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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완선의 살다보니 SF] 사건의 냄새가 난다

미스터리를 읽는 작업과 SF를 읽는 작업은 상당히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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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도서관에 갔다가 일상 미스터리다운 사건을 겪었다. 책을 빌리려고 했더니 이미 대출 중인 도서가 있다는 안내가 나왔다. (2024.05.07)


심완선 SF 칼럼니스트가 일상에서 벗어난 딴생각을 풀어내는 칼럼을 연재합니다.
격주 화요일 연재.


unsplash


여름 휴가에 읽을 책으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추천받았던 남자가 있다. 이야기에 따르면 남자는 미스터리 애독자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맥베스』를 범죄소설로 읽었다. 나중에 감상을 물으니 그는 불평하며 대답했다. 이 미스터리는 추리가 형편없고 인물이 지나치게 극적으로 말한다고.

위 이야기의 세부사항은 부정확할 수 있다. 출처를 확인하고 싶었는데 나로선 찾지 못했다(제발 이참에 누가 알려주면 좋겠다. 왜 사람은 읽은 걸 자꾸 까먹는 걸까? 제대로 기억해두면 편할 텐데. 물론 전부 생생하게 기억한다면 예전에 읽은 미스터리 내용을 까먹었다가 새롭게 놀라는 경험도 누리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장르소설 색안경을 쓰면 온갖 텍스트를 해당 장르로서 평가하게 된다는 점에는 깊이 공감했다. 나는 미스터리와 판타지에 푹 빠져서 자랐다. 지금이야 SF를 잔뜩 읽고 있지만, 어릴 적 처음으로 서점에서 고른 책은 엘러리 퀸 걸작선과 판타지 소설이었다. 잠들기 전이나 쉬는 시간에 남의 살인, 절도, 사기, 유괴 이야기를 읽으며 즐거워했다. 정말 좋지 않나? 고전적인 미스터리에 나오는 밀실살인 트릭. 혹은 괴짜 명탐정과 그에게 발언대를 마련해주는 화자의 모습. 가정 스릴러의 섬세한 심리 묘사와 미칠 듯한 답답함. 하드보일드가 다루는 씁쓸함, 비정함, 견고함. 사회파 미스터리가 하나의 사건에서 사회 전체의 문제를 읽어내는 방식. 게다가 나는 추리를 열심히 하는 독자는 아니라서 미스터리 양념만 쳐도 좋아한다. 니시오 이신의 『잘린 머리 사이클』처럼 분위기만 그럴싸하고 정작 해결편은 비합리적으로 굴러가도 괜찮다. 차마 위 이야기의 미스터리 애독자에게 추천하진 못하겠지만.

‘지금 상황이 미스터리라면’이라는 생각도 자주 했다. 최근에는 도서관에 갔다가 일상 미스터리다운 사건을 겪었다. 책을 빌리려고 했더니 이미 대출 중인 도서가 있다는 안내가 나왔다. 나는 다소 곤란해졌다. 기억나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대출한 도서가 있으면 그만큼 대출 가능한 권수가 줄어든다. 혹시 연체라도 되면 더욱 곤란하다. 사서를 찾아 상황을 설명하고 대출된 책이 무엇인지 물었다. 사서 선생님은 ‘여의사’가 ‘섹스 잘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책이 대출된 상태라고 했다. 네? 하필? 위기를 맞이한 중장년 아니면 호기심 폭발하는 미성년자가 몰래 참고할 법한 그런 책을 제가...? 뭐야, 부끄러움 많은 사람이 내 이름을 도용하기라도 했나? 자기가 책을 가로채고 책임을 떠넘기려고? 하지만 대체 어떻게?

아무리 의혹을 제기해봤자 없는 책이 나타나진 않아서, 그저 확인을 부탁드리고 나왔다. 그리고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요네자와 호노부의 『책과 열쇠의 계절』을 생각했다. 도서관의 십진법을 단서로 활용하는 등 책에 관한 트릭으로 가득한 연작소설이다. 이왕이면 그런 친숙한 트릭이라면 좋았을 텐데, 현실은 섹스 지침서라니. 누명 쓴 의뢰인이 된 듯했다. 그런데 찾아갈 만한 탐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 신경 쓰여요!’라고 말할 기회가 없었다.

