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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재의 사랑하는 시] 한 가지에 만 가지 꽃이 피네
고명재의 사랑하는 시 10편
비록 언어는 불완전하지만, 우리가 피울 수 있는 것도 결국 언어이기에 우리는 계속 말하고 시를 쓴다. 언어는 우리가 피우는 ‘생각의 꽃’이다. (2024.03.15)
시인의 사려 깊은 시선을 통해, 환한 사랑의 세계를 만나 보세요. |
수박 단내처럼 부드럽고 은은한 것. 맹렬하되 어딘가를 찌르지는 않는 것. 은근한데 밝은 것. 희미하지만 강한 것. 일상을 우아함으로 바꿔버리는 것. 익숙한 듯 생경하게 번져오는데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 눈을 감고 집중하면 되살아난다. 콧잔등에 젖은 꽃잎을 얹은 것처럼 차고 맑은 것이 번진다.
이것은 요즘 우리 동네에 만개한 ‘매화 향기’에 관한 서술이다. 최근에는 매화가 앞다투어 피는데 향기가 너무 아득해서 종일 걷고만 싶다. 그러나 나는 도무지 이 향기를 전할 방법이 없다. 언어는 늘 빈약하며 초라하다. 아름다운 대상 앞에서 언어는 늘 미끄러지는데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자주 이런 경험을 하곤 한다. (그래서 별수 없이 사랑해 사랑해, 텅 빈 말만 반복하기도 한다.)
결국 아무리 언어를 세밀하게 사용한대도 우리는 완전한 ‘정확함’에 가닿을 수 없다. 실제로 이 글의 첫 문단만 봐도 그렇다. 저 문단은 ‘매화 향기’에 관한 서술이 아니라 ‘시詩’에 관한 서술일 수도, ‘등대의 불빛’에 관한 은유일 수도, 더 나아가 좋은 품종의 차를 마시고 ‘다향茶香을 즐기는 과정’에 관한 서술일 수도 있다.
운율 따위 난 아무래도 좋다. 나란히 선
나무 두 그루가 똑같기란 드문 일.
꽃들이 색을 지니듯 나는 생각하고 쓰지만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덜 완벽하다
왜냐하면 온전히 외형만으로 존재하는
자연의 단순성이 내게는 없기에
나는 본다 그리고 감동한다,
물이 경사진 땅으로 흐르듯 감동하고,
내 시는 바람이 일 듯 자연스럽다……
- 알베르투 카에이루 (페소아의 이명 중 하나), 「양 떼를 지키는 사람」 중에서
(페르난두 페소아,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김한민 옮김, 민음사)
그러니까 “꽃들이 색을 지니듯” 우리는 “생각하고 쓰지만 /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식”이 늘 “덜 완벽하”기에 우리는 언어-사용에서 빈곤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꼭 절망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시를 읽고 나면 “자연의 단순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즉 우리의 세계는 언제나 언어보다 더 또렷하다. 작은 매화 한 조각이 두꺼운 철학서나 시집보다도 아름답다. 시인은 이런 “자연의 단순성” 앞에서 “내 시”가 “바람이 일 듯 자연스럽”기를 바란다. 비록 언어는 불완전하지만, 우리가 피울 수 있는 것도 결국 언어이기에 우리는 계속 말하고 시를 쓴다. 언어는 우리가 피우는 ‘생각의 꽃’이다.
페소아 하면 우리는 이명(異名)부터 떠올린다. 그는 평생 다른 이름으로 시를 짓고 발표하면서 전혀 다른 스타일의 시를 써낸 사람이다. “이명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130여 개 이상까지도 셀 수 있지만, 페소아 스스로 내린 정의를 엄격히 따른다면 세 명에서 여섯 명 정도가 그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김한민, 위의 책 중에서) 그는 실제로 각각의 이명에 실제성을 부여했다. 비록 상상에 의한 것이지만 그들 각각의 직업과 삶, 태도와 호불호, 저마다 다른 유년 시절, 성격, 취향, 사고방식 등을 설정했다. 당연히 이들의 시도 각각의 성격에 따라 전혀 다른 스타일을 드러내고 있다. (심지어 자신이 만든 상상 속의 시인들끼리 논쟁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는 왜 이렇게 다양한 이름을 썼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가 ‘시인’이라서 그랬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시인은 ‘나무’를 ‘나무’라 부르는 것(답습)이 아니라 “나무 두 그루가 똑같기란 드문 일”이라는 걸, 어떻게든 말하고 싶은 사람이다. 정확히 똑같은 매화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 정확히 똑같이 생긴 고양이는 한 마리도 없다. 자연계의 모든 것은 ‘특수-개체’이며 우리는 이를 전부 구별해서 부를 수 없기에 ‘매화’라든가 ‘꼬랑이’와 같은 특정한 언어(이름)로 한정하여 지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들은 개별적인 것의 존재성을 어떻게든 표현해 내려고 한다. 그러니 ‘다양한 존재’가 탄생하는 것이다. 페소아는 바로 그 ‘내 안의 얼굴들’, 그러니까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내 속의 다양성을 이명이라는 꽃으로 피운 게 아닐까.
