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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의 시절 리뷰] 그 소녀의 생존 전략
이슬기 칼럼 5화 -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당장에 삶을 바꿀 수 없다면, 정신이라도 승리해야 분연히 일어서서 삶을 지속할 수 있다. 그런 이후에야 직접적으로 삶의 변화를 도모할 힘도 비축한다. 정신의 승리가 생존을 가능케 한다. (2024.05.16)
세상의 행간을 읽는 이슬기 기자의 콘텐츠 리뷰. 격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
‘원영적 사고’가 인기다. 반 컵의 물을 보고도 ‘다 먹기에는 너무 많고, 덜 먹기에는 너무 적고, 그래서 딱 반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완전 럭키비키(영어단어 ‘럭키’와 장원영의 영어 이름 ‘비키’가 조합된 단어)잖아!’라고 할 것 같다는(‘X’의 한 유저 피셜) 초긍정주의 사고 방식. 대기업 강연에서부터 구청장까지 함께 외친다는 걸그룹 아이브의 멤버 장원영의 ‘럭키비키’다. ‘희진적 사고’도 있다.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사자후로 알려진 사고 방식이다. “맞다이로 들어와”, “너만 우울증이야? 나는 10년 전부터 우울증이야” 같이 억울한 것은 참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는 태도다. 팍팍한 현실을 사는, 각자의 생존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언나적 사고’라는 것도 있다. 『구의 증명』을 쓴 최진영 소설가의 첫 책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에는 이름도 없이 ‘언나’(‘어린아이’의 강원·경상 방언)로 불리는 소녀가 나온다. 원영적 사고가 “오히려 좋아”이며, 희진적 사고가 “뭐 어쩌라고”라면 ‘언나적 사고’는 “이건 다 가짜야”라는 현실 부정이다. 소녀는 나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인 아빠·엄마를 ‘가짜’로 여긴다. 나를 수도 없이 때리는 아빠와 나를 수도 없이 굶기는 엄마는 나의 ‘진짜’ 엄마·아빠일 리 없다. 이들은 가짜이고 진짜 부모는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나쁘지만, 소녀에게는 그게 편하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좀 더 못되질 수 있으니까.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면 못되게 굴어야 한다.’
가시 세운 고슴도치 같은 소녀의 위악 앞에서, 세상이 만든 선과 악은 해체된다. 진짜 엄마를 찾아 가출한 소녀는 ‘다방 레지’ 장미언니, 태백식당 할머니, 교회의 ‘목소리’, 폐가의 남자, 각설이패, 가출 청소년들을 차례로 만난다. 장미언니는 다방 마담인 찬수 엄마가 나를 때리려 할 때마다 악을 쓰며 막아주는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에게 날아드는 ‘백곰’의 부당한 폭력에는 ‘찍’ 소리도 못하는 인물이다. 교회의 견실한 청년 ‘목소리’는 나를 열심히 보살피지만, 그것은 진정 나를 위한 것인지 교회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싶어서인지 헷갈리는 영역의 것이다. 반면 세상 사람들이 다 ‘너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느냐’며 추궁했던 폐가의 남자는 내가 착한 아이도 나쁜 아이도 아닌, 몸뚱이 하나로 존재할 수 있게 한 유일한 사람이다.
단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진실은, 소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소녀만큼이나 ‘가난하고 배고프고 추운 사람들’이라는 거다. 그래서 ‘나’는 최종적으로 진짜 엄마의 조건을 이렇게 정의한다. ‘언제나 배고프고 추운 사람’, 그렇지만 ‘늘 불행하지는 않은 사람’. 배고프고 춥지 않으면 같은 처지의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그런데 불행하기까지 하다면 주변을 돌아보고 살 여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나적 사고’는 책이 처음 출간된 2010년에서부터 지금까지 꽤 오래 내 맘에 남았다. 당시 나의 생존 전략이 ‘언나’에게 크게 빚졌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국회의원실에서 인턴을 하고 있었다. 대학 입학 때부터 ‘버킷 리스트’에 있었을 만치 꿈꾸던 일이었지만, 실제 맞닥뜨린 첫 사회생활은 ‘99% 카카오’ 마냥 쓰디썼다. 누구나 그렇듯 출근은 ‘원영적 사고’로 했다. ‘내가 바라던 국회에서 일을 하게 되다니 럭키비키잖아!’ 그러나 최저시급에 못 미치는 임금과 30일 동안 30번 출근하는 극악의 노동 환경 앞에서 나는 점차 원영적 사고를 잃어갔다.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은 ‘소설로의 도피’였다. 잠깐의 틈만 나도, 나보다 더 힘든 소녀들의 삶을 읽어 재꼈다. 희진적 사고의 역발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가령 내가 우울증이라면 10년 전부터 우울증인 사람을 찾아 헤매 그로부터 위안을 얻는 작업이었다. 그때 만난 책이 2010년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었던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이다. 나는 ‘언나’의 눈으로 재구성된 세상을 보며 많은 위안을 받았고, 자정에 퇴근해 7시간 만에 다시 출근할 기운도, 6개월 만에 직장을 때려치울 용기도 얻었다.
원영과 희진, 언나의 사고 방식을 두고 우위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각자가 처한 현실과 희로애락의 곡선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존 전략을 두고 ‘정신 승리’라고 폄하하는 것 또한 부당한 일이다. 당장에 삶을 바꿀 수 없다면, 정신이라도 승리해야 분연히 일어서서 삶을 지속할 수 있다. 그런 이후에야 직접적으로 삶의 변화를 도모할 힘도 비축한다. 정신의 승리가 생존을 가능케 한다.
‘나에게도 직감이란 게 있다. 아니, 불행하게도, 내겐 직감밖에 없다.’(106쪽) 가진 게 직감밖에 없는 소녀가 택하는 소설의 결말은 옳고 그름을 떠나, 적어도 주체적이다. 생존을 가능케 하는 그 직감을 벼리기 위해, 오늘도 소녀들이 각자의 칼을 간다. ‘○○적 사고’의 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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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고 말하며 사는 기자, 칼럼니스트. 1988년 대구 출생, 창원 출신. 한양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서울신문》에서 9년간 사회부, 문화부, 젠더연구소 기자로 일했다. 현재는 프리랜서 기자로 《오마이뉴스》에 〈이슬기의 뉴스 비틀기〉를 연재 중이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의 행간을 읽는 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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