알고 보니 그 책은 도서관에 잘 꽂혀 있었다. 반납 처리하는 과정에 도서가 잘못 인식된 모양이었다. 흠, 그건 곧 섹스 지침서를 대출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다. 의외로 인기 도서였을지도 모른다. 검색해보니 심지어 비슷한 제목으로 세 권이 출간되어 있었다. 하나는 한국 저자의 책이었는데 특이하게도 번역자가 따로 있었다. 더 찾아보니 한국 출신이지만 일본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 일본어로 책을 썼을 뿐이었다. 미스터리라고 할 것도 없는 시시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요네자와 호노부의 다른 책인 ‘소시민 시리즈’가 떠올랐다. 작중에서 남자 주인공은 새로 사귄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기 위해 같이 버스를 탄다. 빈자리는 하나도 없는 가운데 누가 정차 버튼을 누른다. 자리에 앉은 사람 중 최소 1명은 다음 정류장에서 하차한다는 뜻이다. 그게 누군지 알아내면 여자친구를 자리에 앉게 해줄 수도 있다. 주인공은 맹렬히 머리를 굴린다. 정답은 저 사람이다! 주인공은 그 사람 앞으로 슬쩍 다가간다. 여자친구는 무사히 빈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추리 과정을 모르는 여자친구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 여길 뿐이다. 나 역시도 무심히 지나친 미스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미스터리 소설은 정말로 다양하게 발전했다. ‘녹스의 10계명’은 등장할 때부터 이미 애거서 크리스티가 만든 반례로 깨진 상태였다. 로널드 녹스는 영국의 가톨릭 신부이자 미스터리 작가였는데, 그는 미스터리 작가들의 클럽에서 나눈 이야기를 정리하여 “좋은 탐정 소설을 위한 10가지 규칙”을 발표했다. 자세한 내막은 저번에 “친구들아 내게 글을 줘 힘을 줘”에서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녹스의 규칙만을 살펴본다.


  1. 범인은 이야기 초반에 언급된 사람이어야 한다. 다만 독자가 생각을 따라가던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2. 초자연적이거나 불가사의한 행위는 당연히 안 된다.
  3. 사용 가능한 비밀 공간이나 통로는 1개보다 많을 수 없다.
  4.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독극물이나, 결말에서 긴 과학적 설명이 필요한 장치는 사용할 수 없다.
  5. 중국인이 등장하면 안 된다. (참고: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범인으로 지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6. 우연이 탐정을 돕거나, 설명하지 못할 직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7. 탐정 본인이 범인이면 안 된다.
  8. 탐정은 독자에게 즉시 제시되지 않았던 단서를 꺼내들어서는 안 된다.
  9. 탐정의 바보 친구인 왓슨(참고: 탐정 ‘셜록 홈즈’의 친구이자 소설의 화자) 같은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스치는 생각을 하나라도 숨기면 안 된다. 그의 지성은 일반적인 독자보다 약간, 아주 약간 낮아야 한다.
  10. 충분히 암시하지 않은 한, 쌍둥이나 대역이 등장하면 안 된다.


녹스는 1929년 10월에 이를 <The Publishers Weekly the American Book Trade Journal>에 게재했다. 작가가 탐정의 이름으로 독자에게 도전장을 내밀던 시기였다. 작가는 독자와 정정당당하게 대결을 펼쳐야 했다. 생각해보면 이는 게임북을 읽는 방법과 비슷하다. 독자는 책의 지시에 따라 정해진 페이지로 이동해야 하고, 내용을 미리 들춰보면 안 된다. 하지만 패턴이 똑같아서야 재미가 없다. 작가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반전을 찾았다. 범인의 정체는 탐정이거나 화자거나 살해당한 사람이거나 독자였다. 때로는 모두가 범인이거나 아무도 범인이 아니었다. 참고로 니타도리 케이는 『서술트릭의 모든 것』의 모든 단편을 서술트릭으로 채웠는데, 후기마저 서술트릭을 이용한다(참고: 서술트릭은 소설의 서술 방식을 이용해 트릭을 만드는 경우를 말한다). 이에 따르면 작가가 피해자라면 범인은 마땅히 편집자다. 작가들의 방만함과 나태와 불안정을 생각하면... 게다가 작가가 마감에 늦거나 원고를 펑크낸다면... 그럴싸하다(당연히 농담이지만, 나는 제 발 저린 상태라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다는 사실도 밝혀둔다).

