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찾아온 불청객, 우울에 휩쓸리지 않는 법
『열네 살 우울이 찾아왔다』 차열음 작가 인터뷰
“고민하고 고통받던 저의 시간은 어느 것 하나 쓸모없었던 적이 없어요.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에요.” (2024.04.25)
프로아나, 씹뱉, 먹토, 식욕억제제 처방……. 거식증은 이제 마치 하나의 문화처럼 우리 사회 깊숙이 침투해 있다. 차열음 작가의 에세이 『열네 살 우울이 찾아왔다』는 그동안 말해지지 않았던 청소년기의 섭식장애와 우울증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다. 거식증을 촉발한 일상의 사건들에서 시작해 투병 과정, 정신과에서 받은 치료와 상담, 가족의 노력과 변화 등 생생한 경험담은 김현아 의사의 추천 글처럼 처참한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젊은이들, 그리고 그의 가족들에게 위안이 되어줄 것이다.
책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소감이 어떠신지 궁금해요.
제 이야기를 담은 책이 나온다는 생각은 어린 시절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꿈이었어요. 그 꿈이 현실화되는 느낌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얼떨떨합니다. 무엇보다 제가 어렸을 때는 우울증, 거식증 환자들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많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그때의 수요를 어른이 된 제가 채워 준 느낌도 들어 뿌듯하기도 해요.
제 경험을 가감 없이 드러낸 책이기에 단순히 종이 위 활자가 아닌 한 인격체로서의 차열음으로, 사람들에게 눈이 아닌 가슴을 통해 다가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제목에서도 본문에서도 우울이 나를 ‘찾아왔다’라고 표현해 주셨는데요. 이렇게 표현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우울과 나의 관계를 재정립하면서, 마음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확실하게 하고 싶었어요. 보통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문제의 원인을 본인의 탓으로 돌려요. ‘내가 못나서, 내가 남들보다 약하고 부족해서.’ 이런 식으로요. 그래서 더 죄책감이 들어요. 내가 불러들인 우울 때문에 주변을 힘들게 하는 것 같으니까. 하지만 사실, 그 사람들조차 우울을 원했던 적은 없었을 겁니다. 우울은 어디까지나 내 마음에 찾아온 불청객이에요. 다시 말해 우울에 죄책감을 가질 이유도, 자신을 무능하다며 자책할 이유도 없다는 뜻입니다.
대신 내 마음의 주인은 나니까, 마음의 주도권도 내게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우울에 삼켜지지 않고 우울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는 건 바로 이 단계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해요.
청소년기 우울증과 섭식장애의 사회적인 맥락을 고려하면서도, 그것이 동시에 개인적인 성장통의 시간이기도 했다는 점을 생생하게 전하는 책의 내용이 인상적이었어요. 투병의 시간을 겪고 있던 그때의 작가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출간 마지막까지 고민하다 지웠던 문장이 있어요. ‘나의 방황은 나의 기반이 되어(Drift to Draft)’라는 말인데요. 제가 만든 말이긴 하지만 전 이 말이 참 좋습니다. 큰 바다에 표류한 것 같았던 내 인생도 사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항해의 과정이라는 것이요.
어린 날의 저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그때는 어느 것도 위로가 되지 않던 시간이었거든요.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어요.
“인생은 퍼즐 같다는 이야기 많이 들어 봤지? 근데 그 퍼즐이 작품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대. 내가 쥔 퍼즐 조각이 도대체 무슨 그림인지 몰라서 맞추기를 포기해 버리는 거야. 퍼즐은 마지막 하나까지 맞춰 봐야 알 수 있거든. 궁금하지 않아? 네 작품이. 지금까지 꾸역꾸역 맞춰왔던 네 시간과 고통이 억울해서라도 보고 싶지 않니? 우리 같이 보자, 그 미래에서.”
‘어느 날 찾아온 우울증과 거식증은 나를 찾는 과정이기도 했다.’라는 책 속 문장이 마음에 와닿았는데요. 힘들었던 경험들이 지금의 차열음이라는 사람을 만드는 데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궁금합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자기 객관화를 잘하는 사람이 되었고, 사람들을 대하는 관점에 서는 남들의 경험을 조금 더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다고 느껴요.
저는 상담을 통해서 스스로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게 되었고, 그 시간이 저를 성장시켰어요. 제가 어떤 부분에 상처가 있는 사람인지를 확실하게 깨달으니 자연스레 환부에 거즈를 덧대는 법을 알게 된 거죠. 우울과 거식의 경험은 사람을 대하는 부분에서도 큰 도움을 준 것 같아요. 모두가 저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잘 아니까, 상대방의 경험에 더 깊이 공감하고 더 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거죠.
