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의 비명횡사, 배후는 아버지?
왕자의 비명횡사, 배후는 아버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소현세자를 볼모로 떠나보내게 된 인조는 “매사에 힘써 행하되 격노하지 말고 또 처신을 가벼이 하지 말라”는 당부를 건네며 눈물로 세자를 전송했다. 소현세자는 당장의 곤경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을 뿐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깊게 고민할 분별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분별력 결여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는 가혹할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다. 2013.03.07
인조 병자호란 비운의 조선 프린스 소현세자 효종
가장 참혹하게 생을 마감한 비극의 조선 왕자, 영창대군
가장 참혹하게 생을 마감한 비극의 조선 왕자, 영창대군 영창대군은 탯줄에 묻은 피가 다 마르기도 전에 조정분란의 한가운데로 내몰리며 왕세자 광해군의 강력한 정적이 되어버렸다. 그는 조선왕조 제14대 국왕인 선조의 열네 번째 막둥이 아들로 태어났다. 이때 선조의 나이 쉰다섯 살,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왕후의 나이 스물세 살, 왕세자 광해군의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단종과 더불어 조선왕조 사상 가장 참혹하게 생을 마감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손꼽히는 영창대군은 태어나기 전부터 불운에 찬 삶이 운명지워져 있었다. 2013.02.28
영창대군 광해군 인목왕후 비운의 조선 프린스
왕이 못 된 불운의 왕자, 속으로 골병 든 이유
왕이 못 된 불운의 왕자, 속으로 골병 든 이유 월산대군은 주어진 명예와 부에 안주하고 있기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굴레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럴수록 더욱 조심하고 또 자제하려 애를 썼다. 정치 문제 등의 국정에 전혀 간여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거의 매일같이 벌어졌던 연회석에서 단 한 번도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주정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왕실ㆍ종친과 관련된 송사에서도 원칙과 명분에 충실했다. 2013.02.21
월산대군 성종 인수대비 비운의 조선 프린스
비도덕적인 여자관계로 결국 무너진 양녕대군
비도덕적인 여자관계로 결국 무너진 양녕대군 1403년 성균관에 정식으로 입학해 본격적인 왕재교육을 받기 시작한 양녕대군은 당시만 해도 별 말썽을 일으키는 일도 없었고 평판도 좋았던 것 같다. 양녕이 열한 살이 되던 1404년에는 드디어 세자로 책봉되기에 이르렀다. 온 세상 사람의 선망과 축복을 한 몸에 받으며 조선의 세자가 된 양녕대군에게 이제 남은 일이란 얌전히 있다가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는 일밖에 없어 보였다. 2013.02.14
양녕대군 봉지련 이제 태종 이방원 비운의 조선 프린스
조선은 어떻게 500년이나 존속했을까?
조선은 어떻게 500년이나 존속했을까? 오늘날에도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적서차별 의식은 조선시대 사회ㆍ정치관습으로, 조선왕실의 경우 왕위계승자 결정에 적장자계승을 기본으로 삼았다. 언뜻 보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특히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왕조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조선왕조 특유의 왕위계승방식이다. 2013.02.07
이방원 태종 이방원 비운의 조선 프린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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