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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우 칼럼] 작은 나와 커질 나
김지우의 굴러서 세계 속으로 – 마지막 화
긴장 덩어리는 어디로 가고 이제는 아빠랑 같이 다니기 싫어서 우는 내가 호주에 있다. 나의 아빠 태균이 들으면 서운할 이야기지만, 그런 내가 좋았고 대견했다. (2024.07.26)
휠체어를 타고 세상을 누비는 구르님 김지우의 여행기. |
난 지금 시드니의 호텔 방에서 훌쩍훌쩍 울고 있다. 지난 여행을 복기하며, 참 잘 지냈다고, 많은 것을 배웠다고, 떠나기 아쉬워 절로 눈물이 차올…랐다면 좋겠지만, 그냥 아빠랑 싸워서 우는 거다.
이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주일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설날을 맞아 아빠가 호주로 왔다. 혼자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올 몸 불편한 딸이 걱정되었던 것인지, 내 호주행이 결정되었을 때부터 아빠는 자신의 호주행을 결정했다.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의 나는 그 결정에 크게 동의했다. 아직 홀로 여행해 본 적 없던 순간의 난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잘 몰랐으므로. 내가 큰 짐을 싸서 공항까지 갈 수 있을지, 캐리어를 끌 수 있는지 몰라서 아빠가 호주로 오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단둘이 대만, 홍콩, 마카오를 여행한 지 딱 일 년째 되는 때였다.
전날 밤 아빠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숙소 앞의 포티튜드 밸리 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저 멀리서 아빠가 배낭을 메고 오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게 된 공간에 가족을 초대한 것 같아 벅찬 기분이었다. 좋아하는 곳을 잔뜩 보여주고 싶다는 기대감과 부담이 한꺼번에 느껴지면서 가슴이 살짝 조였다.
호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원에 누워 햇빛을 만끽하는 것이지만, 이제 막 호주에 도착한 파워 계획형, 나의 아빠 태균은 원하지 않을 일이라는 걸 알았다. 내 나름대로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열심히 계획을 짰다. 숙소 근처 새로 생긴 브런치 카페에서 식사하고, 택시를 불러 생츄어리로 향했다. 동물원에는 언젠가부터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는데, 코알라와 캥거루는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어 대안적으로 선택한 곳이었다. 들판에 캥거루 마흔 마리가 쉬고 있는 풍경은 생경했다. 소동물들이 사는 공간은 동물종을 소개하는 표지판은 있었지만 그들의 이동을 가로막는 울타리나 유리 가림막은 없었다. 그래서 작은 동물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인지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그게 좋았다. 이후에는 시내로 돌아와 작은 도시를 한 바퀴 돌았고,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가를 산책하다가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페리를 탔다. 그리고 멋진 리버뷰를 가진 그리스식 식당에서 코스 요리를 시켰다. 글로 쓰는데도 이 하루가 숨이 차다. 헥헥…
그렇게 이틀을 돌아다니니 병이 났다. 호주에 한 달 살며 얻은 가장 큰 지혜가 ‘가만히 시간 보내는 법’이었던 나는 금세 관광에 흥미가 떨어졌고, 내 여유로운 시계를 다시 찾고 싶었다. 아빠만 놀러 가라고 손을 휘 젓고 잠옷 차림으로 배웅을 했다. 그는 조금 서운해 보였다. 하지만 내 마음은 완고했다. 오늘은 난 못 돌아다녀. 도서관도 가야 하고 강가에서 멍도 때려야 하고 동네 카페에서 커피도 마셔야 하니까. 마지못해 아빠가 짐을 챙겨 현관으로 나섰다. B가 그 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아빠는 B에게 토로했다. “나는 얘를 평생 키웠는데, 얘는 이틀도 나를 못 보살펴줘.”
둘 간의 성격 차이는 시드니에서도 계속되었다. 내게는 제일 정신없고 붐비는 도시가 아빠에게는 볼거리 많은 보물창고였다. 그리하여 호텔 방에서 울고 있는 내가 탄생한 것이다. 숙소에 들어왔다가 또 나가자는 아빠와 잠시 실랑이를 했다. 내게 최고의 여행지였던 호주를 내 방식대로 잘 보내주고 싶은 마음과,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아빠를 일주일도 재미있게 해줄 수 없냐는 자괴감이 함께 들었다. 그 와중에 힘듦을 토로한 엄마에게 ‘아빠한테 잘 해라’는 말을 듣고 서운함까지 더해져 훌쩍훌쩍 울게 된 것이었다. 물론 같은 시간 아빠는 도시의 트램을 타고 야경 구경을 실컷 하고 있었다.
호주에서의 마지막 날은 절반은 함께, 절반은 따로 다니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함께 다니자는 아빠를 뒤로하고 혼자 트램에 올랐다. 중국, 한국의 물건이 어지럽게 섞인 시장에 가서 조잡한 캥거루 인형을 샀다. 부메랑이며 호주 국기며 오만 것을 들고 있는 캥거루 인형 (심지어 주머니엔 아기도 있었다) 이었다. 다시 시내에 돌아가 옷 구경을 했다. 절대 입을 것 같지 않은 옷을 골라 피팅룸에 들어갔다. 옷은 잘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모양이 예뻐서 그냥 하나 샀다. 구글맵의 ‘붐비는 곳’을 아무 곳이나 찍고 돌아다니다가 맛있는 냄새에 홀려 양꼬치 하나를 사 먹었다. 맛있어서 아빠가 생각났다.
생각해 보면 생경한 일이었다. 일 년 전, 홍콩 거리에서 잔뜩 긴장한 채로 돌아다니던 세 시간이 몸 한 켠에 있었다. 아빠가 알아 온 곳으로 가고, 아빠가 예약한 숙소에서 자고, 아빠가 끊은 기차표를 들고 줄을 서 있던 나는 까마득히 작아진 채로 기억 어느 한 켠에 희미하게 자리 잡은 듯했다. 그 긴장 덩어리는 어디로 가고 이제는 아빠랑 같이 다니기 싫어서 우는 내가 호주에 있다. 나의 아빠 태균이 들으면 서운할 이야기지만, 그런 내가 좋았고 대견했다.
우리는 다시 만나, ‘내가 알아본’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앞으로 만날 시간에서 어떤 나는 작아지고 어떤 나는 커질까. 지금은 내 몸 전체를 차지하는 어떤 내가 어느 순간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겠지. 내가 사랑하는 나의 부분이 희미해지기도, 외면하고픈 어떤 부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지기도 하겠지. 어떤 시간을 통과하든 간에, 대견한 나를 또 만나고 싶어질 테다. 그리고 이 순간의 내가 아주 그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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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가 굴러서 ‘구르님’. 김지우보다 익숙해진 이름으로 유튜브, 인스타그램에서 활동한다. ‘구르는’ 삶에 대해 할 말이 많아서 영상을 만들고 글을 쓴다. 쓴 책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 『오늘도 구르는 중』, 『우리의 목소리를 공부하라』(공저)가 있다. 장애의 과거와 미래보다,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이야기하고 싶다. 최근에는 홀로 여행하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계획을 세우는 데 소질이 없는 탓에 다음에는 어디로 구를지 알 수 없지만, 멀리 굴러갈 의지와 바퀴만은 탄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