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비서는 호강에 겨웠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6.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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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원작소설을 읽고 떠오른 첫 생각. ‘얘가 호강에 겨웠구나.’ 적어도 전 그 생각밖에는 안 들더군요.

앤디의 상사 미란다 프리슬리 (메릴 스트립 분)
물론 소설 속의 미란다 프레슬리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보스는 아니죠. 성격 더럽고 부하들에게 불친절하고 가끔 어처구니없는 기벽으로 아랫사람들 진을 빼고…. 그런 사람 개인 비서로 들어온 사람들이 몇 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뛰쳐나가는 것도 이해가 가요. 하지만 과연 객관적으로 봤을 때 미란다 프레슬리가 그렇게까지 나쁜 보스일까요? 한 번 여러분의 사회생활을 돌이켜 보시죠. 그리고 한 번 소설 속의 미란다 프레슬리를 들여다보세요. 프레슬리 편집장은 앤디를 (1)성추행한 적도 없고 (2)성차별이나 지역차별이나 학벌차별을 한 적도 없고 (3)월급을 안 준 적도 없고 (4)일을 다 시켜놓고 나중에 그 공적을 빼앗은 적도 없고 (5)억지로 술판에 끌고 가 술을 먹이지도 않았고 (6)적당히 타락한 자신의 지저분함을 부하들에게 강요한 적도 없습니다.

물론 출판도 안 된 해리포터 책을 구해오라고 시키는 것 따위는 좀 심했죠. 저도 미란다 프레슬리가 천사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난 ‘상사’라는 사람들 중에 미란다보다 더 혐오스럽고 불쾌한 인물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적어도 미란다 프레슬리의 ‘뒷담화’는 재미있기라도 합니다. 나중에 친구들에게 자기 모험담을 들려주면 다들 좋아할 걸요. 하지만 이런 ‘상사’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재미있지도 않습니다. 그냥 지겹고 지겨운 여러분 삶의 일부일 뿐이죠. 아마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들 중 운 좋은 몇 명은 나중에 그런 상사가 될 것입니다.

정리해보죠. 적당히 타락한 보통 상사보다는 약간 미친 괴짜 악마를 상사로 두는 게 몇 배는 좋습니다. 앤디도 그 밑에서 손해 본 건 하나도 없어요. 겪을 때는 지겨웠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재미있을 경험을 엄청나게 쌓았고 (소설 속 텍스트를 연장해 생각한다면) 회고록을 써서 엄청 돈을 벌었고 심지어 회고록을 쓸 동안 먹고 살 돈은 회사 다닐 때 공짜로 챙긴 물건들을 팔아 벌었죠. 대다수 우리들은 그런 짓도 못합니다. 그놈의 상사 이야기를 인터넷에 올리고 투덜거려봐야 넘쳐나는 게시판 한탄의 일부일 뿐이죠. 여러분은 탈출하지도 못합니다. 그냥 사회생활이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죠.

영화 버전이 소설보다 낫게 느껴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소설은 앤디의 경험을 엄청나게 괴상하고 끔찍한, 혼자만의 지옥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하지만 영화는 은근슬쩍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모든 사회생활이 다 그런 구석이 있고 너 역시 특별하지 않아. 게다가 세상 다른 사람들의 지루한 삶에 비하면 네가 1년 동안 겪은 경험은 엄청 근사한 거란 말이야. 적어도 넌 공짜로 파리에 가봤고 수많은 명사들과도 이야기를 나눴잖아.”

하긴 할리우드에서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 걸 생각해보면 이런 교훈은 당연하죠. 그 동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미란다 프레슬리 정도의 괴팍함은 일상일 걸요. 아마 회사마다 그런 괴짜들이 한 다스 정도는 있을 겁니다. 영화가 앤디의 한탄으로 끝나지 않고 보다 내용 있는 갈등을 추가한 것도 그 때문이죠. 할리우드 사람들이 그 정도 한탄으로 만족한다면 뭔가 심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관객들을 설득하기 전에 자기네들을 설득할 무언가가 필요해요.

원작소설을 쓴 로렌 와이스버거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소문에 따르면 그 사람은 자신의 상사였던 미국판 <보그>의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를 모델로 미란다 프레슬리를 창조했다고 합니다. 정말 상사를 싫어했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소설을 쓸 때 원동력이 되었을 복수심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요? 지금 그 사람은 그 보스를 모델로 베스트셀러를 쓰고 영화 판권을 팔아 백만장자 유명인사가 되었어요. 그리고 그게 모두 안나 윈투어 밑에서 청춘을 조금 바친 결과란 말입니다. 정말 호강에 겨운 사람이에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직도 그게 불만이라면 그 호강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좀 나눠주죠?

2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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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씨

2006.11.17

날개펴기 / 조금 늦어서 이 덧글을 보실런지는 모르겠지만...이 칼럼의 제목은 듀나님이 붙이시는 게 아닙니다. Yes24 쪽에서 임의로 붙이는 거 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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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펴기

2006.11.09

호강에 겨웠다..까지 표현하는건, 조금은 튀려는 의지가 다분한 느낌의 제목같군요~ 요즘은 눈길끌기가 어려우니 이런정도는 이해할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호강에 겨울정도로 좋았던 상사는 아니었구요, 영화덕에 매릴스트립의 연기력덕에 상사가 더 카리스마 있어 보였지않나..싶습니다.
타인의 입장에서 봤을때 그것이 호강으로 비춰졌다 할지라도 본인이 겪어 느끼기에 그것이 악마적으로 와 닿았다면 굳이 호강아녔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봐요..
왜 그런말이 있쟎아요?
하루종일 물을 길러나르는 일을 직업으로 한 사람에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때, " 부탁인데 물 한번만 길러다 줄래요?" 라는 부탁을 한다면, 그건 그 사람에겐 악마적인 부탁으로 다가오지 않을까요?

너무 반대적인 시각만 돋보인다는 생각은..조금 한번더..생각해 보고 결정짓는것이 글쓰는 사람의 미덕이 아닐까..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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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daydreamer

2006.11.09

공감합니다. 최소한 미란다한테는 직업적인 자세라도 배울 수 있잖아요.
듀나님이 위에 열거한 안좋은 상사의 본보기를 아직도 내 주변엔
너무나 흔다다구요. 본인도 겪은건 두 세가지쯤 되구요.
나는 아무런 노력없이 똑같은 벨트가지고 난리친다고 웃었던
앤디도 좀 개념없는 것 같았어요.
아무리 앤디가 패션계는 겉치레가 심한 곳 이라고 자기가 생각하는
대단한 신문사가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 내가 돈을 받고 일하는 곳이잖아요.
그 누구더라? 앤디의 패션을 도와준 남자 있잖아요.
그 남자말대로 노력도 안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솔직히 직장에서 그런 조력자를 만나기도 힘들어요.)
그리고 어차피 사회생활하면 패션계만 힘들겠어요?
어떤 직장이나 재수없음의 모양만 다르지 그런 상사는 있다고 봐요.
그런 면에서 영화가 훨씬 나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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