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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우 칼럼] 남자 둘과 동거합니다

김지우의 굴러서 세계 속으로 - 6화 호주에서 만난 사람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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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서로를 얼싸안고 끙끙대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또 입에 붙어버린 사과를 했다. B는 웃으면서 “네가 원하는 만큼 나를 괴롭혀도 돼.”라고 농담을 건넸다. 그 말이 엄청 좋았다. (2024.06.28)


휠체어를 타고 세상을 누비는 구르님 김지우의 여행기.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나는 망했다! 열두 번째 브리즈번 숙소로부터 예약 거절 답장을 받았을 때 든 생각이었다. 한국에서 친구들이 놀러 올 수도 있다는 말에 숙소 예약을 차일피일 미뤘는데, 브리즈번으로 떠나기 일주일이 남았을 때 그 계획이 엎어졌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급히 집을 구해야 했다. 그러나 괜찮아 보이는 곳은 이미 예약된 후였고, 호텔을 가자니 1박에 20만 원이 넘어가 큰 부담이었다. 결국 선택한 것이 자신의 집을 빌려주는 숙소 대여 플랫폼이었는데, 전원주택이 대부분이라 입구에서부터 계단이 있는 곳이 많았다. 입구 사진은 괜찮아 보여서 예약 문의를 하면, 다락방이나 2층 방을 빌려주는 경우가 잦아 ‘미안하지만 이 집은 어려울 것 같다’라는 회신만 돌아왔다.

한 달 동안 호주의 햇살을 만끽하며 초-긍정 걸이 되었던 나지만, 멜버른의 화창한 햇살도 열 번이 넘는 거절 메시지가 주는 무력감을 지워내지는 못했다. 호주에 못 온다고 미리 확정해 주지 않은 친구에게 괜히 심술이 나서 대판 싸웠다. (이후 눈물을 흘리며 화해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이 모든 거절이 최고의 친구를 소개해 주었다는 것을. 내게는 호주를 떠올리면 함께 그려지는 사람들이 있다. 2주간 나의 가족이 되어준 B와 T, 그들이 브리즈번에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나는 왠지 든든해진다.

 

또 다른 가족, B와 T

처음 숙소를 알아볼 때는 B와 T의 숙소를 고려하지 않았다. 가정집의 방 한 칸과 화장실만을 내주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한집에 살아본 적은 없어서 고민이 됐다. 하지만 연이어 거절의 메시지를 받고 나니, 일단 들어가 잠만 잘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을 바꿨다. 혹시 숙소에서 넘어지거나 미끄러져 다칠 것-이것은 나의 가장 큰 현실적 공포다-을 생각했을 때 오히려 누군가가 함께 있는 것이 더 안전할 것도 같았다. 정성과 사랑이 가득 담긴 5점짜리 리뷰만이 가득했다는 것도 선택의 이유가 되었다. ‘사랑스럽고’ ‘존중이 가득하며’ ‘꼭 다시 만나고 싶은’ 호스트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숙소 설명에는 호스트가 게이 커플이라는 소개가 있었다. 다시 말해 나는 남자 둘과 동거하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걱정 대장인 우리 엄마, 현미 씨에게는 체크인 날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관계를 밝히며, 이 숙소는 ‘LGBTQI friendly(친화적)’ 하다고 소개하고 있었다. 그 말이 왜인지 장애를 가진 나에게도 안전하게 느껴졌다.

멜버른을 떠나 브리즈번에 도착했을 때는 가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가는 것이 제일 걱정이었는데, 공항에서 시내까지 들어가는 기차에서는 역에서 티켓을 팔던 직원이 짐을 옮겨주었고, 기차에서 내려 역 밖으로 나오는 것도 미리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동행해 주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공항에서 산 초콜릿 한 봉지를 들고 B와 T의 집 문을 두드렸다. 엄청나게 떨렸다.