사실 미스터리를 읽는 작업과 SF를 읽는 작업은 상당히 유사하다. 둘 다 장르소설 색안경을 사용해서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독자는 작가가 제시하는 규칙 및 단서를 받아들인 뒤, 그걸 토대로 소설 내용을 이해한다. 일상에 비일상이, 혹은 현실에 비현실이 침입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다만 미스터리는 사건의 전말에 집중하지만 SF는 작중의 세계를 꾸민다는 점이 다르다. 종종 SF는 훌륭한 미스터리가 된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아이, 로봇』에서 ‘로봇 3원칙’을 제시한 뒤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우회한다. 좋은 의도로 거짓말을 하는 건 인간을 해치는 일일까, 아닐까? 원칙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엔 어떻게 될까? 주인공들은 눈앞의 로봇이 왜 말썽을 일으키는지 논리적으로 추론한다.

반대로 특수설정 미스터리는 상당히 SF와 겹친다. 고바야시 야스미의 『전망 좋은 밀실』의 트릭은 죄다 ‘사실은 가상현실’ ‘사실은 시간여행’ ‘사실은 관측할 때 변화’라는 식이다. 위의 기준에 따르면 완전히 반칙이다. 단서를 미리 주지 않으므로 독자가 미리 예상할 수가 없다. 반면 이보다 훨씬 본격 미스터리에 충실한, 샤센도 유키의 『낙원은 탐정의 부재』는 SF로 읽기에도 적절하다. 작중에서는 어느 날부터 갑자기 전 세계에 천사가 강림한다. 천사는 강림 시점을 기준으로 타인을 2명 이상 죽이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간다. 덕분에 살인 같은 범죄는 급격히 줄어든다. 하지만 불온한 분위기가 퍼진다. 2명부터 지옥행이라면, 1명은 죽여도 괜찮다는 건가? 이건 신이 발행하는 면죄부일까? 더불어 무차별 테러로 대규모 동반자살을 꾀하는 경우도 늘어난다. 2명을 죽이나 10명을 죽이나 똑같다면, 한번에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을 저승 길동무로 삼겠다는 태도다. ‘천사’를 이용한 규칙은 이야기의 배경을 단단하게 구성하면서, 사건의 진상을 추리할 단서가 된다.

게다가 『낙원은 탐정의 부재』는 첫머리에 저택 평면도와 등장인물 목록을 제시하고, 마지막에는 살아남은 등장인물이 모두 모인 가운데 탐정이 사건의 진상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범인을 지목한다. 참고로 장소는 대부호가 소유한 외딴 섬의 저택이고, 초대를 받고 모여든 각계각층의 손님들에겐 저마다 사연이 있고, 섬에는 배가 없어서 다음 배편이 올 때까지 누구도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다. 살인사건의 첫 피해자는 물론 저택의 주인인 대부호다. 등장인물은 엘러리 퀸이나 푸아로를 언급하며 농담을 한다. 소설이 본격 미스터리에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더불어 수많은 미스터리가 형성해온 암묵적인 규칙에 따르면, 누구나 주특기가 있다면 탐정으로 활약할 수 있다. 사립탐정이나 경찰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수학 천재, 게이머, 여왕, 연금술사, 식물학자, 미식가, 거짓말쟁이, 유령, 메이드, 소설을 좋아하는 학생 등. 작가들은 그들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알맞은 사건을 배치한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단서를 붙잡기만 하면 그들은 결말에 도달한다. 나는 마법학교 입학통지서를 기다리진 않지만, 솔직히 코지 미스터리의 등장인물 자리에는 관심이 있다. 다만 편집자 선생님이 살심을 품기 전에 마감부터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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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심완선

SF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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