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담의 추천사] 걷기란 무엇인가
안담의 추천사 12화 - <용주골 투쟁 기획 토론회> 후기
약한 것을 미워하기란 허탈할 정도로 쉽다. 심지어 약자에게도 그게 더 쉽다. (2024.07.03)
누군가에게 걷기란 운동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가볍고 평화로운 활동이겠지만, 어떤 걷기는 그 땅에 사는 주민들을 모욕하고 탄압하는 유독한 폭력이 된다. 파주시 파주읍 연풍리 대추벌, 속칭 ‘용주골’로 불리는 성매매 집결지에서는 매주 화요일 파주시의 주도로 ‘여행길’이라는 시민참여 걷기 대회가 열렸다. 파주시청은 도시 정화, 성매매 근절, 여성 인권 상승 등의 명목을 내걸어 용주골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을 쫓아내고 집결지를 강제 폐쇄하려고 한다. 이 계획에 동참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용주골을 행진한다. ‘여성인권지킴이’라고 적힌 노란 조끼를 입고,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보라색 풍선을 든 그들은 골목골목을 걸으며 성매매 종사자들을 구경한다. 여기서 ‘여행길’은 ‘여성과 시민이 행복한 길’의 준말이다. 너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고 윽박지르는 사람들을 향해, 용주골 종사자 여성들은 무릎을 꿇고 말한다. 우리도 여성이고 시민이라고. 내 삶을 내가 결정하게 해달라고. 그러기 위해 우리와 대화하자고. 여성인권지킴이와 용주골 여성들이 마주치는 순간, 신기하게도 여행길 참여자들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빙 돌아서 걷는다. 더 철저하게 듣지 않기 위해서, 보지 않기 위해서 내딛는 걸음. 힘과 대의를 과시하며 으스대는 걸음. 이것은 압제자의 걸음이고 정복자의 걸음이다.
이 비열한 행사에도 ‘롤모델’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지난 6월 29일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이하 ‘차차’)가 주최한 <용주골 투쟁 기획 토론회>에서 알게 되었다. 이날 토론회는 용주골 여종사자 모임 자작나무회의 대표 별이, 차차 활동가 여름, 차차 활동가 유원의 발표와 질의응답으로 꾸려졌다. 차차 활동가 유원에 따르면, 시민들과 성매매 집결지를 걷자는 아이디어는 전주시가 문화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선미촌’을 폐쇄하는 과정에서도 등장한 바 있다. 선미촌에는 새 이름이 붙었고, 그것이 바로 ‘여행길(여성이 행복한 길)’이었다. 미술관이, 서점이, 아트월과 업사이클링 센터가 선미촌에 들어섰다. 민관의 탄탄한 협력 아래 선미촌을 ‘서노송예술촌’으로 재탄생시킨 전주시의 사례는 21년 도시재생 사례공유 발표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을 정도로 성공적인 모델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성매매 퇴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전주시가 바로 지원을 끊은 이후 선미촌은 “도심 속 폐허”1 가 되었다. 이제 여행길에는, 아니 선미촌에는 여행객이 없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삶을 일구던 선주민 여성들이 없다. 그럼에도 선미촌은 파주시의 롤모델이 되기에는 충분한 것일까. 이곳에 있는 성매매 종사자들을 이곳이 아닌 곳으로 떠나게 할 수만 있다면. 선미촌을 떠난 어떤 이는 지금 용주골에 있다. 그가 용주골에서마저 떠나게 해도 되는 것일까.
이날 토론회는 이처럼 깊은 고민을 안기는 지적인 자리였을 뿐만 아니라, 지난 2년간의 용주골 투쟁을 돌아보며 투지와 연대감을 북돋는 따뜻한 자리이기도 했다. 별이와 여름 활동가는 그들의 첫 만남부터 현재까지 일어난 주요 사건을 숨차게 읊었다. 23년 1월에 파주시는 본격적으로 용주골 폐쇄 절차에 돌입했고, 자작나무회와 차차는 이에 저항했다. 1인 시위를 하고, 종사자들을 감시하기 위한 CCTV 설치를 막아내고, 집결지를 노출해 민원에 시달리게 하려는 의도로 추진된 펜스 철거를 저지하고, 여행길 참여자들에게 항의하고, 후원 파티를 열고, 몇 차례의 행정대집행에 맞서 스크럼을 짜고, 언제 급습할지 모를 경찰과 용역에 대비해 시민들과 상주할 농성장을 마련하고, 강제 철거 현장을 기록하여 알렸다. 자작나무회와 차차가 파주시청에 일관되게 요구한 것은 한 가지다. 하루아침에 집과 직장을 잃을 위기에 처한 당사자들과의 면담 한번 없이 졸속으로 수립한 조례지원과 별개로 제대로 된 이주보상대책을 같이 논의하자. 이 단순한 요청을 전달하려는 과정에서 종사자들과 차차 활동가들은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여러 번 고소당했다. 더 이상의 고소 및 고발을 감수하기 힘든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건 시민들이다. 별이 활동가는 공무원과 경찰이 종사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지만 시민들의 눈은 두려워한다며 시민들의 연대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강조했다. 용주골 투쟁은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싸움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효능감을 느끼기 어려운 싸움 등으로 일축하기엔 차차와 자작나무회, 그리고 연대자들이 해낸 일의 목록이 너무 길다.