물론 기존의 언어는 규칙 안에서 만들어진다. [꽃]은 ‘꽃’을 뜻하고 [하늘]은 ‘하늘’을 뜻하고 [고명재]는 ‘고명재’를 지시해야만 한다. 이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토대다.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은 (특정한 개념을 똑같이 지시한다는) 일종의 사회적 신뢰를 바탕으로 가능해진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고명재]가 ‘차은우’님을 뜻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만약 이렇게 언어를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사회’는 순식간에 붕괴할 것이다. 지폐의 단위를 저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결국 언어(상징)는 ‘약속의 체제’이며 상대에 대한 ‘믿음-체제’ 위에서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런 언어의 운용은 사실 지겹기도 하고 때로는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고명재’말고 다른 이름으로 살면 어떨까. ‘오은’, ‘양장피’, ‘강동원’ 같은 이름으로 살았더라면 나는 좀 더 다른 시를 쓸 수 있었을까. 페소아처럼 다른 이름을 상상해 보자. 내 이름이 만약 ‘호박고구마’였다면? 내 이름이 만약 ‘코코명재샤넬’이었다면. 이렇게 ‘정해진 이름’을 잠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시각과 자유를 쟁취할 수가 있다.
그래서 시라는 장르가 어렵게 느껴진다. 시 속에서 언어는 제 자리를 벗어나니까. 시는 반反체제를 꿈꾸는 언어의 춤이자, 새-의미를 만들어 보려는 말들의 파도다. 이를테면 시 속에선 ‘감자’가 ‘존재의 무게감’이 될 수도 있고 ‘사랑’이 될 수도 ‘기억’이 될 수도 ‘시’가 될 수도 있다.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없기에 자유도는 높고 그 의미는 무한해진다. 아래의 너무나도 아름다운 시처럼.
슬픈 감자 200그램을 옆으로 옮깁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을 신발장 앞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다음날엔
슬픈 감자 200그램을 거울 앞으로 옮깁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을 옷장에 숨깁니다.
어젯밤엔
슬픈 감자 200그램을 침대 밑에 넣어두었습니다.
오늘밤엔
슬픈 감자 200그램을 의자 밑에 숨깁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슬픕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딱딱하게 슬픕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알알이 슬픕니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 박상순, 「슬픈 감자 200그램」, 난다
무슨 감자 타령이야! 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이게 ‘시’라는 장르가 확보하는 ‘한 뼘의 자유’다. 이 한 뼘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우리의 호흡 기관(콧구멍, 입)도 실은 한 뼘보다 작지 않은가. 의미의 구멍을 만들어 내는 일. 새로운 틈을 만들어 의미를 생성하는 일. 시는 그렇게 굳은 언어를 새롭게 뚫는다. ‘감자’가 늘 노랗고 먹음직한 사물로서 지시되었다면 이제 이 시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튀어 오른다. 마치 재즈가 원곡(원형)으로부터 적절하게 일탈하는 것처럼, 시는 원의(原意-원래의 뜻)부터 적절히 벗어나려고 한다. 이 시에서 “감자”는 potato라는 의미를 품은 채로, 자꾸만 다른 의미를 넘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를 한번 읽어볼까? 우선 화자는 왜 “감자”를 시의 대상으로 삼은 것일까. “감자”라는 말은 참 이상하다. 나의 경우는, 어릴 때 친구들과 놀이를 할 때 짝이 맞지 않는 경우에는 ‘내가 감자가 될게’하고 게임 밖으로 빠져서 기다리곤 했다. 예외이되 속하고, 속했지만 참여할 수 없는 어떤 잉여적 존재가 되는 느낌. 나에게 감자는 그런 단어인데, 이 시는 그런 ‘감자적 기분(?)’을 느끼게 한다. 먹고 찌고 굽고 튀기는 (효용론적인 의미에서의) 감자가 아니라 ‘감자’라는 말의 느낌과 물성을 다시 생각하는 것. 그러니 이 시를 읽을 땐 ‘감자’를 마음껏 굴려보자.
그런데 또 한 가지, 이 시에서의 감자가 “슬픈 감자”이며 게다가 “200그램”이라는 점은 정말 의뭉스럽다. 아니 감자면 감자지, “슬픈 감자”라니! 이 (감자 특유의) 목 막히는 느낌은 뭘까. 게다가 정말이지 “200그램”은 너무나 애매하다. 도대체 이 정도의 감자는 어디에 쓸 수 있을까. 무시하자니 200그램은 꽤 묵직해 보이고, 심각하게 고민하자니 유난을 떠는 것 같다. 호주머니에 넣기에는 애매하고 “신발장, 거울, 옷장, 침대 밑, 의자” 그 어디에 놓아도 “슬픈 감자 200그램”은 정말이지 거슬린다!
