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누구나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할 권리가 있다 - 김소리 변호사
『타이틀 나인』
변하지 않는 사회에 답답한 마음이 들고 뉴스를 보면 환멸을 느끼는가? 타이틀 나인을 둘러싼 투쟁의 역사를 톺아보면, 그래도 우리 인류는 진보와 퇴보를 반복하지만 결국에는 느리게나마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2024.03.18)
『타이틀 나인』은 미국 교육에서 성차별을 금지한 최초의 법인 ‘타이틀 나인’에 관한 책이다. 타이틀 나인 제정 과정부터 제정 이후 이를 실제 현실에 실행시키기까지의 여정, 어김없이 등장하는 백래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의 퇴보를 막고자 하는 노력과 그 적용 범위를 넓혀 소수자를 보호하고 교차적 차별에 대해서도 고려하는 섬세한 시도들까지 ‘타이틀 나인’ 제정 이후 50년 역사를 다룬 책이다.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평범한 여성 ‘버니스 샌들러’는 남성 동료들에 비해 교수 채용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데,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애당초 여성을 뽑지 않으려는 구조적 문제임을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이를 시정할 수 있는 법적 근거인 행정명령을 찾게 되었다. 이 행정명령은 연방정부와 계약을 체결하는 계약자에게 성차별 금지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대학은 연방정부와 계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의 성차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된다. 샌들러는 이에 근거해 정부에 진정을 넣었고, 이렇게 교육계 성차별에 맞선 싸움이 시작된다. 한편, 법이 아닌 행정명령은 대통령이 바뀌면 언제든 바뀔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행정명령은 연방계약을 체결하지 않는 규모가 작은 소규모 대학이나 고등학교까지의 교육기관의 경우 적용되지 않으며, 그 적용 범위 역시 고용에만 한정되므로, 행정명령으로는 교육계에 만연한 다양한 성차별에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법 제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마침내 1972년 ‘성별을 이유로 연방정부의 재정지원을 받는 모든 교육 프로그램 또는 활동에서 제외되거나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차별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타이틀 나인’ 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장구한 성차별의 역사가 이렇게 쉽게 청산될 리 없다. 실제 법 시행을 위한 시행규정이 발효되는 데 3년이 걸렸다. 또 시행규정이 만들어졌어도 정부가 이를 제대로 집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데(고용노동부의 근로감독관이 있지만, 이들이 제대로 일하지 않으면 일터에서의 불법이 시정되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타이틀 나인 제정을 주도한 여성들은 제대로 된 법 집행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에도 엄청난 노력을 쏟았다. 정부에 따라 타이틀 나인 집행 사무국 직원이 늘었다 줄었다 했으며, 적극적인 법 집행을 위해 나서지 않았다. 정부가 이 모양이면(?) 법 수범 당사자인 교육기관 역시 나몰라라 하게 되므로, 여성들은 줄기차게 실효성 있는 법 집행을 요구하며 교육기관이 움직이도록 했다.
본래 고용에서의 성차별 문제로 시작했던 타이틀 나인은 그 적용 범위를 점점 넓혀 나가는데, 스포츠 분야에서의 성차별, 성폭력 문제까지 나아가게 된다.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고등교육에서 스포츠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과 참여가 높아서인지 스포츠 분야에서의 성차별 시정 노력이 상당했는데, 필자는 이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타이틀 나인 집행 사무국은 대학에 ‘공평한 스포츠 참여의 3대 요건’을 제시하며, 이 중 하나를 이행할 경우 타이틀 나인의 스포츠 관련 시행규정을 준수하는 것으로 본다고 했다. 3대 요건은 (1) 재학생 전체의 성비에 상당히 비례하게 스포츠 참여 기회를 제공할 것, (2) 과소대표된 성을 위해 스포츠를 개선해 온 전력과 꾸준한 실천이 있었음을 보여줄 것, (3) 제공된 스포츠 프로그램이 과소대표된 성의 관심과 능력에 부합한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필자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과 내에 농구, 야구, 축구 동아리가 있었는데, 운동을 좋아하는 필자 역시 한 곳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동아리들을 살펴보니 운동은 남성만이 하고, 여성은 ‘매니저’(경기 준비와 응원을 주로 담당하는 것으로 보였다)를 하는 것으로 역할이 구분되어 있었다. 요즘은 변했는지 그대로인지 모르겠지만 당시 이를 보고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운동이 좋아서 가입하려고 하는데, 왜 여성은 매니저 역할만 부여받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물론 타이틀 나인은 학생들의 자치활동이 아닌 대학 당국에 의한 스포츠팀 운영에 대한 규범이지만, 스포츠에 있어 주된 참여자를 남성으로 상정하고 여성을 부차적으로 대우하는 것에 대한 시정 노력이었다는 점에서 아직까지 대학가에 필자의 경험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면 반드시 바뀌어야 할 부분이라고 하겠다.
