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예술가들은 하고 싶은 걸 해야 합니다
2005.09.07

이 해프닝은 우스꽝스럽습니다. 한마디로 이런 논리에 따른 것이니까요. “중국애들은 <투란도트>가 있고 일본애들은 <나비부인>이 있어! 우리도 이런 유명한 이탈리아 오페라가 하나 있어야 해! 푸치니는 죽었으니 메노티를 데려오자!” 그래서 메노티를 불러온 주최측에서 원했던 텍스트는 <심청>이나 <춘향전>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메노티는 그 기계적인 요구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시집가는 날>을 선택했던 거죠.
그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왜 <투란도트>와 <나비부인>에 집착해야하는 건데?”라고 물었습니다. 하긴 그래요. 중국이나 일본이 노골적인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으로 범벅이 된 이 작품들을 자랑스러워해야 할 이유가 뭡니까? 맞는 말이죠.
그런데도 웃기는 건 여전히 우린 <투란도트>나 <나비부인>을 부러워하고 중국인들이나 일본인들에게 이 작품은 여전히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동양 오페라 가수들이 <나비부인>을 통해 데뷔했습니다. 장예모가 연출한 자금성의 <투란도트>가 벌어들인 수익은 얼마나 될까요? 아무리 오리엔탈리즘이 어쩌니 하고 반박을 해도 이런 게 하나 있으면 좋습니다. 그래서 전 메노티 버전 <심청>이나 <춘향전>을 원했던 올림픽 주최자들의 심정을 이해해요. 여전히 바보스러운 행동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저 같으면 어쨌겠냐고요? 흠... 글쎄요. 저 같으면 다른 텍스트를 주었을 겁니다. 보다 현대적인 것으로요.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김기영의 <하녀>입니다. 괜찮은 오페라 소재 같지 않습니까? 메노티의 멜로드라마티스트적 감성에도 비교적 잘 맞을 거고 쓸데없이 한국적 정서를 찾느라 함정에 빠질 필요도 없습니다. <투란도트>나 <나비부인>처럼 장식적이지는 않지만 1980년대 말에 그딴 걸 원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었어요. 그런 촌스러운 아이디어를 떠올린 사람들은 반성하고 구석에서 손들고 서 있어야 합니다.

<시집가는 날>과는 달리 <러프 컷>이 제대로 뽑혀져 나온 건 그 작품을 만든 예술가가 주최측의 요구에서 자유로웠고 작품을 끌어갈만한 자발적인 예술적 영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최 측에서는 여전히 바우쉬를 간접적으로 조종하려 했습니다. 휴전선으로 끌고 가서 분단 민족의 비극을 체험시키고 바우쉬가 그걸 작품에 반영하길 바랐죠. 현명하게도 바우쉬는 그걸 깡그리 무시하고 그 사람의 작품을 남한 사회에 대한 자신과 동료들의 인상으로 채웠습니다. 결국 예술가들이란 하고 싶은 걸 해야 합니다. 푸치니가 <투란도트>나 <나비부인>을 중국과 일본에서 의뢰받아 만든 건 아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편한 건 이 두 세계의 교류가 전적으로 자발적이었던 겁니다. 드래블에게 『한중록』을 억지로 넘겨준 뒤 제발 이 소재를 바탕으로 끝내주는 영어 소설을 써달라고 안달하는 사람들은 없었어요. 드래블과 이 소설의 주인공 할리웰 박사에게 『한중록』은 그냥 독립적이고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다가왔습니다. 조금 낙천적으로 본다면 그건 슬슬 우리의 문화가 세계 문화의 일부가 되고 있다는 증거겠죠. 국내 문학 작품의 번역과 소개의 중요성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고요.
2개의 댓글
필자

채널예스
채널예스는 예스24에서 운영하는 콘텐츠 플랫폼입니다. 책, 영화, 공연, 음악, 미술, 대중문화, 여행 등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kritiker
2005.09.23
111
2005.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