별이 활동가가 차차와 함께 해서 좋았던 일을 꼽다가 드디어 퀴어가 뭔지 알게 됐다고 말하자 청중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던 순간이 떠오른다. 용주골에는 다양한 배경을 지닌 연대자들이 모인다. 그런 만큼 차차는 모두의 신념과 정체성을 존중할 수 있는 투쟁의 언어를 고안해 왔다. 활동가들과 연대자들이 식사하는 사랑방에서는 주방 이모님들이 연구한 비건 반찬을 먹을 수 있다. 국가권력을 대리하는 무표정의 사람들과 대치하다가 격앙된 마음으로 내뱉은 말이 혹여나 옆 사람을 슬프게 하고 약자를 공격하는 말은 아닌지 성찰하는 신중함이 이 긴박한 현장에 있다. 약한 것을 미워하기란 허탈할 정도로 쉽다. 심지어 약자에게도 그게 더 쉽다. 자원과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약자들끼리 미워하게 할 방도를 구하려 들 것이다. 용주골은 여성 사이의 분열, 동물 사이의 분열, 가난한 자들 사이의 분열을 유도하여 이 불평등의 진짜 원인을 은폐하려는 교묘한 통치술에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지를 볼 수 있는 작은 거점이기도 하다.
물론 자작나무회와 차차가 처음부터 그런 이간질에 면역이 있었던 건 아닐 테다. 처음 용주골을 찾아갔을 때 차차의 활동가들은 여성단체를 향한 종사자들의 반감을 마주했다고 한다. 여성단체는 성노동자를 구원이 필요한 피해자나 여성 인권을 추락시키는 주범으로만 여기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답해야 했던 것이다. 별이 활동가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유 없이 우리를 돕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사회자가 마지막으로 패널들의 꿈과 소망을 물었을 때, 별이 활동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선은 용주골을 지키고, 다음에 차차가 다른 투쟁에 나설 때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함께 하고 싶다고. 놀라운 장면이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한이 된다. 이 싸움의 피로가 가시기도 전인데, 다른 이의 존엄을 위해 싸우고 싶다니. 타인과 연대하는 현장이 나의 소망이라고 말하면서 그토록 어여쁜 홍조를 띄울 수 있는 사람의 강하고도 깊은 마음을 나는 다 헤아리지 못한다. 그날 토론회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용주골 여성들이 자신의 일터와 삶터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내릴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유언비어를 한 마디도 믿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 별이 씨처럼 강직한 이의 도움을 받고 싶다. 그의 말을 명함처럼 소중히 간직했다가, 남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산다는 이유로 주권을 박탈당할 위기가 닥쳤을 때 그걸 꺼내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용주골에 가야 한다. 용주골의 사람들을 노동자로도, 선주민으로도, 여성으로도, 시민으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파주시의 발목을 붙들어야 한다. 그곳에서 용주골을 걷는 사람들에게 말해야 한다. 용주골을 걸을 거라면 용주골과 함께 걸어야만 한다고 말해야 한다.
1 “성매매 집결지 없앤다더니 이제는 나몰라라···전주 서노송예술촌 가보니”, 경향신문, 2024년 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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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났다. 봉고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다가 강원도 평창에서 긴 시간 자랐다. 미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에는 예술의 언저리에서만 서성였다. 2021년부터 ‘무늬글방’을 열어 쓰고 읽고 말하는 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2023년에 활동가들을 초대해 식탁에서 나눈 대화를 담은 첫 책 《엄살원》을 함께 썼다. 가끔 연극을 한다. 우스운 것은 무대에서, 슬픈 것은 글에서 다룬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대개 슬프다고 생각한다. 정상성의 틈새, 제도의 사각지대로 숨어드는 섹슈얼리티 이야기에 이끌린다. 존재보다는 존재 아닌 것들의, 주체보다는 비체의, 말보다는 소리를 내는 것들의 연대를 독학하는 데 시간을 쓴다. 주력 상품은 우정과 관점. 얼룩개 무늬와 함께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