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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랑 칼럼] 세계를 사랑하는 각자의 방식 - 『알려진 세계』와 『격정세계』

윤아랑의 써야지 뭐 어떡해 1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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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소설이나 그림이나 음악이나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세계에 대한 그 작품의 태도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혹은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2024.04.26)


우리가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선 여러 가지 이론(異論)이 있다. 누군가는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초월하여 전달되는 낯선 감흥에 우둔하리만큼 솔직할 것을 요구한다. 누군가는 표현의 맥락에 집중하여 그 표현을 가능케 한 힘을 추적하자고 제안한다. 누군가는 오히려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든 역사를 추동한다며 그 난잡한 역학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카프카를 인용해 “우리 자신의 내부에 있는 얼어붙은 바다를 위한 도끼”로서, 우리를 상처 입히고 그로써 우리를 재구성하는 폭력으로 작품을 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아주 거친 아포리즘으로 축약하기도 했지만) 서로 상충하거나 서로 묶이기도 하는 만큼, 이 각각의 견해들을 말 그대로 따르는 것은 어느 정도 지양해야 할 터이다.

하면 내 경우는 어떨까. 아직까지 확고하게 굳어진 견해 같은 건 없지만, 신념에 가까운 (다소 추상적인) 입장 하나는 있다. 나는 어떤 소설이나 그림이나 음악이나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세계에 대한 그 작품의 태도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혹은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이때의 태도란 마르크스적 ‘서술’에 가까운 것으로, 세계를 이루는 상이한 힘들을 붙잡거나 창출하기 위해 자신의 한계 속에서 부단히 움직이는 몸짓을 이른다. 달리 말해 세계의 한 면모를 ‘반영’하거나 ‘대응’하는 흔하디 흔한 수준을 넘어서려 애쓰는 작품이나 순간에 주목(해야)한다는 것이다. 안톤 체호프의 말을 빌려, “예술은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다. 정확히 정리하기만 하면 된다.”

당연하게도 이런 태도는 어떤 한 방식만이 아니라 사랑, 분노, 냉소, 연민, 유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된다. 제목에 “세계”라는 단어가 들어간 소설이라는 점 말고는 뚜렷한 공통점이 없는 『알려진 세계』『격정세계』를 여기에 같이 소개하고 싶다 맘을 먹은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 두 걸작에는 세계를 사랑하(려)는 각자의 아름다운 방식이 섬세하고도 굳세게 펼쳐지고 있어,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독자들에게 이 태도들을 전염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마치 내가 그러했듯이.

변호사는 평생 겪어야 할 온갖 슬픔 때문에 견디기 어려운 마음으로 둘째 날 그곳을 뜬 다음 최대한 사람을 피해 카운티 서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꺾었다. (…)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에 관한 기억과 워싱턴 D.C. 사람들도 알고 있을 법한 농장의 최후에 관한 기억을 진 채 목적 없이 계속 나아갔다. 그에겐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친척이 있었고 벨에겐 조지아주 연안에 가족이 있었지만 그는 마을들론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 그는 제가 그저 어떤 평화를 원한단 사실도 모른 채, 그리고 제가 잃은 걸 모두 되찾고 싶어 하는 줄 먼 훗날까지도 모른 채 계속해서 말을 몰았다. (302쪽)

이는 에드워드 P. 존스의 『알려진 세계』의 한 대목으로, 여기의 문장들은 소설에 울창한 멜랑콜리의 감정을 우리에게 함축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내가 알던 세계의 모습이 내게서 멀어질 때, 그러나 그 와중에 잠시도 멈출 수 없을 때, 그리고 그 멀어진 것들을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알면서 그 흔적을 만지작거릴 때의 멜랑콜리. 『알려진 세계』가 굉장한 것은 이런 복합적인 멜랑콜리를 그 자체로서 역사적 전망과 뒤섞기 때문이다.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6년 전인 1855년을 축 삼아 과거와 미래를 현란하게 오가는 복잡한 타임라인(과 그에 따라 캐릭터들의 운명을 툭툭 던져주는 전지적 시점)은 일찍이 객사한 캐릭터가 쭉 살아있는 것처럼 만들기도 하며, 쌩쌩하게 살아있는 캐릭터에게 짙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한다. 말하자면 『알려진 세계』의 모든 캐릭터들은 지나간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동시에 사는 존재인 것이다.

