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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승 칼럼] 나는 왜 나를 방해하는가? ①

김지승의 끔찍하게 민감한 질문들 2화 - 일기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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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9세기 여성의 정당한 자서전 형식으로 간주되던 일기는 각 시대의 ‘여성적’인 구조 및 관점과 관계하며 여성적 장르로 발전한다. 주류 담론과 재현의 틈, 그 빈 공간이 여성의 언어가 태어나는 장소라면 일기는 여성에게 그 장소 같은 백지를 제공한 셈이다. (2024.05.21)


김지승 작가가 읽고 쓰기 위한 여성의 질문들을 던집니다.
격주 화요일 연재.


unsplash


어느 저녁, 로드멜 마을의 몽크스 하우스 거실에 모처럼 불이 켜졌다. 방문객 대여섯이 창을 등지고 선 레너드 울프와 마주보고 앉았다. 버지니아 울프가 생전에 가깝게 지냈던 동료들이기도 했던 그들은 늘 그렇듯 특별한 목적 없이 이곳을 찾았지만 어쩐지 그날은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 편집본에 대한 진척 상황을 듣게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번갈아 벽난로 주변을 맴돌고 지팡이 끝으로 불씨를 툭툭 건드리던 그들의 인내심이 팽팽하게 차올라 담배 연기를 압도할 때쯤 레너드가 잠깐 사라지더니 노트 한 권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의 기침 두 번으로 느닷없이 막이 올랐다. 낭독이 시작된 것이다. 한 여성 작가가 사라지고 남은 벽의 자국들에 거실의 모든 눈과 귀가 몰렸다.

문장의 리듬이 순식간에 거실을 움켜쥐었다. 너무 늦게 전해진 버지니아의 진실함에 숙연해지기도, 저항할 새도 없이 피식 웃기도 하면서 청중들은 이대로 1941년의 마지막 날까지 이어지리라 여기며 조끼 단추를 풀고 등을 기댔다. 중단은 시작보다 급작스러웠다. 그 돌연한 멈춤과 침묵 그리고 불시에 틈입한 어떤 죽음의 연상에 레너드도 그들만큼 당황했다. 멈춤, 침묵, 죽음의 시간이 숨 막히게 흐르고 있었다. 점점 진해지는 시간의 그림자로부터 모두를 구해내고자 한 사람이 나서기 전까지.

“아마도 울프 여사가 여기 있는 누군가의 모순이나 부조리함을 너무 자유롭게 표현한 구절에 도착했나보군요,”1

레너드가 “아, 네”라고 얼결에 대꾸하고, 당황하더니, “꼭 그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라고 덧붙였다. 맞은편 얼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레너드도 어색하게 따라 웃긴 했지만 선뜻 낭독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각자 술잔을 세 번째 새로 채운 후에도 레너드의 당혹스러운 검열자의 표정은 여전했다. 나머지 얼굴들이 점차 굳어가고 시선마다 날이 섰다. 그날 저녁 몽크스 하우스의 거실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레너드를 즉시 제외하고― 드물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장 저 노트와 나머지 일기들을 저 작자에게서 빼앗으라고! 약 70년 후 『울프 일기』를 읽고 있던 나 역시 그랬다.

버지니아 울프는 생애 초기에 쓴 일기 세 권, 1915년부터 1941년 사망 4일 전까지의 일기 스물여섯 권, 2002년에 기적처럼 발견된 1909년 일기 한 권까지 총 서른 권의 일기장을 남겼다. 1898년부터 그가 무척 좋아했다는 각종 소문을 비롯 가정의 딜레마, 성적 욕망, 문화적 향유, 특유의 농담, 불안과 성찰 등을 담은 이 방대한 일기들은 1977년부터 차례로 출간되어 1984년에 총 다섯 권으로 완결되었다. 한국에는 1953년 남편 레너드 울프가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모습만 남기고 삭제 및 생략한 편집본 『A Writer's Diary 어느 작가의 일기』가 『울프 일기』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다. 『울프 일기』 속 버지니아 울프는 읽고 쓰기 외의 삶과는 연결성이 흐릿한 채 평단의 평가와 주변 동료들의 말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느라 바쁘다. 쓰면서 불안해하고, 완성 후에도 우울감이 심하며, 칭찬 한 마디에 안심하다가, 그런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끼고 다시는 반응에 신경쓰지 않겠다고 다짐하더니, 몇 장 지나지 않아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작가인지 자학을 이어간다. 그에게는 충분히 억울할 만한, 특정 인상이 강화된 편집이지만 이 일련의 기록은 ‘나’가 자신의 쓰기에 가장 잦은 방해자가 되는 여성에게는 가깝고 생생해서 사실로 믿고 싶은 유혹이 적지 않다. 버지니아 울프, 당신마저…

18, 19세기 여성의 정당한 자서전 형식으로 간주되던 일기는 각 시대의 ‘여성적’인 구조 및 관점과 관계하며 여성적 장르로 발전한다. 주류 담론과 재현의 틈, 그 빈 공간이 여성의 언어가 태어나는 장소라면 일기는 여성에게 그 장소 같은 백지를 제공한 셈이다. 메리 셸리가 일기에 쓴 “이제 나는 어두운 이미지로 지워나가야 할 이 하얀 페이지로 되돌려진다”라는 문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특히 여성 작가의 일기는 중요한 문제에 대한 억압적 침묵을 여성의 언어로 대체하며 탐색해가는 정체성의 연습장이기도 했다. 자아든 작품이든 하나의 통합된 형태가 아닌 “끝없는 불일치의 균형”을 실험하는 장, 자아를 돌보고 키우는 모성적 공간이자 비선형적이고 유동적인 시간성의 차원인 그들의 일기는 여성이 처한 기억과 언어의 현실을 반영하고 증언해왔다. 

그러나 그 빈 공간에서도 여성인 ‘나’가 나를 방해한다. 일기 즉, “가장 사적인 자아의 산실”에서 함께 눈을 뜬 타자, 언제나 이미 타자인 ‘나’는 불안한 임무를 띤 파견 감시자처럼 잠시도 응시를 멈추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가 그의 환청과 환영, 지속적인 공포, 우울을 일기에 충분히 쓰지 못했다는 사실은 나를 자주 슬프게 한다. 고통의 서식지인 몸에 대해 쓸 수 있다면 얼마간 자유로워질 것을 알면서도 그럴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그는 “아마도 나 자신에게조차 성공한 작가로 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라고 냉소 없이 쓴다. 응시. 그로부터 계승되는 질문들. “나는 (내게조차)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가?” 아마도 일기 곁에 놓이는 최초의 질문일 것이다.


덧. 버지니아 울프와 메리 셸리는 각각 남편과 ‘공동 일기’를 쓰고 싶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남편의 내면 기록 부족(레너드 울프)과 남다른 게으름(퍼시 셸리) 때문에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1  버지니아 울프의 조카이자 유산 집행 대리인 퀸틴 벨이 일기 전집에서 소개한 짧은 일화를 픽션으로 재구성하며 유일하게 그대로 인용한 대사이다. 실제 일화에서 레너드 울프는 “다음 몇 페이지는 진실이 하나도 없으니 건너뛰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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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승

읽고 쓰고 연결한다. 『100세 수업』, 『아무튼, 연필』, 『짐승일기』, 『술래 바꾸기』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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