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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절박한 사람은 문장을 붙들게 되어 있어요”

『당근밭 걷기』출간 서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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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여기, 이러한 모양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반드시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납득할 수 없고 이해되지 않는 일일지라도, 그저 땅에 심긴 당근처럼 들여다보려고 해요.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해도 거기 있음을 바라보기.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지난 시집 ‘시인의 말’에서 안희연은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고 말했다. 이번 시집에 이어진 “담대한 척 고백해놓고/ 조금은 슬펐”다는 혼잣말, “단박에 알아”본, “너”라는 존재는 그러므로 더 귀하다. “백지 앞에서 마음이 한없이 캄캄해질 때/ 너는 등뒤에 집채만한 나무 그림자를 매달고 나타나/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첫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와 이어진 두 권의 시집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을 통해 “한 손에는 미학, 한 손에는 깊이를 포획”(시인 이원)하고자 한다는 평을 들은 안희연. 그의 이번 시집은 ‘여름 언덕’에서 내려와 ‘당근밭’을 걸으며 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삶의 신비와 여분의 희망을 건져올리려 애쓴 지난 4년을 담고 있다. 


4년 만의 신작 시집입니다. 시들을 정리하며 어떤 생각을 많이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이전 시집인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 예상치 못한 큰 사랑을 받아 감사하고 기쁜 한편, 마음의 부침이 심한 날들이기도 했어요. 시집을 기다려주신 분들을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심리적 부담이 상당했거든요. 그래서 나름으로는 고군분투하는 4년을 보냈는데, 돌이켜 보면 머리가 개입할 새도 없이 가슴에서 시가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 년, 일 년을 흘려보내며 차마 구하지 못한 것들이 상상도 못할 만큼 많아졌고, 멍든 부위가 몸 전체로 넓어졌어요. 시를 붙들지 않았더라면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텼을까 싶습니다. 제가 유독 아끼는 단어 중에 ‘여진’과 ‘잔상’이라는 단어가 있는데요. 제게 이번 시집은 ‘잔상과 여진의 기록’으로도 요약될 것 같습니다. 이미 끝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의 끝나지 않음,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실금들을 끝까지 들여다보려는 마음에서 출발한 시가 많네요. “모르고 물을 따라 마셨는데 목이 따끔”해서 살펴보니 “유리컵에 실금이 가”(「물색」) 있었음을 무심코 발견하는 순간 같은. 


제목인 ‘당근밭 걷기’가 인상적입니다. 이 제목을 고른 이유와, 이 제목이 어떻게 읽히기를 바라시는지 궁금합니다.

‘당근밭 걷기’라는 제목에는 두 가지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당근밭’이고, 다른 하나는 ‘걷기’지요. 왜 하필 당근이냐는 물음에는, 꼭 당근이 아니어도 된다는 답변을 드린 적 있습니다. 저는 한없이 무른 사람이라 늘 단단해지고 싶은 열망을 품고 있어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에 등장하는 호두, 이번 시집의 당근 같은 열매들은 모두 제가 꿈꾸는 단단함을 이미 가진 존재들이에요. 만일 당신이 지향하는 바가 그와 차이가 있다면, 그것에 준하는 열매의 이름을 당근의 자리에 넣어 당신 것으로 만드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더불어 ‘걷기’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행위인데요. 걷기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에 관해서라면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현대문학, 2002) 같은 좋은 책이 이미 발간되어 있으니 긴 설명은 생략할게요. 다만 제가 생각하는 걷기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이행’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를 일으켜 걸을 때, 육체뿐 아니라 정신도 함께 나아가는 것이지요. 이행은 변화, 다른 상태로의 옮겨감, 거행이자 실천. 그러니 실은 존재를 걸고 행해야 하는 과업인 셈이에요. 이번 시집을 통해 그런 이행으로서의 걷기를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싶었고요.


식물의 이름이 눈에 띄는 2부와 죽음에 대한 시가 마음에 남는 3부, 그 앞뒤에 삶과 세상에 대한 질문과 다짐을 심어둔 1, 4부의 시들. 시집 구성이 하나의 물줄기로 흐르는 느낌입니다. 부를 나눌 때 특별히 신경쓴 부분이 있을까요?