결론적으로 고민하고 고통받던 저의 시간은 어느 것 하나 쓸모없었던 적이 없어요.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에요.
이 책을 쓰신 데에는 작가님의 경험이 힘든 시간을 겪고 있는 또 다른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혹시 작가님께서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위로가 되어 준 책도 있을지 궁금합니다.
윌리엄 폴 영의 ‘오두막’이라는 책을 정말 좋아했어요. 사랑하는 막내딸을 잃은 아빠가 모종의 이유로 신과 함께 오두막에 살게 되면서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받는 이야기인데, 힘든 시간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정말 추천하고 싶은 책이에요. ‘왜 신이 나를 버렸지?’ ‘왜 신은 내게만 이런 시련을 주는 거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어요. 저는 이 대사를 가장 좋아합니다.
“새들은 날기 위해 창조되었고, 너는 사랑받기 위해 창조되었어.”
내밀한 이야기이다 보니 모든 에피소드가 작가님께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혹시 가장 쓰기 힘들었던 대목도 있을지 궁금해요.
부모님이 이기적인 저랑은 친구하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한 대목을 쓸 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정작 책에서는 짧게 다루고 있긴 한데, 저는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나거든요. 나는 그저 사랑받고 싶었을 뿐인데 부모님에게는 내가 그만큼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나의 최선이 고작 그 정도로 평가되었다는 게 저를 좌절시켰죠.
이런 걸 보면 말은 참 무서운 것 같아요. 실수는 누구나 하잖아요. 무심코 던진 돌로 개구리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누가 얼마나 하겠어요? 더군다나 사랑하는 가족한테 말이에요. 탁구공이 네트를 넘어서는 순간 투포환이 되는 게 말의 힘인 것 같아요. 럭비공처럼 어디로 파고들지도 알 수 없어요.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하는 거죠.
우울은 완전한 회복의 문제가 아니라 다만 도닥이는 것이라는 구절이 책에 나오는데요. ‘이따금씩 고개를 드는 해결할 수 없는 감정들’에 대처하는 작가님의 방법이 있을까요?
순간적으로 몰아치는 감정을 잠시 차단하려고 해요. 혹자는 그 방법으로 술을 마시기도 한다는데, 술을 안 마시는 저로서는 좋아하는 음식을 시켜 놓고 혼자 재밌는 영상을 보거나 글을 씁니다. 그러다 보면 쓰나미 같던 감정이 잔잔한 물결로 정리돼요. 물론 이렇게도 해결할 수 없는 감정이라면, 차라리 폭발시키는 것도 방법이에요. 무작정 감정을 눌러 버리는 건 독이 될 때가 있거든요. 저는 집에서 혼자 엉엉 울어요. 몇 시간이고 울면 지쳐 잠들 때도 있고, 갑자기 먹고 싶은 음식이 생각날 때도 있어요. 그럼 그렇게 합니다. 이때는 어린애 달래듯 제가 하고 싶은 걸 다 해주려고 하는 편이에요.
우울한 감정이 오래 지속될 때는, 최소한 자신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려고 해요. 혼자 두지 않되, 혼자 하는 편입니다. 예를 들어 주말에는 어떻게든 나가요. 우울한 상태에서 집에 박혀있으면 백이면 백 더 우울해지거든요.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쓸 힘도 없으니까 혼자 카페에 가서 구석에 박혀 핸드폰을 합니다. 적당히 사람 사는 소리를 들으며 적당히 퍼질러지지 않은 차림과 자세로 앉아 있다 보면 집에 혼자 있을 때보다는 훨씬 나아져요. 추천합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이야기로 독자님들을 만나볼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사회초년생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를 쓰고 있어요. 저는 이제 4년차 햇병아리 회사원인데요. 그래서 재밌는 일이 생기거나 생각할 만한 거리가 있으면 개인 메모장에 적어 두는 편이거든요. 회사생활이 두려운 사회초년생, 졸업과 취업의 경계선에 선 청년들에게 두루 위로가 될 수 있는 글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첫 사회생활의 두려움을 안고 무지의 늪에 빠져 버린 소심쟁이 신입사원. 과연 그녀의 미약한 시작은 창대한 끝으로 마무리될 수 있을까? 어리바리 사회초년생의 좌충우돌 입사 생활과 Z세대 청년의 고민을 담은 에세이!’ 어떤가요?
*차열음 20세기의 마지막 해에 태어난 평범한 20대 여성. 간호학과 재학 중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으로 훌쩍 편입해 문학사로 졸업했다. 현재는 방송사 편성팀을 거쳐 드라마 제작사에서 제작 기획 업무를 하는 4년 차 직장인이다. 시나리오 한 편과 시집 한 권을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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