누구에게나 그런 것이 있지 않을까. 오래된 일일 수도, 당면한 감정일 수도, 해내야 할 사랑일 수도 지나간 고통일 수도 있다. 그런 “슬픈 감자”가 “200그램”의 무게로 존재한다. 묘하게 읽을수록 슬퍼지는 시다. 처음에 화자는 이 감자를 “옆으로 옮”긴다. 정면으로 마주하기보다는 조금 비켜선 채로 이것을 곁눈질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발장”에 두거나 “거울 앞”에 두고 화자는 점점 감자를 면밀하게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본격적으로 이 감자가 의식되지는 않는다. 1연에서 감자는 현관 주변(신발장, 거울)에나, 그러니까 언제든 바깥으로 내쫓을 수 있을 만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감자의 습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감자는 점점 내밀한 곳(집의 안쪽)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2연에서 감자는 “옷장에” 숨겨지고 더 나아가 “침대 밑”으로 옮겨지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제 이 감자가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장소에 “숨기”게 되는 그 무언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숨길 대상’이 된다는 것은 (1연에서처럼) ‘옮길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이제 이 “슬픈 감자 200그램”은 단순한 사물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꽤나 심각한 것이 되어버렸고 본격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이렇게 감자는 어느덧 현관에서 안방으로 소리 없이 이동해 온 것이다. 마음으로 치면 주변부에 있었던 “200그램” 따위가 어느새 나의 중심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침대 위에서 계속 의식하게 될 만큼)
결국 화자는 “슬픈 감자 200그램”을 정면으로 보기 시작한다. 이제 3연에서 화자는 더 이상 옮기거나 숨기지 않는다. 외면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챈 것일까. 감자는 이제 말 그대로 “슬픕니다.” 그것은 “딱딱하게 슬픕니다.” 그리고 그것은 “알알이 슬픕니다.” 이 감자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처음에는 밀쳐두고 싶고 외면하고 싶었던 ‘감자’가 (1연) 어느덧 나의 내밀한 곳까지 들어와 버렸고(2연) 그것은 이제 피할 수 없이 마주 해야하는 것이다. 화자는 스스로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감자는, 슬프다. 딱딱하게 확고부동한 형태로 정말이지 알알이 슬프다.(3연)
이제 이 감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것은 마지막 연처럼 비워둔 채로 무한히 열린다. 누구에게나 이런 무시하기 어려운, 그러나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애매한 슬픔이나 감정이 있을 것이다. 이런 시를 읽고 나면 감자가 다시 보인다. 얼른 한입에 먹어 치울 수도 있는 사물이지만, 때때로 그것은 도무지 삼켜지지 않는다. 내게도 그런 보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이 몇 있다. 그들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럴 때 우리는 시를 쓴다. 이처럼 시는 ‘기존의 말’을 ‘특수한 말’로 바꿔서 의미를 새롭게 재편한다.
물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밀한 슬픔을 “슬픈 감자 200그램”이라고 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에서는 한시적으로 그런 언어의 사용이 가능해진다. “슬픈 감자 200그램”은 시인이 쓰지 못한 시일 수도, 해내지 못한 사죄일 수도, 납득 불가능한 고통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건 200그램도 무게라는 것. 이 무게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이 시를 자세히 읽어보면 어제 오늘의 개념은 희박하다. 이 무게는 오래도록 나의 생애와 함께 굴러갈 것이다.
끝으로 정말이지 상큼하고 명랑한 도약의 시 한 편을 함께 읽어보자. ‘감자’를 넘어서서 고유명사인 ‘이름’을 새롭게 갱신하는 시.
임지은을 부르자 세 명이 일어난다
이름이 같다는 건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입은 사람을
정류장마다 마주치는 일한 반에 이름이 같으면 이름 뒤에
알파벳을 붙이거나
지은 a, 지은 b, 지은 씨성과 첫번째 글자까지만 불리거나
임지, 김지, 박쥐특징을 찾아낸다
큰 지은, 안경 지은, 까만 지은그렇게 지은은 지은을 양산해내고 지은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착한 지은
거짓말을 좀 섞을 줄 아는 지은
진담과 농담의 차이가 그게 그건 줄 아는 지은없는 지은을 창조해내기 시작한다
상처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지은
잘 아물어요,가 많은 지은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지만
남기고 싶은 게 없어서
이름에게서 나를 뺏어 오기로 한다나를 잃어버린 임지은은
어째선지 아직도 임지은이지만
지은이를 부르자 누구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임지은, 「모두 다른 지은」 (『때때로 캥거루』, 문학과지성사) 전문
학교 다닐 때 학생을 번호로 부르는 선생님들을 싫어했다. ‘2번, 오늘은 2번이 이거 읽어봐’. 무언가 ‘나’라는 사람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교육되어야 할 대상 중 하나로 다루는 기분. 그 와중에 고유명사인 ‘명재’를 기억해 주는 선생님들이 있었다. 그런 선생님들은 학생을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독특한 표정을 지닌 ‘한 사람’으로 마주해 주었다. 고유명사는 바로 그런 때 쓰인다. 수많은 인간의 무리 속에서, 내가 ‘너’를 구분하여 ‘인지’하고 있다는 표시. 이처럼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개체’를 존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살뜰해진다.
