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마음과 이별하고 나와 소중한 이를 살리는 법
『처음 만나는 정신과 의사』 백종우 작가 서면 인터뷰
사실 인간은 우울, 불안, 분노 이런 감정들이 기본적으로 싫습니다. 그 감정을 별로 경험하고 싶지 않죠. 하지만 사실 이미 우리는 우울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거든요. (2024.03.18)
현대인에게 우울증은 감기처럼 찾아올 수 있는 흔한 증상이다. 현 상황이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나눌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지만, 마음 기댈 곳이나 마음 나눌 사람 하나 없다면 더 힘들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붙잡아 주길 바라며 생의 경계선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정과 직장 내 인간관계, 우울증, 트라우마 등으로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지만 정신과 문을 선뜻 두드리기 어렵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어 괴롭다. 『처음 만나는 정신과 의사』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처음 만나는 정신과 의사』는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KBS1 <아침마당> 등 다양한 방송 매체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 중인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첫 단독 저서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데 앞장서고 있는 백종우 교수는 환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얻은 깨달음과 지혜, 삶의 경험을 이 책에 녹여냈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사실 정신건강의 문제는 누구나 인생의 한 시점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이고, 또 그게 정신건강의 어떤 문제이고 치료가 필요한 질환이 있느냐에 따라서 각기 다른 대처가 필요한데요. 정신과의 첫 문턱을 넘는 게 생각보다 그렇게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보통 그 문턱을 넘은 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때 알고도, 때로는 몰라서 많은 고민을 하고 주저했던 분들을 만나면서 이분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책으로 엮게 되었습니다.
우울증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많은데, “우울감은 지금까지의 궤도를 수정하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고 한 책의 내용이 기억에 남습니다.
사실 인간은 우울, 불안, 분노 이런 감정들이 기본적으로 싫습니다. 그 감정을 별로 경험하고 싶지 않죠. 하지만 사실 이미 우리는 우울을 통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거든요. 예를 들면 우리 집 큰애는 아무리 시험을 망쳐도 중고등학교 때 전혀 우울해하지 않았거든요. 부모가 우울할 수는 있지만요. 근데 사실 시험을 망쳤을 때 우울해야 ‘왜 이렇게 점수를 못 받았지? 다음에 어떻게 하면 잘 볼까? 그래 오늘은 공부하자’ 이렇게 계획을 수정하고 행동을 바꾸는 일련의 변화가 시작되거든요. 물론 이걸로 스트레스를 받으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우리 인생에서 뭔가가 기대 이하일 때, 생존을 위협받을 때, 뭔가가 잘못되었을 때 분노가 일어날 수 있는데 이게 역기능도 있지만 분명히 순기능이 있습니다. 우리가 코로나 3년 동안 불안 때문에 손 씻고 마스크 쓰고 살았듯이요. 분노는 어떤 잘못된 시스템을 고치는 좋은 계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우울을 통해 우리 뇌에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신호를 보내는 거죠.
나와 주변 환경을 다시 돌아보고 외부를 바꿀 건지 나를 적응시킬지 결정하는 데 우울이 큰 도움을 주는데, 이런 감정 시스템이라는 게 최소한 영장류, 원숭이 정도는 되거나 인간과 오랫동안 관계를 맺는 반려견 정도는 돼야 비슷한 현상을 나타나거든요. 그래서 인간이 경험하는 굉장히 커다란 고통 중 하나인 우울증은 때로는 사람의 생명을 잃게 할 수도 있지만 이걸 또 잘 극복하면 우리 삶에서 이전에는 못 보던 걸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울증 첫 치료가 6개월, 길면 1년 이상 하는 분도 있지만 끝나는 날이 제일 좋은 날이죠. 그날 환자분들한테 ‘우울증이 없었으면 좋았겠지만 우울증을 통해서 얻은 게 있으십니까?’ 하고 물으면 열이면 열, 백의 백 명이 다 있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재밌는 게 있는 걸 여태 모르고 살았어요. 누가 나한테 소중한 사람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때는 너무 큰 꿈을 좇고 살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여기에 만족하면서 살 수 있게 됐어요.’ 우울이라는 신호는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우리가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계기를 제공하는 선물이 될 수도 있기에, 결국 우울증을 극복하는 것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까를 책에서 다루려고 했습니다.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진 고 임세원 교수와의 일화가 인상 깊었는데요.
고 임세원 교수는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강북삼성병원 교수로 저의 동기이자 절친이었습니다. ‘보고 듣고 말하기’ 같은 한국형 표준 생명지킴이 교육을 같이 만들고 대부분 일도 같이 했는데 안타깝게도 2018년 마지막 날 환자에 의해서 사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환자들이 비난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고인의 유족이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편견과 차별 없이 쉽게 치료와 지원을 받는 사회가 고인의 유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고인이 가장 사랑했던 환자들이 이 일로 비난받는 것을 유가족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많은 국민이 마음을 함께 해주셨고 실제 국회에서도 임세원 법이 통과되었습니다. 또한 마지막 순간에 의료인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다른 환자와 동료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한 것을 인정받아서 의사자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돼 있습니다. 고 임세원 교수와 책 작업을 같이 할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의 바람처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편견과 차별 없이 쉽게 치료와 지원을 받는 사회로 한 걸음 내딛는 데 도움을 주고 싶어 이 책을 내게 됐습니다.
