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이슬기의 시절 리뷰] 그 소녀의 생존 전략

이슬기 칼럼 5화 -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당장에 삶을 바꿀 수 없다면, 정신이라도 승리해야 분연히 일어서서 삶을 지속할 수 있다. 그런 이후에야 직접적으로 삶의 변화를 도모할 힘도 비축한다. 정신의 승리가 생존을 가능케 한다. (2024.05.16)


세상의 행간을 읽는 이슬기 기자의 콘텐츠 리뷰.
격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원영적 사고’가 인기다. 반 컵의 물을 보고도 ‘다 먹기에는 너무 많고, 덜 먹기에는 너무 적고, 그래서 딱 반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완전 럭키비키(영어단어 ‘럭키’와 장원영의 영어 이름 ‘비키’가 조합된 단어)잖아!’라고 할 것 같다는(‘X’의 한 유저 피셜) 초긍정주의 사고 방식. 대기업 강연에서부터 구청장까지 함께 외친다는 걸그룹 아이브의 멤버 장원영의 ‘럭키비키’다. ‘희진적 사고’도 있다.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사자후로 알려진 사고 방식이다. “맞다이로 들어와”, “너만 우울증이야? 나는 10년 전부터 우울증이야” 같이 억울한 것은 참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는 태도다. 팍팍한 현실을 사는, 각자의 생존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언나적 사고’라는 것도 있다. 『구의 증명』을 쓴 최진영 소설가의 첫 책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에는 이름도 없이 ‘언나’(‘어린아이’의 강원·경상 방언)로 불리는 소녀가 나온다. 원영적 사고가 “오히려 좋아”이며, 희진적 사고가 “뭐 어쩌라고”라면 ‘언나적 사고’는 “이건 다 가짜야”라는 현실 부정이다. 소녀는 나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인 아빠·엄마를 ‘가짜’로 여긴다. 나를 수도 없이 때리는 아빠와 나를 수도 없이 굶기는 엄마는 나의 ‘진짜’ 엄마·아빠일 리 없다. 이들은 가짜이고 진짜 부모는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나쁘지만, 소녀에게는 그게 편하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좀 더 못되질 수 있으니까.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면 못되게 굴어야 한다.’

가시 세운 고슴도치 같은 소녀의 위악 앞에서, 세상이 만든 선과 악은 해체된다. 진짜 엄마를 찾아 가출한 소녀는 ‘다방 레지’ 장미언니, 태백식당 할머니, 교회의 ‘목소리’, 폐가의 남자, 각설이패, 가출 청소년들을 차례로 만난다. 장미언니는 다방 마담인 찬수 엄마가 나를 때리려 할 때마다 악을 쓰며 막아주는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에게 날아드는 ‘백곰’의 부당한 폭력에는 ‘찍’ 소리도 못하는 인물이다. 교회의 견실한 청년 ‘목소리’는 나를 열심히 보살피지만, 그것은 진정 나를 위한 것인지 교회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싶어서인지 헷갈리는 영역의 것이다. 반면 세상 사람들이 다 ‘너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느냐’며 추궁했던 폐가의 남자는 내가 착한 아이도 나쁜 아이도 아닌, 몸뚱이 하나로 존재할 수 있게 한 유일한 사람이다.

단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진실은, 소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소녀만큼이나 ‘가난하고 배고프고 추운 사람들’이라는 거다. 그래서 ‘나’는 최종적으로 진짜 엄마의 조건을 이렇게 정의한다. ‘언제나 배고프고 추운 사람’, 그렇지만 ‘늘 불행하지는 않은 사람’. 배고프고 춥지 않으면 같은 처지의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그런데 불행하기까지 하다면 주변을 돌아보고 살 여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나적 사고’는 책이 처음 출간된 2010년에서부터 지금까지 꽤 오래 내 맘에 남았다. 당시 나의 생존 전략이 ‘언나’에게 크게 빚졌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국회의원실에서 인턴을 하고 있었다. 대학 입학 때부터 ‘버킷 리스트’에 있었을 만치 꿈꾸던 일이었지만, 실제 맞닥뜨린 첫 사회생활은 ‘99% 카카오’ 마냥 쓰디썼다. 누구나 그렇듯 출근은 ‘원영적 사고’로 했다. ‘내가 바라던 국회에서 일을 하게 되다니 럭키비키잖아!’ 그러나 최저시급에 못 미치는 임금과 30일 동안 30번 출근하는 극악의 노동 환경 앞에서 나는 점차 원영적 사고를 잃어갔다.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은 ‘소설로의 도피’였다. 잠깐의 틈만 나도, 나보다 더 힘든 소녀들의 삶을 읽어 재꼈다. 희진적 사고의 역발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가령 내가 우울증이라면 10년 전부터 우울증인 사람을 찾아 헤매 그로부터 위안을 얻는 작업이었다. 그때 만난 책이 2010년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었던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이다. 나는 ‘언나’의 눈으로 재구성된 세상을 보며 많은 위안을 받았고, 자정에 퇴근해 7시간 만에 다시 출근할 기운도, 6개월 만에 직장을 때려치울 용기도 얻었다.

