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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의 시절 리뷰] ‘안고 사는 게’ 약이다 <세월: 라이프 고즈 온>

이슬기 칼럼 2화 - 영화 <세월: 라이프 고즈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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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언제나 역사의 발목을 잡는 건 “그만하자”는 목소리다. 망각한 결과 고통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퇴행이기 때문이다. (2024.04.04)


세상의 행간을 읽는 이슬기 기자의 콘텐츠 리뷰.
격주 목요일 연재됩니다.


영화 <세월: 라이프 고즈 온> 포스터


내가 수습기자였던 2014년은 재난이 참 많이 일어난 해였다.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 사고, 장성 요양병원 화재, 세월호 참사까지. 하루아침에 실종자 가족이 된 이들이 곧 유가족이 되었다가, 뒤이어 유가족대책협의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다. 그들은 아연실색한 얼굴이었다가, 우는 얼굴이었다가, 울 겨를도 없이 결연한 얼굴이 되었다. 누구누구의 엄마, 아빠로 살았던 그들에게는 곧 ‘집행위원장’, ‘사무국장’ 등의 직함이 생겼다.

세월호 참사 10주기에 부쳐 개봉한 다큐멘터리 <세월: 라이프 고즈 온>은 그렇게 살아온 이들에 관한 얘기다. ‘예은 아빠’ 유경근 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팟캐스트 진행을 맡아 다른 참사 유가족들을 차례 차례 만난다. 여기서 1999년 씨랜드 수련원 화재,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등 우리가 이름은 알되 자세히는 모르는 재난이 호명된다. 유씨도 세월호를 겪기 전에는 자신도 그러했노라 고백한다.

참사 피해자 유족으로 마이크 앞에 서게 된 이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서로 건넨다. 씨랜드 수련원 화재로 쌍둥이 딸을 잃은 고석 씨는 세월호 유족들이 청와대 앞에서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낼 때 동참하지 못한 데 대한 부채감을 갖는다. 유씨도 마찬가지다. 일찌감치 씨랜드 화재 같은 참사에 관심을 갖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서로에게 미안한 피해자 가족들과 달리, 영화는 이들이 부딪히는 혐오의 시선도 적나라하게 따라간다. 안산 화랑유원지에 단원고 학생 추모 공원을 조성하려 하자 날아드는 ‘세월호 납골당’이라는 비난, 씨랜드 희생자 추모비를 왜 사고 지역(경기 화성)이 아닌 서울 송파구에 짓느냐는 눈총(사망자 대부분은 송파구 관내 유치원생이었으며, 사고 지역은 사유지라 추모비 조성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대구 지하철 참사 추모 행사에 쏟아지는 인근 상인들의 반대 등이다.

이를 따라가다 보면 ‘왜 우리 사회는 이토록 애도에 인색할까’라는 질문이 머리를 떠나질 않게 된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피해자다움’이라는 폭력적 시선에 맞서, “이제 그만하라”는 공격에 대항해 버텨온 지난 10년을, 영화는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제 한 세기를 넘어가는 일제의 과거사 반성도 공회전만 거듭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일본군 위안부·강제 징용 피해자와 유족들의 눈물은 여전한데, 일본의 반성은 더딘 한편으로 국내에서도 “언제까지 사과해야 하느냐”는 힐난이 날아든다. “잊지 말자”는 목소리를 “역사의 진전에 발목을 잡는다”고 되받아치는 폭력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나 참사 유가족들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언제나 역사의 발목을 잡는 건 “그만하자”는 목소리다. 망각한 결과 고통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퇴행이기 때문이다.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참사 유족들은 각기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두 딸을 씨랜드 화재로 잃은 아버지 고석 씨는 소방 방재학 박사 학위를 받고, 어린이안전교육관을 만든다. 대구 지하철 화재로 딸 상임씨를 잃은 어머니 황명애 씨는 유족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며 20주기를 앞두고 추모 행사를 준비한다. 

이들의 레퍼런스는 뜻밖에 전두환 독재 정권의 무력 진압으로 사망한 고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고 배은심 씨다. 여기서 영화는 사회적 재난과 국가 폭력이 만든 피해의 경계를 더욱 너른 차원에서 무너뜨린다. 사실 사회적 재난도 국가 폭력의 한 형태다. 화재·침몰 사고에 ‘사회적 재난’이라는 이름을 붙은 것은 부실 시설에 허가를 내준 공권력과 구조 과정에서 보여준 무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구조적 참사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고 발생 이후 유족들은 진상규명에 소홀한 정부와 ‘갈라치기’ 같은 정치권의 책동 등으로 다시 한번 폭력에 노출됐다. 사랑하는 자식을 먼저 보냈다는 사실 외에도 이들이 서로를 향해 “내가 다 안다”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배씨는 아들이 살아 있었다면 외면하지 않았을, 사회적 약자들의 집회에 꼬박꼬박 참석해 목소리를 낸다. 이러한 배씨를 레퍼런스로, 참사 유가족들이 더욱 힘을 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들의 삶을 통해, 영화는 “묻고 가자”는 말이야말로 퇴행임을 선언한다. “잊지 말자”는 것이야말로 같은 일을 반복하지 말자는 전진의 구호이기 때문이다. 유씨는 말한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까지, 내 아이는 내 손으로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그런데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내 아이의 친구도 안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그가 지난 10년간 새롭게 만난 ‘우리’라는 세계다.

유씨와 배씨의 문답에서, 그 의미는 더욱 도드라진다. “세월이 약입니까?” 유씨의 물음에 배씨는 “세월은 약이 아니고, 안고 사는 게 약”이라고 답한다. 그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고통을 잊지 않고 ‘안고 사는 게 약’인 한편으로, 아픈 이들끼리 서로서로 부둥켜 ‘안고 사는 게 약’이라는 말로.

영화는 편집이 완성된 후 일어난 이태원 참사를 자막으로 언급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태원 참사도 ‘우리’의 일임을 ‘잊지 말자’는 강력한 요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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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슬기 기자

글 쓰고 말하며 사는 기자, 칼럼니스트. 1988년 대구 출생, 창원 출신. 한양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서울신문》에서 9년간 사회부, 문화부, 젠더연구소 기자로 일했다. 현재는 프리랜서 기자로 《오마이뉴스》에 〈이슬기의 뉴스 비틀기〉를 연재 중이다. 여성의 눈으로 세상의 행간을 읽는 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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