한편, 성폭력 문제에 있어 타이틀 나인은 더욱 획기적인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타이틀 나인은 학생들이 성폭력으로 인해 학습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할 의무를 대학 당국에 부여하는 것으로, 타이틀 나인 조정관을 지정하고, 차별금지 방침을 배포하고 고충처리 절차에 대한 정보를 알려야 한다는 등의 의무를 학교 당국에 부과한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학교에서 성폭력 문제를 다룰 때 성폭력을 주장하는 측에 적용되는 증거 원칙에 대한 부분이다. 타이틀 나인 집행에 있어서는 형사사건에서 유죄 판결을 내리는 법관의 심증 기준인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의 증명’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되고(상당히 높은 수준의 증명 정도이다), 이보다 낮은 수준인 ‘우세한 증거의 원칙’이 적용된다. 이는 대체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에 따라 물적 증거가 부족할 수 없고, 피해자 진술밖에 없을 수밖에 없는 점을 받아들인 데 따른 것일 텐데, 적어도 학교 당국에서는 형사재판에서 요구되는 수준의 증명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당시 여성들은 학내 성폭력 사건이 경찰서로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 역시 위와 같이 사법절차에서는 높은 수준의 증명을 요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물론 이 외에도 미국의 경우 경찰의 인종차별 문제가 심각하여 피해자가 유색인종인 경우 제대로 된 수사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뢰가 없기 때문도 있는 듯하다).
실제 대학 당국이 이와 같은 요구사항을 성실히 이행했는지는 또 다른 문제지만, 필자는 타이틀 나인 사무국에서 위와 같은 기준을 설정했다는 사실 자체에 꽤 놀랐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상황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학에는 대부분 ‘인권센터’가 있고, 이곳에서 성폭력 문제도 관할한다. 그런데 실제 대학 인권센터가 사건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미국과 마찬가지로 학교 당국의 소극성이 여전할 뿐만 아니라(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조사위원들의 전문성도 부족하여 피해자들이 신고 과정에서 인권센터로 인해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히려 법률가들은 피해 학생에게 인권센터 신고를 통해 학내에서의 해결을 권유하기보다는 차라리 법률전문가로부터 판단을 받는 것이 낫다고 보아 경찰에 신고할 것을 권유하게 된다. 필자는 어느 지역의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이기도 한데, 학생들에게 성폭력에 대한 특별한 교육이 이루어지는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심의위원을 대상으로 성폭력 사안 처리에 대한 교육을 행하지도 않는다(성폭력은 다른 학교 폭력과는 달리 특수성을 갖기에 반드시 이에 대한 특별 교육이 필요하다). 심의위원들은 성폭력 사안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한 상태에서 사건을 처리할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심의 현장에서 성차별적 발언과 2차가해성 발언이 나오기도 한다. 결국 필자와 같은 법률전문가인 심의위원에 의존하여 처리하게 된다. 실제 필자는 심의위원들의 성폭력 사안 몰이해와 그에 따른 성차별적 발언에 대해 교육지원청에 강력히 항의한 바 있다(해당 심의위원에 대한 주의조치 및 성인지감수성에 대한 교육을 실시할 것을 요구했고, 다행히 교육지원청은 필자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필자가 속한 심의팀에 대해서는 필자가 만든 자료를 기초로 성인지감수성 교육을 간단히 진행했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문제에 관해 특별한 기준을 세우고 이를 근절하려는 노력이 많이 부족하다.
타이틀 나인은 누구나 성차별과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도록 그러한 환경을 만들 의무를 학교 당국에 부과하는 법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즉, 타이틀 나인은 성범죄 가해자를 단죄하는 데서 나아가 우리 모두 성폭력을 방지할 환경을 조성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선언하고,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기준을 설정한다. 또, 타이틀 나인은 교육계에 적용되는 법이지만, 교육과정에서의 경험은 향후 사회에 나아가 살아갈 때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청소년, 대학생 시절 우리 모두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학습하는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당한 피해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피해임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경험이자 부끄러워할 사람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는 경험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을 안고 사회에 나간다면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의 경험과 실천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들의 경험이 모이면 사회는 변할 수 있다.
책은 타이틀 나인이 제정된 1972년 이전 시기부터 매우 최근인 2022년에 이르기까지 타이틀 나인의 50년 역사를 다루며, 이와 더불어 향후 과제까지 폭넓은 내용을 담고 있다. 변하지 않는 사회에 답답한 마음이 들고 뉴스를 보면 환멸을 느끼는가? 타이틀 나인을 둘러싼 투쟁의 역사를 톺아보면, 그래도 우리 인류는 진보와 퇴보를 반복하지만 결국에는 느리게나마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좌절하지 말자. 우리가 내야 할 목소리를 내고 해야 할 행동을 한다면 우리 사회는 변한다.
*필자 | 김소리 법률사무소 ‘물결’의 변호사이자 ‘밝은 책방’의 대표.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밝은 책방’은 여성인권, 노동권, 주거권, 장애인권 등 공익과 인권을 주제로 한 책을 만날 수 있는 독립서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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