1963년 전라남도 곡성 출생.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중퇴하고 1991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중편 '씨앗불'을 발표하며 작가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92년 여성신문학상, 1995년 제13회 신동엽창작기금수여, 2004년 제36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2005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부문 올해의 예술상, 만해문학상, 요산김정한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의 모습과 가난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다뤄온 작가 공선옥. 특히 여성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모성을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표현해 내는 소설가이다. "근대에 태어났지만 전근대적인 삶을 살았다"고 전하는 작가의 음성은 유년시절 아버지는 밖으로 나돌고, 세 자매가 생존을 위해 뛰어야 했던 상황에서 둘째 딸의 책무를 지닌 채 "같은 연배 또래들이라고 해서 같은 시대를 사는 것은 아님"을 깨닫는다. 참외 파는 소녀이기도 했으며, 입학만 한 상태에서 무학점 학생으로 남아야 했고, 빚에 쫓겨 다니는 아버지, 몸이 불편한 어머니의 병간호가 작가 공선옥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이었다. 공장을 떠돌며 위장 취업자가 아닌, 대학생 출신 생계 취업자였으며, 나중에는 고속버스, 관광버스, 직행버스를 전전하며 안내양을 하던 어느 날 “나의 궁핍한 시절이 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작가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소설가 공선옥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목마른 계절」 「우리 생애의 꽃」 등 개성있는 작품을 잇따라 발표하며 가진 자에게는 눈물의 슬픔을, 없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기쁨을 안겨 주는 작가이다. 화려한 정원에서 보호받고 주목받는 꽃보다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바람 부는 길가에서 피었다 지는 작은 꽃들에게 눈길을 보내온 작가는 작품 속에서 주로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의 삶, 특히 여성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모성을 섬세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담아내고 있다. 2002년 『멋진 한세상』이후 5년만에 내놓은 소설집 『명랑한 밤길』역시 그녀의 작품 경향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소설집 역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버둥거리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국내 최초로 온라인 독자 커뮤니티 문학동네에 일일연재되어, 화제를 모았으며, 가장 아픈 시대를 가장 예쁘게 살아내야 했던 젊은이들의 고뇌를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스무 살 시기의, ‘사람들이 많이 죽어간 한 도시’에서의 쓸쓸함과 달콤함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란』에서는 가족의 빈자리를 견디며 꿋꿋이 살아가야 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일궈낼 수 있는 삶의 행복한 순간을 유려하고 따뜻하게 그려냈으며, 『꽃 같은 시절』은 삶의 터전을 위협받는 사람들, 철저하게 이 사회의 '약자'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꽃 같은 싸움을 담고 있다. 소설집 『피어라 수선화』, 『내 생의 알리바이』, 『멋진 한세상』, 『명랑한 밤길』, 『나는 죽지 않겠다』, 장편소설 『유랑가족』,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영란』, 『꽃 같은 시절』,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