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숙의 노상비평] 에어컨 죄책감
죄책감은 때로 기후 공동체로서의 각성에 쓰디쓴 원료가 되기도 한다. 근 미래에는 어떨지 몰라도 지금 당장은 누군가가 내 몫의 에어컨 실외기 온풍을 맞아야 한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인 서울의 오늘 최고 온도는 34도, 체감 온도는 42도. 올여름 내내 그랬던 것처럼 오전부터 폭염 경보가 내려졌다. ‘기록적’이라는 수식은 이제 별다른 위기의식도 없이 뉴스 기사에 관성적으로 동원된다. 덥다는 말로도 부족한, 조금만 걸어도 온몸을 쇳덩이처럼 달구고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미친 열기. 어쩌면 우리는 이미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나 기만적이게도 이 글은 에어컨을 가동한 집 안에서 쓰이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야외 노동자들처럼) 살인적인 열기에 의해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받고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사람을 만나거나 전시를 볼 때를 제외하고 나는 매일 쾌적한 온도가 유지되는 집 안에서 모니터 앞에 앉았다 섰다를 반복한다. 그러다 종종 흡연을 위해 옥상으로 향한다. 내가 사는 집은 5층짜리 건물의 꼭대기 층. 언덕배기에 위치한 이 건물의 옥상은 오전 11시만 돼도 지열을 고스란히 흡수해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삐질삐질 난다. 게다가 대부분의 세대가 쓰는 에어컨 실외기가 옥상에 설치되어 있기에 뜨거운 온풍이 쉴 새 없이 기분 나쁜 날숨처럼 온몸에 들러붙는다. 그러나 그때만 참으면 그만이다. 어떻게 에어컨 실외기가 내뿜는 바람을 불평할 수 있을까? 쾌적한 냉방 없이는 일상생활조차 할 수 없으면서?
그러다 어느 날인가 죽어도 신호가 안 바뀌는 교차로에 서서 직사광선에 고스란히 구워지는 동안 문득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즉 자비 없이 훅훅 불어대는 정오의 열풍이 옥상에 늘어선 에어컨 실외기의 바람과 정확히 똑같은 온도와 습도인 것 같다는 생각에 미친 것이다. 내가 그 순간 우리 모두가 쉬지 않고 에어컨을 틀어댄 결과로 대기가 이토록 뜨거워지고 말았다는 반성적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 건 당연하다. 이건 꼭 ‘환경 문제’에 관심 있지 않더라도 뉴스를 정기적으로 확인하는 도시인이라면 누구든 한번쯤 경험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사고의 흐름일 것이다.
우리는 실내에서 에어컨을 튼다. 냉매가 고압으로 압축되는 과정에서 열기가 발생한다. 열기는 실외기를 통해 바깥으로 방출된다. 그 결과 대기는 열기로 꽉 찬다. 더구나 이 열기는 결코 공평하게 분담되지 않는다. 당장 올해 여름 발행된 폭염(기후) 불평등을 다룬 기사들의 헤드라인만 봐도 그렇다. “'폭염 속 노동'에 6년간 온열질환 산재 147건·사망사고 22건” 1 , “폭염에 바깥일 말라지만…“농작업 중단할 수 없는게 현실”” 2 , “가난할수록 가혹한 폭염… 앞으론 '예외' 없다” 3 , “"방 안은 불지옥" 이른 폭염에 힘겨운 쪽방촌 주민들” 4 등등. 그러니까 (특히 도시의) 실내에서 가동한 냉방의 대가를 다른 누군가가 치르고 있다는 말이다.