시의 배치를 정말 많이 신경 썼어요. 아무 페이지나 마음껏 펼쳐 읽어달라고 청하는 방식도 매력적이지만 저로서는, 이왕이면 제가 배치해놓은 흐름을 따라 읽어주시는 방향을 바라게 돼요. 시를 배치하며 마음의 안쪽(‘소등 구간’이자 ‘썰물’의 시간)으로 서서히 진입해 들어갔다가 다시 마음의 바깥이자 삶의 한복판(‘점등 구간’이자 ‘밀물’의 시간)으로 되돌아오는 구조를 생각했습니다. 지난 시집도 그렇고, 저는 항상 책을 묶을 때 의미의 논리보다는 심리적 연결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어요.


지난 시집 ‘시인의 말’에서 “나는 평생 이런 노래밖에는 부르지 못할 것이고, 이제 나는 그것이 조금도 슬프지 않다”고 하셨죠. 이번 시집에 이어진 “담대한 척 고백해놓고/ 조금은 슬펐”다는 시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걸고 쓰느라 부서진 마음 알아봐주는/ 단 한 사람”(「긍휼의 뜻」)을 향한 시인의 마음이 와닿기도 했고요. 세 번째 시집과 네 번째 시집 사이의 변화와 ‘단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앞서 제가 구하지 못해 멍든 부위가 몸 전체로 넓어졌다는 말씀을 드렸었지요. 그 말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고, 저는 지금 누군가의 죽음이 더 이상 관념이 아닌 시간을 겪고 있습니다. 죽음이 삶을 압도하려 들 때가 어느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고, 그때만큼 중력의 힘이 중요해지는 때도 없을 거예요. 그 중력을 어떻게 생생하게 느끼게 만들까, 세상을 버리려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시 중력의 영향력 아래로 끌어다 놓을 수 있을까의 문제가 세 번째와 네 번째 시집을 잇는 제 삶의 절박한 화두였습니다. 적어도 지금 제가 찾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내가 볼 때/너도 보았겠지”(「자귀」)라고 대화할 수 있는 존재를 발견하는 일이었어요. 서로의 목격자가 되어주는 ‘단 한 사람’은 누구에게나 반드시 존재한다는 믿음이요.

더불어 질문에서 짚어주신 시 「긍휼의 뜻」은 사실에 기반해 쓰인 시이기도 해요. 시에 등장하는,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두 사람은 저와 장편소설 『단 한 사람』(한겨레출판사, 2023)을 펴낸 최진영 작가랍니다. ‘또’ 우산을 샀다는 최진영 작가의 말이 제 안에 커다란 동심원을 일으켰던 날이 있어요. 비가 오다 그친 어느 늦은 저녁, 시를 완성하고 난 뒤, 최진영 작가에게 이메일을 보내 가장 먼저 시를 보여주던 순간이 떠오르네요. 여진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던지 며칠을 그 시에 잠겨 있었어요. 어쩌면 저는 그런 순간들로 인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사이 산문집으로도 독자분들과 소통하셨는데요, 산문 쓰기와 시 쓰기에 대해서도 여쭙고 싶습니다.

연달아 두 권의 산문집을 펴내다 오랜만에 시집을 내니, 여기가 고향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산문 작업이 덜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언제나 저의 출발지이자 도착지는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산문은 저의 일상을 재료이자 연료 삼는 ‘극장’ 같고, 시는 일상으로부터 조금은 외떨어진 시공간으로 독자들을 태워 데려가는 ‘열차’ 혹은 ‘신발’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산문이나 시 작업이 별개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결국 제 안에서 길어져 나온 것들이고, 서로 충돌하거나 삼투하면서 끝내 저를 이룰 테니까요.


삶과 세상이 가혹하다 느껴질 때 안희연 시인께서는 어떻게 받아들이려 노력하는지 궁금해요.

내가 지금 여기, 이러한 모양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반드시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납득할 수 없고 이해되지 않는 일일지라도, 그저 땅에 심긴 당근처럼 들여다보려고 해요.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해도 거기 있음을 바라보기.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이 시집을 읽을 독자들께 인사 한 말씀 부탁드려요.

절박한 사람은 문장을 붙들게 되어 있어요. 저는 그렇게 당신에게 붙들리는 문장이, 장작처럼 태워져 당신을 데우는 문장이 되고 싶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의 얼굴을 상상하면,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아요. 당신의 당근밭은 어떤 규모, 어떤 모양일까요? 언젠가 우리 만나는 날 들려주세요.


*안희연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과 산문집 『흩어지는 마음에게, 안녕』, 『당신은 나를 열어 바닥까지 휘젓고』  『단어의 집』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등을 썼다.


당근밭 걷기
당근밭 걷기
안희연 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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