이 속에서 우리 독자들은 마치 천사의 시점으로 당시 미국 남부를 조감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래, 인간들에게 개입할 수 없어 멀리서 열심히 날아다닐 뿐인 애처로운 천사 말이다. 그러면서 소설 속 캐릭터들은 극히 다중적인 성질을 얻는다. 구조와 운명의 부품이자 능동적인 행위자로.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저항하거나, 저항함으로써 또 다른 폭력을 배태하는 역설적인 행위자로. 가령 “아빠, 저한테 권리가 없는 짓은 하나도 안 했어요. 백인이 안 할 짓은 하나도 안 했다고요.”라고 당돌하게 말하는 어린 흑인 노예주 헨리 타운젠드를 당신은 마냥 단죄할 수 있는가. 존스는 『알려진 세계』에서 역사를 살아가는 인간에 얽힌 필연적인 멜랑콜리를 한껏 펼쳐 보이며, 이를 고스란히 긍정하기를 우리에게 강경하게 요구한다. 바로 그게 난잡하기 짝이 없는 우리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한 방식이라고 믿으면서.



한편 찬쉐의 『격정세계』에는 (「옮긴이의 말」을 빌리자면) 중국의 가상의 도시 ‘멍청’에서 “’비둘기’ 북클럽을 중심으로 그 누구보다 문학을 사랑하는 연인들이 등장”하여 문학의 역량에 대한 각자의 우화를 펼친다. 혹 누군가는 저 “문학의 역량”이라는 말에 흠칫 놀라거나 실소를 터트릴 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실천문학의 시대가 지나간 지 한참이 됐고, ‘무쓸모의 쓸모로서 문학’이라는 비평적 관점도 거의 진부해진 이때에, 여전히 태연하게 문학의 역량을 말하고 또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당연한 의문이긴 하나 다음의 대목을 읽으면 그런 우려도 금방 종식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고의 소설은 행동가들을 만들어내죠." 잠자코 있던 옌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럼 당신도 행동하고 있나요?" 샤오쌍이 물었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집안일을 할 때요." 옌이 대답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샤오쌍은 옌의 대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72~73쪽)

여기서 옌은 ‘행동’의 정의를 바꾸고 있다. 소설이 창출하는 행동이란 흔히 말하는 ‘시대정신’과 결부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정신’을 비껴가는 것이며, 소설 속의 무언가를 고스란히 따라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소화해 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우리는 이처럼 문학과 관련하는 ‘상식적’인 개념들 ―가령 ‘노동’이나 ‘일상’ 같은 것― 이 변모하거나 불화하는 광경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괴이한 상상력이 매 문장 사이사이에서 폭발하는 찬쉐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아무래도 이례적일 만큼 얌전해 보이긴 하나, 실은 개념들의 무게와 쓰임새를 자꾸 천연덕스럽게 바꿔버린다는 점에서 『격정세계』는 여전히 몹시 거센 방법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면 이를 통해 찬쉐가 이루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선 399쪽에 등장하는 한마의 한마디 말을 어찌 이해할 것인가가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샤오웨, 당신이 준 장편소설과 사랑에 빠졌어요!"

여기서 한마는 자신이 느끼는 수많은 사랑을 한 마디에 응축하고 있다. 소설 『XXXXX5』를 이루는 이미지들에 대한 사랑(“이제는 소설을 읽을 때마다 묘사들이 육감적이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이 소설을 선물로 준 샤오웨에 대한 사랑(“”그런데 난 대체 그를 사랑하는 걸까, 아닌 걸까?” 한마는 소리 내 말했다.”) 그리고 소설이 개념을 바꾸는 방식에 대한 사랑(“어쩌면 언젠가 이 소설이 샤오웨에 대한 감정이 어떤 것인지 해답을 줄지도 몰랐다.”)… 달리 말해, 찬쉐는 『격정세계』에서 문학이 이 모든 사랑이 하나로 묶이도록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계에 주어진 것들과 철저히 불화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수행하는 이들을 통해서 말이다. (질 들뢰즈의 말을 마구잡이로 변형하자면) 사랑할 수 있는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야 말로 현대 문학의 임무가 아닐까. 아마도 찬쉐는 여기에 자신의 믿음을 걸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문학의 역량이란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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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아랑(평론가)

비평가.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 감각을 문제 삼는 문화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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