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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의 시절 리뷰] 여자를 구하는 여자들

이슬기 칼럼 6화 - 다큐멘터리 <버닝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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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을 일평생 휘감는 그 ‘불안감’, 다른 여자들은 내가 겪었던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은 감각. 그것이 여자들을 경유하는 공통의 감각이며, 여자가 여자를 구하러 나선 이유다. (2024.05.30)


세상의 행간을 읽는 이슬기 기자의 콘텐츠 리뷰.
격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BBC NEWS 코리아 유튜브 캡처


눈물이 났다. “기자님, 저 하라예요”를 듣는 순간. 그가 제발 영상을 유포하지 말아 달라며 한 남성 앞에서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본 순간. F.T 아일랜드 출신 최종훈을 구슬려 ‘경찰총장’이라 불리던 이의 정체를 말하게 하는 순간.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설리의 사진이 나오는 순간. 지난 19일 BBC 코리아가 공개해 다시금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다큐멘터리 <버닝썬>의 장면들이다.

<버닝썬>은, 실은 여성들 이야기다. 다큐의 부제는 ‘K팝 스타들의 비밀 대화방을 폭로한 여성들의 이야기’다. 승리, 정준영, 최종훈 등이 강간과 불법 촬영, 성 상납으로 이룩한 제국인 ‘클럽 버닝썬’이 아닌, 이를 폭로한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거다. 여성 폭로자들을 차치하고라도, 버닝썬 안팎을 이루는 사람들도 여자다. 그들은 여성 팬덤에 힘입어 스타가 되었고, 여성들을 대상으로 강간과 불법 촬영 범죄를 저질렀으며, 재력가들에 여성들을 성 상납하며 자신들의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이들의 민낯이 폭로되자 죄책감을 느끼며 힘들어하는 것도 여성 팬덤의 몫이었다.

이 글에서 승리, 정준영, 최종훈 일당의 행각을 세세히 쓰고 싶지는 않다. 대신 다큐가 집중해서 보여주는, 버닝썬 사건을 파헤친 여성들의 일상 이야기를 하고 싶다. ‘페미X’ 같은 원색적인 욕설과 함께 직간접적 위협을 동반한 백래시는 그들의 안온한 일상을 파괴했다. 특히, 이러한 공격은 여성들의 재생산을 위협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정준영의 불법 촬영 피소 소식을 단독 보도했던 박효실 스포츠서울 기자는 이후 두 번의 유산을 겪은 끝에 현재 아이가 없다. 박 기자에 이어 ‘승리 카톡방’을 보도했던 강경윤 SBS 기자는 당시 임신 중이었는데, 그때를 “결혼 5년 만에 겨우 찾아온 아기였기에 혹시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지 너무 두려웠다”고 회상했다. 고모 손에서 자라 누구보다도 고모가 되기를 소원했을 구하라는 조카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다큐 말미에 나오는, 강 기자가 어머니, 딸과 함께 놀이터에서 노는 그 흔한 장면은 여자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지켜온 삶의 한 단면이다.

서울대 동문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을 다룬 전자책 『나 잡으려고 텔레그램 가입했어?』 또한 성폭력 범죄자를 쫓는 여성들의 추적기이자 연대기다. 피해자들은 경찰에 신고했지만 “텔레그램이라 수사가 어렵다”, “피의자가 특정되지 않는다”는 답변만 듣는다. 그러나 이들은 굴하지 않고 직접 다른 피해자들을 찾아 나서고, ‘N번방 성착취 사건’을 취재한 원은지 얼룩소 에디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피해자들 중 한 명인 루마는 사건을 기록해 나가며 같은 범죄의 피해자들뿐 아니라 동일 유형의 범죄를 겪은 피해자들도 만난다. 루마를 지켜본 원 에디터는 말한다. ‘루마는 자신의 피해 구제를 넘어 보다 분명한 목표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중략) 분노하고 좌절하는 대신, 더 많이 움직였다.’(12쪽)



다시 <버닝썬>으로 돌아와서, 여자를 구하러 나섰던 여자들은 저마다 자신을 움직인 동력을 고백한다. 생전의 구하라는 강 기자를 돕겠다고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저도 리벤지 포르노 피해자잖아요.” 강 기자 또한 “어디에서도 말 못 했던 이야기”라며 자신의 불법 촬영 피해 경험을 털어놓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게 외부로 퍼질 수 있다는 두려움, 그런 게 너무 컸던 거 같고… 늘 불안감을 항상 갖고 사는 것 같아요.”

‘어디서도 말 못 했던 이야기’는 내게도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해킹된 내 메일 계정으로 수십 통의 메일이 발송됐다. 거기에는 같은 반 남자아이들과 내가 성관계를 했다며 ‘야설’에 가까운 내용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함께 운동장과 PC방으로 놀러 다니던 아이들의 이름이 끝도 없이 열거된 그 메일은 내 주소록에 있던 이들 모두에게 발송되었고, 나는 내 근처에 도사리고 있을 숨은 악의에 대한 공포로 이후 남자아이들과는 자연히 멀어졌다. 강 기자의 말처럼, 그때가 내게는 ‘늘 불안감을 갖고 살게’ 된 최초의 일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여자들을 일평생 휘감는 그 ‘불안감’, 다른 여자들은 내가 겪었던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은 감각. 그것이 여자들을 경유하는 공통의 감각이며, <버닝썬>과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에서 여자가 여자를 구하러 나선 이유다. K팝 스타의 추악한 권력의 말로인 ‘버닝썬 게이트’를 밝혀낸 주역 박효실·강경윤·구하라, 경찰도 “어렵다”던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을 끝끝내 추적해 피의자를 잡아낸 루마와 원은지, 익명의 여성 피해자들. 그들은 자신들의 행보가 여자를 구하는 한편으로, 스스로를 구하는 길임을 일찍부터 체화한 이들이었다.

그래서 눈물이 났나 보다. 용감하게 뭇 여성들을 구했지만, 스스로는 스러져 갔던 여자라서. 그 여자를 구하지 못한 사회의 일원이자 여자의 한 사람이라서. 안타깝게 먼저 떠난 그녀의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외쳐 본다. 그녀의 이름은 구하라, 구하라, 구하라.


나 잡으려고 텔레그램 가입했어?
나 잡으려고 텔레그램 가입했어?
원은지 저
얼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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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슬기 기자

글 쓰고 말하며 사는 기자, 칼럼니스트. 1988년 대구 출생, 창원 출신. 한양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서울신문》에서 9년간 사회부, 문화부, 젠더연구소 기자로 일했다. 현재는 프리랜서 기자로 《오마이뉴스》에 〈이슬기의 뉴스 비틀기〉를 연재 중이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의 행간을 읽는 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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