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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승 칼럼] 나는 왜 나를 방해하는가? ②

김지승의 끔찍하게 민감한 질문들 3화 – 취약한 언어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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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못하는 이유야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그중 가장 유혹적인 건 쓰지 않으면 형편없음을 들킬 근거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쓸 이유가 수백수천의 쓰지 않을 이유 위로 떠오른다. (2024.06.04)


김지승 작가가 읽고 쓰기 위한 여성의 질문들을 던집니다.
격주 화요일 연재.


unsplash


매일매일 혼자 돌자, 침묵 한 바퀴. 아침 일찍 일어나도 좀체 전해지지 않는 말들의 묘지인 몸 끝에서 끝까지 바람이 분다. 혈관이 오소소 떤다, 전율한다, 말이 태어난다. 멈출 수 없는 죽음이다. 사랑이다. 그 사랑이 먼 곳까지 헤엄쳐 쓸 것이다. 취약함을 무릅쓰고, 죽어도 죽지 않겠다는 약속에 기대, 무의미와 의미 사이의 태반을 핥으면서.


일기를 오래 쓰지 못했다. “핥으면서”로 끝난 마지막 일기 아래 짧은 문장이 그림자처럼 누워 있다. “여성은 오래전부터 침묵, 즉 자신에 대한 인식,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과 자연스럽고 내밀하게 연관돼 있”었다는 뒤라스의 말1 . 그 옆에 쪼그려 앉아 있으면 뭐라도 쓰게 될까, 나는 몸을 구길 수 있을 만큼 구겨 한동안 침묵을 정성껏 품었다. 쓰지 못하는 이유야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얼굴 없는 비난도, 자아 연장 리뷰도, 친구와 지인들의 의도적 무반응도 불시에 고통스런 이유가 된다. 그중 가장 유혹적인 건 쓰지 않으면 형편없음을 들킬 근거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쓸 이유가 수백수천의 쓰지 않을 이유 위로 떠오른다. 이유는 가벼울수록 잘 뜬다. 가령, 친밀한 여성 작가들의 일기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이유. 그 불행한 “쓸 수 없음” 속에서도 ‘나’는 너무 시끄럽다. 

메리 셸리의 경우는 조금 더 어려웠다. 작가로서 또는 여성으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곧 스스로를 파괴할 것이라는 불안이 상당했다. 글쓰기에는 불가피하게 어떤 종류의 표식이나 누락이 수반된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그는 작가 자신을 공개하는 건 파멸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200년 전 그의 두려움은 우리의 혈관에 살아 있다. 교실 뒷자리로부터 전해지는 쪽지 같은 메시지와 함께. “솔직하지 마. 다쳐.”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 메리 셸리의 글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지배하는 구조와 긴밀히 관계한다. 일기는 그 구조가 더 촘촘하다. 간결하고, 자주 침묵한다. 한창 불안정한 시기(잦은 이사와 건강 악화 등)에도 일상적인 사건만을 짧은 목록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가 불안정한 현실에 질서와 정상성을 부여하는 방식이었을지 모른다. 날씨와 읽고 있는 책, 차를 마신 장소에 관한 메모는 지나치게 간결해서 강렬하다.

상실과 고통에 대한 기록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갓 돌이 지난 딸 클라라의 죽음2 은 사실을 진술한 단 한 문장만이 남아 있다. 2주 후에야 그는 조금 더 쓴다. “책을 읽지 않을 때, 나는 항상 같은 지점으로 돌아온다. 내가 엄마였고, 더 이상은 아니라는 것.” 그가 중요한 감정을 거의 쓰지 않기 때문에 어쩌다 선택되어 쓰인 단어들 하나하나가 개별 사건처럼 읽힌다. 그렇다고 그가 일기에서조차 익명인 방식으로 자신을 지키는 걸 최우선으로 하며 만족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일기를 쓰며) 두려움 없이 자기 인식의 횃불을 들고 내 마음의 가장 깊은 동굴로 내려”갈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고 쓴다. 그의 바람은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침묵 속에서 계속 쓰는 이유가 되던 한 시절을 떠올리기 충분하다.

어떤 세계는 “말씀”으로 시작되었으나, 그곳에서 누락된 존재들의 세계는 침묵으로 거듭 창조된다. 메리 셸리는 침묵과 부재에서 말을 낳으며 쓸 이유가 가라앉지 않도록 했다. 『프랑켄슈타인』에서 보이는 시적 폭발은 일기 속 부재와 침묵이 만들어낸 압력으로 가능했을지 모른다. 메리 셸리는 거의 혼자였지만 이후 침묵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 반발, 그것에서 태고적 우주를 낳은 여성 작가들은 그의 손을 뒤늦게 찾아 잡았다. 침묵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달걀이고, 엘렌 식수의 타자이고, 테레사 학경 차의 월식(eclipse)하는 몸이다. 어떤 존재를 관통해 되살아나는 생명력을 지닌 침묵. 거기, 타자와 나의 복합적이고 다중적인 발화의 장소에서 열리는 침묵. 그것은 취약한 언어가 탄생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메리 셸리로부터 100년 후 버지니아 울프가 새로운 사유와 형식의 픽션을 시도할 즈음 그의 일기는 픽션과 동반적인 리듬으로 쓰이며 변화한다. 언어를 소거해 침묵의 압력을 높였던 메리 셸리도 후기 일기에서는 다른 형식, 다른 언어를 시험했던 것처럼 버지니아도 여기에 있으면서 여기에 있지 않은 존재 방식, 의식의 흐름, 장르의 경계 등을 사유하고 시도하는 데 일기를 이용했다. 다른 점이라면 위태롭게 쓰고 때때로 기만적으로 자신을 지키는 방식에 버지니아가 조금 더 능숙했다는 것이다. 내 손을 잡고 있는 다른 손을 상상하며 거대한 부재와 침묵을 향해 가는 일이 여성의 쓰기라면, 버지니아에게는 상상할 수 있는 손들이 메리보다 많았을 테니까. 

“내가 할 말은 오직 너를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편지를 쓸 것이고, 죽지 않겠다는 것, 여전한 모습으로 집에 오겠다는 것, 그게 다야.”3   

시간을 들여 일기를 썼다. 마지막 문장 아래에 이번에는 앤 섹스턴의 글을 적어두었다. 1년 정도 만나지 못하게 된 친구 맥신 쿠민에게 앤 섹스턴이 남긴 쪽지는 짧고 뜨겁다. 내게는 언젠가 쓸 이유가 가볍게 떠오르면 백지 위에서 나란할 타자와의 약속 같기도 하다. 내가 나를 방해할 때, 취약해져서 과도해질 때, 여성이 여성에게 남긴 글은 내가 잡고 있다고 믿고 싶은 그 손이다. 저 먼 여자들을 지금 이곳에 데리고 오는 힘이다. 그러니까, 죽지 말고 손!


1  마르그리트 뒤라스·레오폴디나 팔로타 델라 토레 지음, 장소미 옮김, 『뒤라스의 말』, 마음산책, 2001.

2  샬럿 고든 지음, 이미애 옮김, 『메리와 메리』, 교양인, 2024.

3  매기 도허티 지음, 이주혜 옮김, 『동등한 우리』, 위즈덤하우스, p.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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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승

읽고 쓰고 연결한다. 『100세 수업』, 『아무튼, 연필』, 『짐승일기』, 『술래 바꾸기』 등을 썼다.

  • 뒤라스의 말 <마르그리트 뒤라스>,<레오폴디나 팔로타 델라 토레> 공저/<장소미>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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