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윤지 “다 사라지고 시 앞의 사람만이 있길 바라며 엮었어요”
『개구리극장』 마윤지 시인 인터뷰
빈 둥지, 물이 가득한 고무 대야에 빠져 죽은 매미, 핏물이 된 강, 빠르고 쉬운 죽음, 너무 오랫동안 떠도는 사람과 광장과 게이트를 오가는 사람들. 창밖을 멀리 보며 앉은 그림자. 세상과 사람의 아주 작은 신음을 들을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 같은 찰나. 그럴 때 시를 쓰게 되어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요. (2024.03.29)
2022년 《계간 파란》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마윤지 시인의 첫 시집 『개구리극장』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마윤지의 시를 이루는 것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물과 장소들이다. 시인이 호명하는 사물들을 만지고 그 장소에 함께 머물고 나면 알싸한 맛이 남는다. 맑고 간결한 시어들이 잃어버린 기억을, 묻혀 있는 것들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언뜻 평온한 세계에 남은 잔상. 그 잔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생생한 유년의 장면들과 해소되지 않은 죽음이 떠오른다. 한 겹 아래 우리가 들여다보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는 인식, 묻어 둔 채 잃어버린 것을 찾아내고 늦지 않게 슬픔을 건져 올리는 손길. 한여름 그늘 아래처럼, 초겨울의 아침 공기처럼 다정하고도 서늘한 마윤지 시의 촉감은 여기에서 온다.
2022년 데뷔한 이후 2년 만에 낸 첫 시집이에요. 첫 책을 낸 소감이 어떠신가요?
기뻐요. 기쁘다고 답할 수 있다는 것도요. 또 두려워요. 근데 시를 쓰면서 두려울 수 있다는 것도 기뻐요.
시집을 낸다는 건 여러 날 썼던 시편들을 모으고 고르고 배치해서 한 권으로 묶는 작업인데요. 그 작업을 하시는 동안 가장 염두에 둔 게 무엇일지 궁금해요.
오랫동안 제 마음에 남아 있는 시들을 떠올려 보면 시를 쓴 시인은 지워지고 시도 지워지고 끝에는 읽는 저만 남아 있어요. 시가 끝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조금 달라진 ‘나’가 있더라고요. 내 시도 지워지는 모양이고 싶다. 읽는 사람의 삶과 닿을 수 있다면 내 시도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다 사라지고 시 앞의 사람만이 있길 바라며 엮었어요. 그런데 역시 멀고요.
시집 제목 ‘개구리극장’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1부에 실린 시의 제목이기도 한데요. “비 오는 날 극장에는 개구리가 많아요/ 사람은 죽어서 별이 아니라 개구리가 되거든요// 여기서는 언제든 자신의 죽음을 다시 볼 수 있어요/ 때로는 요청에 의한 다큐를 함께 보고요” 개구리가 되어 자신의 죽음을 다시 보는 극장. 이 이미지는 어떻게 떠올리신 걸까요? 시집의 제목으로 채택하신 이유도 들려주세요.
극장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자주 훔쳐봐요. 이미지가 떠올랐다기보다는 제가 늘 하던 짓이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왼쪽으로 멀리, 오른쪽으로 스윽. 어딘가에 마음을 쏟고 있는 얼굴의 옆을 천천히 훑는 것이 좋아요. 나는 나의 삶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데, 극장에서는 영화 속 누군가의 매일을 바라보고 보통 그것이 끝나야만 자리를 뜨지요. 그것이 어떨 땐 보살핌 같아요. 변화가, 그 움직임이 꼭 반짝임 같아요. 정말로요. 어느 땐 가슴 한가운데가 ‘반짝’하고 빛나서 흠칫 놀라요. 또 어둠 속에서는 표정을 지우거나 그리는 것이 자유롭고요. 그 풀어짐이 좋아요. 누군가의 천진함, 눈물, 웃음 같은. 우리가 우리를, 더 많은 것을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온전히 영화 속으로 들어갈 때 영화를 만든 사람이나 이야기 속 인물보다도 더 깊은 무엇에 닿게 되는데요. 그런 영화를 보고 나오면 영화 자체에 대한 것보다 영화에 닿아 있는, 더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어요. 제 시집도 누군가에게 그런 경험이기를 바라면서 또 상영관에 같이 앉은 우리가 같고 또 다른 것을 함께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개구리극장’을 택했어요.
이원 시인이 시를 두고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언어”라는 표현을 써 주셨는데요. 그 말대로 추상적인 개념들이 나오기보다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물건들, 사람들 그리고 장소들이 시를 이루고 있어요. 이런 시를 쓰는 시인은 어떤 장면을 보고 어떤 감정을 느낄 때에 시를 쓰는지 궁금해요.