“어서 와! 뭔가 사 오지 않아도 되는데, 고마워!”, 그들은 거실에서 드라마를 보고 있다가, 한달음에 나와 나를 반겨주었다. B의 인사말이 “뭘 이런 걸 다 사와.” 같은 구수한 한국말처럼 들렸다. B와 T가 신발을 벗고 있어서 놀랐다. 휠체어를 타고 사는 내게는 오히려 함께 쓰는 사람들이 신발을 신고 다니는 문화가 더 적합하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신발을 신지 않냐며, 얼른 바퀴를 닦겠다는 내 말에 종종 집 안에서 신발을 신기도 한다며, 전혀 그럴 필요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짧은 인사 후 안쪽에 위치한 내 방으로 가는데 이번에는 거실의 카펫에 휠체어 바퀴가 걸려버렸다. 장애를 가지고 살면 참 곤란하고 민망한 순간이 많이 생긴다··· 반사적으로 사과하는 내게, “밟아도 돼. 미안해할 필요 없어.” 하며 T는 카펫을 반으로 접어주었다. 내가 사는 2주 동안 카펫은 접힌 상태로 있었다.


기억에 남는 순간들

B와 T의 집에 참으로 많은 기억을 남겨두고 왔다. 집안에서 와장창 넘어진 날이 그렇다. 내가 가진 뇌성마비는 긴장하면 몸이 뻣뻣이 굳는 특성이 있다. 냉장고 위쪽 선반의 음식을 꺼내다가 B의 시선을 느끼고 긴장해서 그대로 넘어지는 일이 있었다. 체크인 바로 다음 날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천천히 넘어가면서… 몸이 불편한 여자애를 게스트로 들여서 괜한 일이 생긴다고 B가 생각하면 어쩌나, 빨리 나가달라고 하면 어쩌나 하는 수십 가지의 고민을 찰나에 떠올렸다. 부정적인 생각이 떨어지는 몸을 휘감는 중에··· B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택근무를 하던 B가 달려와 “괜찮아? 어떻게 일으켜줘야 할까?” 물었기 때문이다. 나는 뒤에서 내 허리를 잡고 들어줄 수 있냐고 물었다.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서로를 얼싸안고 끙끙대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또 입에 붙어버린 사과를 했다. B는 웃으면서 “네가 원하는 만큼 나를 괴롭혀도 돼.”라고 농담을 건넸다. 그 말이 엄청 좋았다.

또, 냉장고 맨 아래 텅 빈 칸이 떠오른다. 맨 위쪽 선반에서 음식을 꺼내다 넘어진 이후, 그 안 B와 T의 음식 재료들은 한 칸, 혹은 두 칸 위로 올라갔다. B가 자신의 식료품들을 모두 올려두고, 제일 밑 칸을 비워둔 것이다. 그리고 또, 여전히 접혀 있던 카펫과 내 물건이 가득한 방 서랍이 떠오르고, 세 명 모두 머리에 새집을 짓고 각자의 일을 하던 주말 아침이 떠오른다. B와 T가 데이트를 하고 돌아와 건네주던 작은 캥거루 인형이 떠오르고, 늘 계획 없이 돌아다니는 나에게 하루 일정을 추천해 주던 B의 몸짓이 떠오른다. 나는 그에게 ‘Benivisor’ (B의 이름과 여행 추천 사이트의 이름을 합친 것)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길게 여행한다는 건 내 흔적을 그 시간에 새기고 오는 것이었다. 휠체어로 화장실 턱을 오르다 생긴 작은 흠집,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부스스한 채로 건네던 아침 인사, B의 업무용 책상에서 원고를 쓰던 시간이 여전히 그곳에 있다. 익숙한 것들을 남기고 오기도 했다. 구글 지도를 보지 않고도 갈 수 있던 시내의 도서관, 서로 알아보고 가볍게 인사했던 카페의 바리스타, 지금도 외울 수 있는 동네의 이름과 버스정류장 이름이 거기에 여전히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녁엔 함께 드라마를 보고 와인 한 병을 나눠 마시던, 헤어지는 날엔 진한 포옹을 해주던 B와 T가 거기 있다. 남겨진 익숙함을 떠올리면, 한달음에 그곳으로 다시 가서 충분한 만큼 알은체를 하고 싶다. 수십 번의 거절을 당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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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우(구르님)

휠체어가 굴러서 ‘구르님’. 김지우보다 익숙해진 이름으로 유튜브, 인스타그램에서 활동한다. ‘구르는’ 삶에 대해 할 말이 많아서 영상을 만들고 글을 쓴다. 쓴 책으로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 『오늘도 구르는 중』, 『우리의 목소리를 공부하라』(공저)가 있다. 장애의 과거와 미래보다,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이야기하고 싶다. 최근에는 홀로 여행하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계획을 세우는 데 소질이 없는 탓에 다음에는 어디로 구를지 알 수 없지만, 멀리 굴러갈 의지와 바퀴만은 탄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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