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숙의 노상비평] 여성용 이모티콘
웃는 얼굴은 일종의 안전 장치다
우리가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인터넷 상에서의 낯선 만남들 사이를 부드럽게 완충해 주는 쿠션 같은 :)는, 그 자체로는 아무 정보 값을 가지지 않지만 그러한 만남들을 ‘견디는’ 데에 도움을 준다. (2024.06.28)
이연숙(리타) 평론가가 길에서 만난, 우리가 선택할 수 없지만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격주 금요일 연재. |
요즘 내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이모티콘은 :)이다. 스마일리 페이스, 옛 인터넷의 향수가 느껴지는 ‘전통적인’ 이모티콘이다. 물론 보통 :)를 입력하는 순간에 나는 전혀 미소 짓지 않는다. 외교적인 차원에서 덧붙이건대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순간에 전혀 기쁘지 않은데도 기쁜 ‘척’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왜 :)를 구태여 “감사합니다” 뒤에 마치 온점처럼 덧붙이는 걸까? 그 이유는, 내 메일의 수신자인 당신에게 나는 :)를 보낼 만큼 충분한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 호감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라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동시에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합의된 방식으로, 딱 쉬프트 키를 누르는 정도의 수고만 들여서 당신에게 내 호감을 표시하고 싶어요, 어차피 그 이상으로 표현하면 나는 비굴해 보이고, 당신은 거북스러운 기분이 들 테니까요 :)”
물론 나는 :)가 때로 비웃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인지하고 있다. 요컨대 누군가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가 그렇다. “죄송하지만, 이것 좀 해주시겠어요?” 다음에 붙는 :)에는 은은한 수동 공격의 풍미가 있다.1 맥락에 따라 :)는, 여전히 사회적이지만 반드시 우호적이지는 않은 셈이다. 예컨대 인터넷상에서 일어나는 키보드 배틀이나 사이버 불링의 현장에서 우리는 한껏 논리적인척 하지만 실상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린 뒤에 :)와 같은 예의 바른 이모티콘을 덧붙이는 사람들을 종종 마주친다. 이런 사람들이 :)를 통해 발생시키고자 하는 효과는 명백하다. 침착한, 교양 있는, ‘악의’ 없는 사람으로 보임으로써 상대를 교육이 필요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게끔 만들고자 하는 의도 혹은 의지 역시 노골적으로 보인다는 점이 재밌지만.
비록 오용(?)되고는 있지만, 나는 :)를 수동 공격으로 전유하는 기술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왜냐하면 :)와 같은 이모티콘은 기본적으로 매우 여성화된 인터넷상의 ‘인프라’이기 때문이다. 교통수단이나 행정 기관처럼, 호감이라는 정동 자본을 매개하고 유통하고 제공하는 인프라로서의 스마일리 페이스들.2 우리가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인터넷 상에서의 낯선 만남들 사이를 부드럽게 완충해 주는 쿠션 같은 :)는, 그 자체로는 아무 정보 값을 가지지 않지만 그러한 만남들을 ‘견디는’ 데에 도움을 준다.3 아무리 거슬리고, 불편하고, 짜증 나는 만남일지라도 :)는 그러한 만남들을 해석 가능한 범주로, 인터넷 ‘문화’의 일부로 위치시켜 준다. 말하자면 “그 사람, 이런 상황에서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어. 말이 돼?”와 같은 식으로 말이다. 이건 정확히 여성화된 노동인 서비스직에게 현실의 스마일리 페이스, 즉 ‘웃는 얼굴’이 요구되는 까닭과 같다. 서비스직 노동자들에게‘만’ 외주화되는 책임으로서 웃는 얼굴은, 손님으로 하여금 안전하고, 환영받고, 심지어 ‘대접’받는 느낌을 가지게 하기 위해 고안된 일종의 안전 장치다. 웃는 얼굴은 서비스직 노동자가 돈을 벌기 위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객체화시켜야만 했던 개인성의 일부이기도 하다. 때때로(아니, 빈번히) 가학적인 손님들은 그들이 어디까지 웃는 얼굴을 유지할 수 있는지 실험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군다. 마치 ‘쿠션’의 내구성을 시험해 보듯 말이다. :)와 마찬가지로, 실은 그 웃는 얼굴이 얼마나 무한한 인내심과 그에 상응하는 무한한 공격력으로 완고히 응축되어 있는지를 알아차리게 될 때까지, 그들은 그렇게 할 것이다.
