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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숙의 노상 비평] 열차 불안, 열차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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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열차에서 내린다. 마치 그러기만 한다면 내가 잃어버린 걸 잊어버릴 수 있을 것처럼, 두고 내릴 수 있을 것처럼.

열차가 줄줄이 지연된 어느 날의 서울역. (사진: 이연숙)

용산역. 오전 10시 20분. 내가 먹어 본 것 중에 제일 비싼 어묵, 그러나 간장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극악무도한 3900원짜리 꼬치 어묵을 씹으면서 열심히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어떤 중년 여성이 등에 맨 두툼한 백팩의 긴 끈을 11자가 아니라 X자로 고쳐 맨 것이 보인다. 허리를 다친 이후에는 사람들의 목과 허리를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렇게 매면 조금 덜 힘든가? 뭔가를 잔뜩 이고 지고 어딘가로 향하는, 혹은 어딘가로 향해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이 상한다. 그 사람들의 가방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 잔뜩 들어 있을지라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이 세상에서 제일 비싼 꼬치 어묵이라도 먹어 배를 채우려는 사람들이 내 앞에 줄지어 서 있고 나는 남은 몫을 최선을 다해 빠르게 씹어 삼킨다. 내가 빠져 나오자 학교 체육복을 입은 여학생 둘이 금세 그 자리를 낚아챈다. 열차가 출발하기 전까지 20분. 이 시간치고는 역이 예상외로 북적인다. 이상하게도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따라붙는 것 같다. 아이스 커피를 주문하기 위해 매대 앞을 얼쩡이자 내 앞으로 한 명, 두 명, 세 명이 벌써 주문한다. 지금 주문하면, 어쩌면 곧 나올 아이스 커피를 포기하고 탑승구로 뛰어야 할 수도 있다. 그런 일도 일어난다.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스무 살 처음 서울에 ‘올라’온 이후 매해 적게는 수십 번, 많게는 수백 번 KTX를 탔다. 주로 돈을 벌기 위해서, 때로 가족과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그러면서 어떤 날은 날짜를 잘못 예매하고 어떤 날은 승차역을 잘못 예매했다. 열차 역시 때로는 연착되고 때로는 영영 오지 않는다. 여기서는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런 불안을 항시 품고 있기에 노이로제 수준으로 여러 번 시간을 체크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서 더더욱 불안은 증식한다. 자주 찾는 역들은 버스와 지하철, 택시에서 내려 얼마나 걷거나 뛰어야 ‘안전빵’으로 역사 내에 진입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서울역: 버스는 15분, 지하철은 7분, 택시는 남영역을 거쳐 공항철도로 진입한다고 했을 때 5분. 용산역: 버스는 15분, 신용산역으로 진입한다고 했을 때 지하철은 10분, 택시는 아이파크몰 달주차장으로 진입한다고 했을 때 5분. 그러나 나는 뛰는 일은 없도록 최선을 다한다. 늦을 것 같을 때에는 차라리 교통수단 안에서 예매한 열차를 취소하고 더 늦은 시간의 열차를 다시 예매한다. 뛰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혹시라도 조금만 더 열심히 뛴다면 열차를 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 순간만큼은 세상 무엇보다 절실한 그 희망이 존재 자체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승객 대기 장소 위를 걷고 있는 비둘기. (사진 : 이연숙)

