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외계 종족이 지구를 침략한다. 지구는 우주전쟁에 휘말려 멸망할 위기에 처한다. 그런데 다른 외계인 종족이 나타나 침략자를 저지한다. 지구는 구원받았다. 그래서 지구인들은 침략자를 물리쳐준 고마운 외계인 종족을 지구에 받아들인다. 그들의 ‘조언’에 따라 모든 국가를 해체한다. 지구는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지고 지구 사람들은 특별한 허가를 얻어야만 구역 경계를 넘어 여행할 수 있다. 고마운 외계인들의 ‘충고’에 따라 우주과학 연구나 항공기 운항 등도 전면 중단된다. 대신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숲을 돌보는 데 집중한다. 그렇게 생산한 식량을 지구인들은 외계 종족에게 ‘감사의 표시’로 바친다. 학교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지구인이 나약하고 어리석어서 외계인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이상하다. 외계인의 모습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외계인들이 보낸 시가 모양의 거대한 우주선이 하늘에서 맴돌고 달걀 모양의 소형 외계인 교통수단이 땅에서 돌아다니지만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지구인들은 ‘고마운’ 외계종족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시가를 피우지 않는다. 불경스럽게도 외계종족의 우주선을 불태우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달걀도 먹지 않는다. 외계인들이 가장 흔하게 쓰는 교통수단을 감히 두들겨 깨뜨리고 안에 든 외계인을 먹어버리려는 듯한 인상을 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가장 커다란 금기는 개미다. 개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존재하지만, 존재한다고 인정하면 안 된다. 개미를 보았어도 보았다고 말하면 안 된다. 개미는 없다. 어째서일까? 주인공인 소년 ‘팀’은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폴란드 SF 작가 야누슈 자이델(Janusz Zajdel, 1938-1985) 소설 『그림자로부터의 탈출』(Wyjście z cienia) 이야기다. 작품 내용은 많은 부분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폴란드를 공산화하고 지배하는 과정을 외계종족의 지구 침략에 비유하여 풀어내고 있다. 1939년 9월에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소련의 스탈린과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1939년 8월에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맺어 서로 침공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러니까 스탈린은 히틀러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 소련은 1940년 봄에 당시 폴란드와의 국경 지역이었던 카틴(Katyn) 숲에 폴란드 군 장성, 학자, 정치인 등 엘리트들을 모아서 학살한다. 폴란드 입장에서 보면 나치 독일이나 소련이나 똑같이 폴란드를 멸망시키려는 침략자들이다.
그런데 나치가 1941년 소련을 침공하면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려 공식적으로 ‘전쟁피해국’이 된다. 1945년 나치가 패배하고 전쟁이 끝날 때 폴란드는 미군과 소련군에게 지배당한다. 그리고 1948년에 최종적으로 공산화되어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한다.
역사적으로 제국은 언제나 중심과 변방을 구분한다. 변방, 즉 식민지의 자원과 인력은 약탈이나 착취를 통해 헐값에 제국에 공급된다. 제국의 권력자에게 물리적으로 가까울수록 그 자원과 인력은 풍부해진다. 그리고 제국의 오염물이나 쓰레기는 변방으로 실려 나간다. 변방은 병들고 굶주리고, 제국은 변방의 피를 빨아 풍요롭게 번성한다.
자이델은 핵물리학자였는데, 46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사망한 원인에 대해 소련이 자국에서 하고 싶지 않은 위험한 핵실험을 ‘위성국가’였던 폴란드에 떠넘겼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있다. 자이델도 그런 위험한 핵실험에 동원된 학자들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충분히 개연성 있는 주장이다. 러시아는 1957년 인류 최초 인공위성 발사 성공, 1961년 인류 최초 남성 우주비행사의 지구 궤도 비행 성공, 1963년 인류 최초 여성 우주비행사 비행 성공 등 ‘인류 최초’의 영광을 모두 가져갔다. 그러나 실제 인공위성과 우주선 발사는 러시아 본토가 아니라 카자흐스탄에 있는 바이코누르 기지에서 이루어졌다. 즉 우주선 발사로 인한 이 지역의 환경오염 문제는 카자흐스탄이 모두 떠맡았다. 이런 식이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간 전쟁을 시작하면서 폴란드에 휘발유와 경유 등 연료 수출을 제한하거나 중단하자 폴란드 경제 위기가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권위적인 공산정부에 저항하는 ‘솔리다르노시치’ 운동이 1980년에 시작되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1981년 폴란드 공산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은 1983년에 해제되었다. 이런 사건들 때문인지 『그림자로부터의 탈출』은 1978년에 완성되었으나 1983년 계엄령 해제 이후에야 출간될 수 있었다.
자이델의 시대는 복잡하고 위험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세상은 언제나 복잡하다. 20세기 혁명 SF를 21세기에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일하는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라는 공산혁명의 이상은 유토피아의 모습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소련은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현대의 제국으로 군림했다. 그리고 지금 러시아 권력자는 그 영광을 다시 꿈꾸며 ‘제국의 변방’이기를 거부하는 우크라이나를 공격하여 침략전쟁을 이어간다. 한편 주변국가들은 전쟁이 터지고 사람이 죽고 국가 간에 약탈과 착취가 만연했던 과거가 되돌아올까 잔뜩 긴장하여 몸을 사린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어야만 한다. 참혹한 과거가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걱정과 두려움을 넘어, 한번 겪어봤으니 다시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결연함을 가지고 더 나은 세계를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야 한다. 상상하지 않는 곳에는 도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림자로부터의 탈출』에서 과학자들은 비밀리에 연구하여 외계종족의 정체를 밝혀내고, 외계인들은 약점이 알려지자 황급히 지구를 떠난다. 지구인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고 ‘그들이 없는 세상’에서 사회 체제를 하나씩 다시 정비하기 시작한다.
폴란드 SF 팬덤은 1984년 최고 인기 작가에게 수여하는 ‘스핑크스상’을 제정했다. 이 상은 1985년 자이델이 사망한 뒤 그의 이름을 따서 ‘야누슈 자이델 상’으로 변경되었다. ‘자이델 상’은 지금까지 40년간 폴란드에서 팬들에게 선택받은 SF 작가만이 받을 수 있는 과학소설 분야의 가장 영예로운 문학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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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SF와 환상 문학을 쓰고 번역도 한다. 2022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선정됐다. 지은 책으로 『문이 열렸다』, 『죽은 자의 꿈』 등의 장편 소설과 『저주토끼』 『왕의 창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