물론 내가 :)를 쓸 때마다 그것이 온라인상의 불안정한 만남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긴장들을 안정화하거나, 혹은 그것들을 오히려 표면화한다는 사실을 일일히 상기하는 건 아니다(그랬다면, 사는 게 꽤나 피곤했을 거다). 하지만 :)가 특히 여성화된 이모티콘이라는 사실, 그러므로 서비스직 노동자들의 웃는 얼굴과 마찬가지로 모종의 수동 공격성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날 매우 즐겁게 만든다. ‘무표정’이 일종의 전략이 되어야 할 만큼4 웃는 얼굴은 페미니스트에게 저항해야 할 압제의 흔적이지만, 동시에 그런 흔적을 가볍게 낭비하고 전유할 수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최근 내가 자주 사용하는 이모티콘은 ㅇㅅㅇ이다. 내 기억으로 200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하게 유행하기 시작한 이 이모티콘은 소위 ‘귀척(귀여운 척)’의 기호였다. ㅇㅅㅇ의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아니 생각이 있기나 한건지 알 수 없는 텅 빈 눈동자와 요즘 말로 ‘킹(열)’ 받게 하는 꾹 다문 입은 한없이 수동적이고 동물적인, ‘소녀’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한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고 말하는 듯한 무심함과 무감동함이 ㅇㅅㅇ에는 있다. 물론 무해한 ‘귀척’ 뒤에 숨겨진 이런 서늘함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ㅇㅅㅇ가 주는 ‘오글거림’ 역시 꼭꼭 씹어 먹어야 하겠지만.
1 :)와 수동 공격성에 대한 아이디어는 다음의 글에서 가져왔다. 멜리사 그레그, 「금요일 밤의 회식: 칸막이 사무실 시대의 직장에서의 정동」, 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시그워스 편저, 최성희, 김지영, 박혜정 옮김, 『정동 이론』, 갈무리, 2015, 395-424p.
2 이 부분은 『모빌리티 인프라스트럭처와 생활세계』(김수철, 이희은, 김영욱, 정은혜, 고민경, 백일순, 파라 셰이크, 이병하, 이용균 지음, 앨피, 2022, 전자책 열람)의 머리말에서 그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아래 해당 내용을 발췌한다. 편의상 본문에 있는 영문은 모두 생략했다.
“최근 인프라스트럭처에 대한 높은 관심과 그에 따른 연구들은 물질적 시스템이나 구조를 넘어선 인프라스트럭처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서 미국의 문화비평 학자인 로런 벌랜트에 따르면 인프라스트럭처는 단지 일반적인 의미의 시스템이나 구조와는 동일시될 수 없으며 이보다는 “사회적 형식들의 움직임과 패턴”이라고 정의된다. 다시 말해서 인프라스트럭처란 우리의 삶을 조직화하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매개 과정’이라는 말이다. 이는 단지 도로, 다리와 같은 어떤 제도와 규범들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이 벌랜트가 인프라스트럭처를 “하나의 세계를 지속가능하게 해주는 관계들을 서로 가깝게 연결시켜 주는 모든 시스템들”이라고 칭하는 이유다.”3 이모티콘(특히, 스마일리 페이스)이 정동 노동의 일종이라는 관점은 다음의 글을 참조했다. 요약에서 일부를 발췌했다.
“우리는 이모티콘이 인간의 잠재성으로서의 정동, 그리고 자본이 일상의 생명 정치를 관리함으로써 지속적으로 활용하려는 생산적인 힘으로서의 정동 사이의 긴장을 구현하고, 재현한다고 주장한다. 이모티콘은 정동 노동의 창조적인 힘과, 시장 논리에 종속된 디지털 영역에서의 한계 사이의 경합을 보여주는 사례다.”
Stark, L., & Crawford, K. (2015). “The Conservatism of Emoji: Work, Affect, and Communication”. Social Media Society, 1(2). //doi.org/10.1177/20563051156048534 김예솔비, “굳은 심장으로 걸어갈 것이다: 여성적 분노의 역능에 대하여”, 웹진 세미나(8), //www.zineseminar.com/wp/issue08/kimyesol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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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와 시각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 소수(자)적인 것들의 존재 양식에 관심 있다. 기획/출판 콜렉티브 ‘아그라파 소사이어티’의 일원으로서 웹진 ‘세미나’를 발간했다. 프로젝트 ‘OFF’라는 이름으로 페미니즘 강연과 비평을 공동 기획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hotleve 를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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