열차가 출발하기 30분 일찍 역사에 나와 있는 것만큼 일시적으로, 그러나 즉각적으로 나를 안심 시켜주는 일은 없다. 특히 그곳이 다른 어떤 역도 아니고 서울역이라면 더 그렇다. 광장에서 종교 집회를 빙자해 엔터테이너로서 자신의 역량을 뽐내는 종교인들과 흡연실 주변을 서성이며 담배를 구걸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마땅한 제 몫을 요구하는 노숙인들. 그들을 지나 입구로 진입하면 도대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인파가 펼쳐진 역사 안. 대합실에 앉아 함께 뉴스를 시청하는 무감동한 표정의 사람들과 그 주변을 마치 정찰이라도 하듯 돌아다니는 비둘기들, 여기에 더해 용산역의 꼬치 어묵과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가장 비싼 육개장, 돈까스, 햄버거, 샌드위치를 파는 가게들. 나는 항상 처음처럼 패닉에 빠진다. 도무지 이 많은 사람들이 왜 한데 여기에 모여야 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다.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는 이처럼 관계도, 과거도, 얼굴도 필요 없는 개인이 잠시 모였다 헤어지는 장소를 일컬어 ‘비장소’라 정의한 바 있다.1 나는 역사 안 화장실에서 내가 방금 식사를 마친 가게의 노동자와 마주치고 왜 그에게 누구보다 먼저 화장실을 이용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지 궁금하다. 그가 이 끔찍한 곳에서 언제 출근하고 언제 퇴근하고 또 통상 시급보다 얼마를 더 받는지 혹은 그러지 못하는지도.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기로 한다. 모르기로 하기로 한다. 언젠가 출발이 8분 남은 열차를 타기 위해 승강장으로 향하던 날 한 할머니가 눈에 띄게 휘청거리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는 장면을 보고도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그 할머니가 결국 굴러떨어지는 걸 보고서야 8분 남은 그 빌어먹을 열차를 포기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나는 열차를 놓치지 않았다. 나는 단 한 번도 열차를 놓칠 정도로 할머니에게 내 시간을 양보한 적이 없다. 열차를 놓치지 않으면 열차를 탈 수 있고 열차를 탈 수 있으면 아늑한 무덤 같은 좌석 시트에 눌러앉아 빠르게 스치는 풍경을 언제까지고 볼 수 있다. 죽음 같은 안심. 철학자 혹은 문필가 발터 벤야민은 달리는 열차가 보여주는 파노라마적 풍경 속에서 승객들이 “시공간의 증발”을 경험한다고 했다.2  내가 만진 적도 겪은 적도 없는 시공간이 쏜살같이 빠르게 내 눈앞에서 사라진다. 모든 열차는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출발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오직 떠나기 위해서, 잃어버리기 위해서. 그것만큼은 확실하니 어쩌면 다행이 아닌가?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는 동안 떠올랐다 흩어지는 장면들. 스물 한 살인가 두 살 무렵 깜빡 잠이 들어 목적지인 진영역이 아니라 종착역인 창원역에서 내린 적이 있었지. 이미 늦은 밤 너무 멀리 와버렸다고 울먹이며 전화하는 나를 아빠가 화 한번 내지 않고 데리러 와줬던, 그래서 몇 번이고 그를 용서하게 만드는 뿌리째 뽑고 싶은 그런 장면들. 나는 열차 안의 다른 승객들도 뭔가를 잃어버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단지 잃어버리기 위해 열차를 타고 있는지도. 정차역에 가까워지자 두고 내리는 물건이 없도록 주의하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 나온다. 객실 밖 통로 한 뼘짜리 승무원실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아이구, 더워라고 앓는 소릴 낸다. 나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열차에서 내린다. 마치 그러기만 한다면 내가 잃어버린 걸 잊어버릴 수 있을 것처럼, 두고 내릴 수 있을 것처럼.3 


1 마르크 오제, 이상길, 이윤영 옮김, 『비장소』, 아카넷, 2017
2 신혜경, 
『벤야민&아도르노: 대중문화의 기만 혹은 해방』, 김영사, 2009
3 얼마 전 만난 한 작가가 내게 해준 말. “잃어버린 건 오히려 영원히 잊어버릴 수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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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연숙(리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 소수(자)적인 것들의 존재 양식에 관심 있다. 기획/출판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의 일원으로서 웹진 ‘세미나’를 발간했다.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hotleve 를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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