기온 상승에 대해 꼭 알아야 할, 그러나 우울한 전망을 담은 『폭염 살인』(원제는 “열기가 당신을 먼저 죽일 것이다”)의 저자 제프 구델은 ‘에어컨 의존의 악순환’이라는 제목의 절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한마디로 악순환이다. 그리고 이 악순환은 도시, 특히 더 노후하고 더 빈곤한 도시들에서 극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도시에서는 낡고 비효율적인 창문형 에어컨이 모든 건물에 매달린 채 실내의 열기를 빨아들여 바깥의 길거리로 내뿜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에어컨은 전혀 냉방 기술이 아니다. 에어컨은 단순히 열기를 재분배하는 도구일 뿐이다.” 5
사실 이런 관점은 별로 새롭지 않다. 그러니까 에어컨을 틀면 틀수록 기온은 상승하고, 그 여파는 고스란히 에어컨을 틀 수 없는 환경과 조건에 놓인 이들이 감당하게 될 거라는 관점 말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쾌적하기 위해서, 일을 하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에어컨을 틀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폭염 살인』의 저자를 비롯해 많은 기후 기자, 운동가, 연구자들이 에어컨이 가속화하는 기후 위기와 기후 불평등에 대해 지적해 왔기에, 우리는 에어컨을 틀 때마다 기후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나 레이 필립스와 같은 좌파 가속주의자는 그와 같은 이유로 무작정 에어컨을 끄거나 줄이자고 말하는 대신 오히려 에어컨을 일종의 권리로서 모두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우리가 “지금 당장 전기 공급을 탈탄소화할 수 있다면” 말이다. 마크 피셔가 창립한 제로북스에서 『긴축 생태학과 붕괴 포르노 중독자들』 6 이라는 제목의 단독 저서를 내기도 한 그는 『에어컨에 대한 변호』 라는 논란을 불러일으킨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개인적인 금욕주의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 대신 실제로 배출량을 줄이고 인류 대부분을 개선할 수 있는 조치를 장려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이를테면 빠른 기술 전환을 촉진하는 규제, 개발도상국에 대한 관대한 지원, 모두를 위해 저렴한 비용으로 안정적이고, 깨끗한 에너지를 제공하는 공공부문확장이 그렇다.” 7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의 저자 아론 바스타니와 마찬가지로 8 , 그는 (필요하다면 핵을 도입해서라도) 국가적 차원의 계획적 기술 증진과 보급을 통해 인류 전체가 해방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일견 이는 완전히 만족스러운 제안이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우리는 더 이상 에어컨을 켜는 일로 얄팍한 죄책감 같은 건 전혀 느끼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국가가 나서서 개선하고 규제해야 할 규모의 일이니까. 하지만 죄책감은 때로 기후 공동체로서의 각성에 쓰디쓴 원료가 되기도 한다. 근 미래에는 어떨지 몰라도 지금 당장은 누군가가 내 몫의 에어컨 실외기 온풍을 맞아야 한다. 열기만큼이나 죄책감을 재분배하는 에어컨의 서늘한 냉풍을 맞으며 마음 한구석이 따끔거리는 감각을 깨끗하게 씻어 내리기란 어렵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고 믿는다.
1 김연정 기자, 연합뉴스, //www.yna.co.kr/view/AKR20240629034200001
2 지유리 기자, 농민신문, //www.nongmin.com/article/20240807500653
3 송은아 기자, 세계일보, //www.segye.com/newsView/20240530514646
4 박형빈 기자, 연합뉴스, //www.yna.co.kr/view/AKR20240614100100004
5 제프 구델, 왕수민 옮김, 『폭염 살인: 폭주하는 더위는 어떻게 우리 삶을 파괴하는가』(원제: The Heat Will Kill You First), 웅진지식하우스, 2024. 인용 일부를 원문을 참고해 다시 옮겼다.
6 “Austerity Ecology & the Collapse-porn Addicts”, //www.collectiveinkbooks.com/zer0-books/our-books/austerity-ecology-collapse-porn-addicts
7 Leigh Phillips, ‘In Defense of Air-Conditioning’, JACOBIN, //jacobin.com/2018/08/air-conditioning-climate-change-energy-pollution
8 아론 바스타니, 김민수, 윤종은 옮김,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 21세기 공산주의 선언』, 황소걸음, 2020. 예를 들어 이런 부분이 그의 기술에 대한 낙관을 보여준다. “게다가 인류는 탈탄소화를 통해 무한한 에너지로 가는 길에 들어선다. 이 에너지는 값도 영구적으로 더 싸다. 태양은 나무와 석탄, 기름과 달라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많은 에너지를 생산한다”, “다시 말해 깨끗한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면 단기간에도 1년에 수백만명을 살릴 수 있고, 이후에는 세계에서 가난한 사람의 생활 수준을 전에 없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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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 소수(자)적인 것들의 존재 양식에 관심 있다. 기획/출판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의 일원으로서 웹진 ‘세미나’를 발간했다.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hotleve 를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