원영과 희진, 언나의 사고 방식을 두고 우위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각자가 처한 현실과 희로애락의 곡선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존 전략을 두고 ‘정신 승리’라고 폄하하는 것 또한 부당한 일이다. 당장에 삶을 바꿀 수 없다면, 정신이라도 승리해야 분연히 일어서서 삶을 지속할 수 있다. 그런 이후에야 직접적으로 삶의 변화를 도모할 힘도 비축한다. 정신의 승리가 생존을 가능케 한다.

‘나에게도 직감이란 게 있다. 아니, 불행하게도, 내겐 직감밖에 없다.’(106쪽) 가진 게 직감밖에 없는 소녀가 택하는 소설의 결말은 옳고 그름을 떠나, 적어도 주체적이다. 생존을 가능케 하는 그 직감을 벼리기 위해, 오늘도 소녀들이 각자의 칼을 간다. ‘○○적 사고’의 발현이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최진영 저
한겨레출판



추천기사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0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이슬기 기자

글 쓰고 말하며 사는 기자, 칼럼니스트. 1988년 대구 출생, 창원 출신. 한양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서울신문》에서 9년간 사회부, 문화부, 젠더연구소 기자로 일했다. 현재는 프리랜서 기자로 《오마이뉴스》에 〈이슬기의 뉴스 비틀기〉를 연재 중이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의 행간을 읽는 일에 관심이 많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최진영> 저12,420원(10% + 5%)

세상의 가짜를 다 모아서 태워버리면 결국 진짜만 남을 것이다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개정판 2006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최진영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자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ebook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최진영> 저11,040원(0% + 5%)

“최진영이 오랫동안 못된 소설가로 남아 있기를 바랄 뿐이다.”_황현산(문학평론가)“최진영은 고정화되고 정형화된 모든 것을 뒤집어보고 거꾸로 보는 매서운 눈썰미를 지녔다.” _공지영(소설가)-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개정판-세상에서 가장 ‘못된’ 소녀의 지독한 성장기!20..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차가운 위트로 맛보는 삶의 진실

문장가들의 문장가, 김영민 교수의 첫 단문집. 2007년부터 17년간 써 내려간 인생과 세상에 대한 단상을 책으로 엮었다. 예리하지만 따스한 사유, 희망과 절망 사이의 절묘한 통찰이 담긴 문장들은 다사다난한 우리의 삶을 긍정할 위로와 웃음을 선사한다. 김영민식 위트의 정수를 만나볼 수 있는 책.

누구에게나 있을 다채로운 어둠을 찾아서

잘 웃고 잘 참는 것이 선(善)이라고 여겨지는 사회. 평범한 주인공이 여러 사건으로 인해 정서를 조절하는 뇌 시술을 권유받는다. 그렇게 배덕의 자유를 얻으며, 처음으로 해방감을 만끽한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조금 덜 도덕적이어도’ 괜찮다는 걸 깨닫게 해줄 용감한 소설.

그림에서 비롯된 예술책, 생각을 사유하는 철학책

일러스트레이터 잉그리드 고돈과 작가 톤 텔레헨의 생각에 대한 아트북. 자유로운 그림과 사유하는 글 사이의 행간은 독자를 생각의 세계로 초대한다. 만든이의 섬세한 작업은 '생각'을 만나는 새로운 경험으로 독자를 이끈다. 책을 펼치는 순간 생각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삶

베스트셀러 『채소 과일식』 조승우 한약사의 자기계발 신작. 살아있는 음식 섭취를 통한 몸의 건강 습관과 불안을 넘어 감사하며 평안하게 사는 마음의 건강 습관을 이야기한다. 몸과 마음의 조화로운 삶을 통해 온전한 인생을 보내는 나만의 건강한 인생 습관을 만들어보자.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