본문 중에서 ‘환자는 가장 좋은 스승이다’라고 말씀하신 부분이 많이 와닿았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시다면?
기억에 남는 분이 한두 분이 아니지만 특히 어떤 분들은 증상이 너무 심각하고 주위를 둘러싼 환경이 힘들어서 ‘아 너무 괴롭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혹시 더 잘 치료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환자분이 느끼는 절망감만큼 제 마음속에 절망감이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무력감 그리고 이제 더 도와줄 수 없을 것 같다는, 뭔가 잘못한 것 같다는 죄책감을 느끼는 어려운 상태의 환자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러다 상당히 시간이 지난 어느 날 환자분이 극복하고 상태가 좋아지면 ‘함께했다’는 보람이 큽니다. 제가 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게 정신과 의사들의 특권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고요. ‘우리는 포기할 수 있는 권리는 없구나’ 그리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라는 걸 거꾸로 환자분들이 가르쳐 주곤 합니다. 때로 앞이 안 보이는 터널에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어느 시점이 지나면 분명히 희망이 보이는 시기가 올 수 있고, 그렇기에 이들과 함께 가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경험을 하루 하루 하게 되는 게 가장 큰 보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보면 환자들에게 영향받는 간호사들이 나오는데요. 온종일 환자들을 만나면서 감정적인 동요가 없을지 궁금합니다.
우울한 사람, 트라우마 겪은 사람을 만나면 저희 마음 안에도 비슷한 반응이 일어나는 건 사실입니다. 정신과 진료의 특성상 아무리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려고 해도 자신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과에서 근무하는 의사나 간호사, 심리학자, 사회복지사 선생님들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시점에서는 자기 문제가 건드려질 수 있거든요. 또 환자를 잃거나 진료현장에서 마주하는 트라우마도 소진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걸 동료 상담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좀 더 경력 있는 분한테 받는 경우는 수퍼비전을 받는다고 합니다. 누구나 이러한 트레이닝 시스템을 통해서 자기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도움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친구를 잃고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동료상담으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는 정신과 의사든 의료진들이든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태원 참사 때도 그렇고, 한국 사회에서 ‘애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는 아직 트라우마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합니다. 마음을 다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지, 그들에게 다시 상처를 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교육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요. 유가족의 아픔을 애도하는 과정,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재난과 트라우마를 접하면 사람들은 이 광경이 유발하는 마음의 불안과 우울, 분노가 싫습니다. 그 감정이 때로 가장 위로받아야 할 유가족과 생존자에 대한 비난으로 바뀌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또 피해자와 가족들은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서 정신적 타격을 받고 괴로워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의사로서 치료하면 뭘 하나 싶을 때도 있어요. 회복을 위한 오랜 노력이 하루 만에 댓글로 무너지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사람을 말로써 죽일 수도 있다는 걸 새겨야 합니다.
미국이나 호주에서는 ‘트라우마 감수성 교육’이 한국의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처럼 의무화되고 있습니다. 해외처럼 피해자와 유가족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애도할 수 있도록 인정해야 하고, 사회가 애도를 통해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최근 ‘묻지 마 범죄’ 등으로 정신질환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높아지기도 했는데요. 정신질환자들이 편견에 시달리지 않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려면 사회와 정부, 그리고 개인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사실 조현병은 세계 어느 나라나 0.5~1%의 국민이 겪는 질환인데 조현병 환자의 삶은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느냐에 따라 매우 달라집니다. 오히려 농경 사회가 낫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가족이나 공동체에서 책임졌는데 핵가족화, 1인 가구 시대가 되면서 아픈 사람들이 방치되고 있습니다. 조현병이나 중증 정신질환자 대부분은 선량한 분들이고 특정 시기에 망상이나 환청에 의해서 증상이 악화될 때는 치료를 통해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발생했던 조현병이나 중증 정신질환 관련 사고는 방치되어 혼자 살거나 아니면 부모 중 한 분만 모시고 있는 집에서 대부분 발생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 자체는 조현병 자체가 아니라 이걸 둘러싼 시스템입니다. 이들은 아픈 사람이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열악한 시스템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이 언제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정신건강 시스템이 있어야 이웃 중에 중증 정신질환자가 있어도 안심하고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이분들도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거든요. 그동안 우리나라는 중증 정신질환자의 입원을 결정하거나 병원으로 이송하는 것뿐 아니라 나머지 경제적 부담을 전부 가족이 져 왔습니다. 해외에서 정부, 지자체를 중심으로 찾아가는 서비스를 만들어간 것처럼 우리나라 역시 시스템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시작되고 있으며, 이런 변화가 앞당겨질수록 조현병이나 중증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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