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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승 칼럼] 우리가 11시 59분에 놓고 온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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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쾅, 또는 쩌억, 아니면 스르르 절망적 위기의 순간. 쓰기는 그 순간을 잠시 붙잡고 있다가 파열되고 분해되고 사라진 몸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자정, 자시(子時)의 한가운데. 사라지면 나타난다.

약속 장소는 도시 정 중앙에 위치한 공원이었다. 공원 분수대를 기점으로 1가, 2가, 3가가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는 거리 구획과 짧고 반듯한 횡단보도 등이 기획도시의 정체성을 부각하고 있었다. 분수대에서 동쪽으로 우뚝 솟은 95m 높이의 TV 수신탑이 도시 어디에서나 보였다. 탑의 한 가운데에서 반짝이는 커다란 전광시계도 마찬가지였다. 『댈러웨이 부인』 속 빅벤(Big Ben)의 타종소리가 시각이 아닌 시간의 흐름을 내내 환기하는 것처럼 점멸하는 탑의 시계는 도시 어디에서나 삶과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음을,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와 이야기의 매체임을 깜빡, 잊었다가도 깜빡, 인식시켰다.

우리는 매일 망합니다.

그가 ‘우리’에 유난히 힘을 준 것처럼 느껴진 건 내 방어기제 탓인지도 몰랐다. 약속시간 1분 전에 전광시계가 정면으로 보이는 분수대 앞으로 쭈뼛쭈뼛 걸어오던 모습에서는 느껴지지 않던 단호함이었다. ‘우리’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문장으로 걸러집니다. 당신은 어느 쪽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글쎄요, ‘우리’는 모르겠고 나는 망한 게 확실하죠. ‘우리’는 나도 부담스러웠다. 탑에서 11시 30분이 깜빡였다. 곁눈으로도 그가 짓는 서운한 표정이 보였다. 나는 11시 30분에 시선을 두고 내가 읽은 그의 글 중에서 이런 상황을 모면하기에 적절한 문장들을 떠올리려 애썼다. 우리는 차이 때문이 아니라 차이를 외면하는 침묵 때문에 연대에 실패한다와 같은. 재일 한국인 3세 여성으로 일본에 귀화한 그와 한국 국적이지만 다소 복잡한 가족사를 가진 내가 각각 어떻게 망했는지 소회하기에 밤 11시 30분이 적절할지 알 수 없었다. 밤공기가 의식의 흐름처럼 느껴지는, 무한히 팽창할 것 같은 시간이기는 했다. 


망함에는 세 가지 모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음 중 해당되는 것을 골라보시겠습니까?

A. 콰쾅

B. 쩌억

C. 스르르


그의 한국어 발음이 망함의 양상에 적절한 균열을 부여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나도 매일 망하는 사람이었다. 일상적 망함을 가짜 죽음 상태, 혹은 죽음 직전까지 갔다 오는 시간의 비균질한 이동성이라고 할 수 있다면 관련 경험은 모자라지 않았다. 처음 콰쾅은 폭발 후 분해되는 망함이겠네요. 개인적으로 굉장히 부러운 방식의 망함입니다. 저도요. 이 순간만큼은 ‘우리’가 가능했다. 두 번째 쩌억은 혹시 추락입니까?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을 것처럼 팔을 뻗다가 스스로 놀라 거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땅이 갈라지고 아래로 추락하며 파열되는 방식입니다. 이런 망함에는 후유증이 길었다. 수시로 발 디딜 땅이 사라진다. 머리부터인가요? 저는 언제나 발부터입니다. 꿈에서도 그렇지, 발가락 끝에 힘을 주며 생각하는 사이 우리는 11시 43분에서 44분으로 떨어졌다. 

저는 주로 세 번째입니다. 스르르. 말이 불러오는 몸의 감각이 이미 별로다. 내가 유추하기 어려워한다고 여겼는지 그는 이 도시와 옆 도시의 경계에 30년 주기로 활동하는 활화산이 있다고 덧붙였다. 30년이 지난 게 며칠 전, 당장이라도 폭발과 용암 분출이 이어질 수 있었다. 날이 좋으면 이곳에서도 볼 수 있다고 그는 밤의 허공 너머를 시선으로 어루만졌다. 재난의 가능성을 외면할 수 없도록 시야 안에서 지속적으로 불안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탑의 전광시계는 화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길함은 자주 시간에 속한다. 화산 활동은 잘 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망함은 그렇지 않지만요. 스르르 유출되고 침범당해 밀려나는 거예요. 일반적인 시야에서 사라지는 거죠. 그런 건 얼마간의 주기로 일어난다고 해야 할지… 

매 순간요. 그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카프카는 지나치게 좋은 시력을 가졌던 겁니다. 더 자주 망할 수밖에요. 11시 50분. 전광시계를 확인하며 그가 말했다. 카프카의 망함은 차치하고(죽은 작가들의 망함이 후세대 독자의 기쁨이 된다는 공식 안에서 카프카만큼 망한 작가도 드물다), 어쩌다 대화가 망함 안에 갇혔는지 문득 기억을 더듬었다. 11시 51분. 첫 만남과 어색한 인사, 시간이 증식하는 침묵 이후에 매일 글을 쓰는 동력이 있는지 내가 질문했던 것 같다. 쓰기라는 공통 행위에 기대 낯가림을 희석시키려던 시도였을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망합니다. 그의 대답은 진실했다. 11시 52분. 기억 속 ‘우리’에는 꿈틀거릴 공간이 있다. 쓰고 망하는 수순에 익숙해진 나머지 망하니까 쓴다는 그의 말이 11시 53분만큼 낯설긴 했지만.

우리는 콰쾅, 또는 쩌억, 아니면 스르르 절망적 위기의 순간을 맞는다. 쓰기가 그 순간을 잠시 붙잡고 있다가 파열되고 분해되고 사라진 몸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시간을 예술적 기호로 만든 울프처럼 그는 어둠을 장소 삼아 시간과 기억이 울려 퍼지도록 두었다. 11시 55분. 시간에 가속이 붙는다. 숨이 차다. 거절의 고통이 느껴진다. 몸이 밀린다. 혼망해진다. 그만 퇴장하고 싶다. 그 전에 결정해야 한다고 그가 말했다. 뭘요? 저쪽으로 가져가지 않고 여기 남겨둘 것을요. 그는 이미 결정을 마친 듯한 홀가분한 얼굴로 나를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의 등 위로 숫자들이 한없이 느려졌다가 순식간에 점멸했다. 56, 57, 58… 사라짐은 밤의 것. 59. (너무 느리다) 자정. 

거기에 남겨두고 온 것을 떠올린다. 유령의 흔적처럼. 다행히 우리는 또 스르르 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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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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