발 딛는 곳에 나의 시가 있는 걸까. 그게 뭘까. 생활에서 잘 느끼고 싶었어요. 잘 더듬고 싶어요. 매일을 들여다보면서 느낀 건 세상은 때때로 잔인하도록 평화롭다는 거예요. 잔잔한 바다처럼요. 무언가 잊어버린 게 있는데 생각이 나지 않아요. 알고 싶어져요. 그런 서늘함을 느끼고 나면 그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렵고, 세상은 그대로인데 저만 변해 있는 것 같기도 해요. 빈 둥지, 물이 가득한 고무 대야에 빠져 죽은 매미, 핏물이 된 강, 빠르고 쉬운 죽음, 너무 오랫동안 떠도는 사람과 광장과 게이트를 오가는 사람들. 창밖을 멀리 보며 앉은 그림자. 세상과 사람의 아주 작은 신음을 들을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 같은 찰나. 그럴 때 시를 쓰게 되어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요.
박혜진 문학평론가가 해설 「유년의 극장」에서 짚어 주었듯 유년 시절을 다루는 시들이 눈에 띄어요. 여름 방학, 운동회, 스키 캠프 같은 단어들이 등장하고요. 저는 “심장의 출발/ 도착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스타팅 라인」의 구절을 무척 좋아하는데요. 이렇게 운동회 날 출발선 앞에 선 어린이들의 긴장과 각오, 더 이상 어른들에게 공유하지 않게 된 꿈, 어린이들의 진심을 담은 약속 같은 것들이 시 안에 담겨 있다고 느꼈습니다. 유년의 정서를 담은 시를 쓰시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감사해요.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만큼 어렸을 때부터 최근까지, 늘 아이들이 많은 곳에서 생활했어요. 성당에서 자라다시피 했고 아무도 없는 불 꺼진 성전 의자에 누워 낮잠을 자기도 했지요. 법적 성인이 되어서는 주일학교 교사로 10년을 지냈고, 청소년 수련원 시설에서 짧게 노동도 했어요. 마당에서 뛰다가 뒹굴고 물에 젖고 해에 타는 얼굴들, 울고 떼쓰고 시무룩한 작은 등, 잠꼬대로 뒤척이는 팔과 다리. 어린이들은 더 솔직하고 덜 솔직하고 예뻐요.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어린이, 중학생이 되어 이사 가는 아이들, 성인이 되어 교복을 정리하는 친구들을 10년 동안 보았어요.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데도 많이 사랑했어요. 안아 보기까지 오래 걸렸고요. 아주 맑은데도 종종 그늘에 혼자 앉아 있는 듯한 작은 사람들도 보았어요. 맑아서 그늘이 더 잘 보였어요. 옆에 앉고 싶다, 내가 모를 걱정이어도 앞머리를 쓸어 올려 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제 유년이고 이 작은 사람의 유년이구나. 너랑 나, 다른 곳에서 같은 유년을 보내고 있구나. 현실적인 시간 여행을 하면서 시편들을 썼어요. 어린이의 시선, 풍경. 그것을 다 지났는데도 영원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생명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세상을 처음 알아 갈 때의 버거움과 끔찍함 그리고 사랑 같은 것일 텐데요. 꼭 유년에 의미를 두었다기보다는 지금의 것들을 최대로 지우고도 남아 있을, 그대로의 아름다움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유년만큼이나 모든 시간은 각자의 고통과 신비로 충만하니까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제가 사랑하고 지키고 싶은 것을 자꾸 말하게 되었다고 밖에는요.
시에서 또 하나 자주 느껴지는 것이 죽음의 감각이에요. 안온해 보이는 세계이지만 한 겹만 들춰 보면 땅 밑에서는 위험한 일들이, 폭력과 죽음이 일어나고 또 잊히고 있다는 인식이 느껴졌어요. 순수한 말들과 다정한 시선 끝에 서늘함이 남는 건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시인이 느끼는 세계는 어떤지 물어보고 싶어요.
고등학생 때 친구들이랑 연천에 밭일을 하러 갔어요. 더위를 식히려고 근처 천에 몸을 담그고 큰 플라스틱 바구니를 튜브 대신 가지고 놀았어요. 졸업하고 몇 년 뒤에 그 천과 천에서 이어지는 강까지 온통 핏물이 되었다는 기사를 읽었어요. 사진 속 강은 너무 달라서, 알아보기 어려웠어요. 열병 유행 때문에 돼지를 마구 생매장했는데 당연히 땅은 그것을 다 소화하지 못 했어요. 물과 땅은 생각보다 훨씬 강한데도요. 아마 소화하지 않은 것일 수도요. 이후에 「연천」이라는 시를 쓰게 되었어요. 써야만 했어요. 「사월」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도, 「黑」도. 지나왔는데 저만이 지나왔고 이곳으로 오지 못한 채 끝나 버린 죽음들을 감히 기억하려 했어요. 변함없이 세상은 제게 너무 아름답고 고통스러워요. 그것을 희망 쪽으로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당겨오고 싶어요. 세상의 고통을 당장 해결할 수 없다 해도요.
끝으로 시집을 읽을 독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앞으로의 계획도 함께 들려주세요.
정말 고맙습니다. 다음 그리고 또 다음의 시를 계속 써 나갈게요.
*마윤지 199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22년 《계간 파란》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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