그런데 때때로 이름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름이 같다는 건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입은 사람을 / 정류장마다 마주치는 일” 정말이지 이런 일은 난감하고 어쩐지 부끄럽기도 하며 심지어 이런 이유로 (같은 이름들끼리) 친해지지 않는 경우도 보았다. 우리는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그건 ‘나만의 이름’(특수 개체를 지시하는 고유명사)이 ‘나를 지칭’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눈부신 점은 이럴 때 우리는 기어코 ‘지은’을 구별해 낸다. 우리는 마술사처럼 ‘새로운 언어’(시)를 만들어낸다. 같은 “지은”들 사이에서 ‘특별한 너인, 지은’을 찾아내는 것. 이 시는 그 상황을 촘촘하게 그리고 있다.
시의 초반부는 마치 출석부에서나 표기할 법한 방식으로 지은들을 구별해낸다. 이를테면 “a,b”를 덧대는 방식으로(여기서 –씨가 붙는 대목은 너무 귀엽다). 그런데 이런 구분은 좀 기능적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들은 “임지, 김지, 박쥐”로 성씨를 붙여 구분하기도 하고 여기서 더 나아가 이제 “특징을 찾”고 각각의 지은들의 특수성에 주목하게 된다. 이 대목이 묘하게 아름답다. “지은은 지은을 양산해내고” 사람들은 “지은을” 선택해서 부른다. 그래서 이제 이 시 속의 지은이들은 알파벳이나 성씨나 작은 특징들을 붙이는 걸 넘어서서, 각기 다른 ‘내면을 지닌 지은’이들을 발견해낸다. (처음에는 형식적인 이름의 구분이었던 시가 이제 후반부에서는 서로 다른 마음과 상처를 읽어내는 ‘지은-읽기’로 확장되고 있다.)
그러니까 비록, 너에게 주어진 이름은 그 흔하디 흔한 ‘지은’이지만, 사람들은 “이름에게서 나를 뺏어”낼 수 있다. 결코 흔한 ‘지은’으로 너를 내버려 두지는 않겠다는 것. 시는 기어코 ‘너의 이름’을 새롭게 확보해 내는 것이다.
내가 아는 ‘고명재’ 중에는 기타리스트가 있다. 내가 아는 또 다른 고명재는 ‘횡성 축협 조합장’에 재선되기도 했다. 내가 아는 또 다른 고명재는 아이스하키 12세이하부에 출전하여 분전했다고 한다. 이는 모두 검색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이다. 시를 쓰든, 기타를 치든, 축협 조합장이 되든, 빙판 위에서 멋지게 땀을 흘리며 살아내든, 각각의 고명재들은 각각의 자리에서 존재를 빚는다. 그 각각의 ‘존재-양태’가 삶이라는 시다.
시는 그렇게 발칙하게 ‘양태’를 그린다. 너무 심하게 벗어나지는 않더라도 상상을 더해 언어와 이름을 틀어보는 것. 왜 사람은 이름을 꼭 하나만 가져야 하는가. 왜 나는 ‘고명재’라는 이상한 자모음의 결합으로 불리며 평생 ‘고명재’로만 살아야 하나. 어렸을 땐 이런 생각을 자주 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 정해진 자리가 갑갑하게 느껴질 때에는 재미있는 이름을 상상해 보고는 했다. 예를 들어 계절에 따라 나를 다르게 불러본다면? 봄에는 곰명재, 여름에는 개굴재, 가을에는 코스모스, 겨울에는 고드름. 감정적 상황에 따라 나를 달리 불러본다면? 화날 때는 고열량, 슬플 때는 고고통, 기쁠 때는 고성방가, 충만할 땐 고단백. 이런 놀이들이 ‘새 삶’을 일구는 시였다는 걸 깜깜하게 모른 채로 삶을 사랑했었다.
“명재야. 한 가지에 만 가지 꽃이 피고, 한 가지에 만 가지 열매가 익는단다.”
나를 사랑했던 어느 스님은 이런 말들을 어린 나에게 전하곤 했다. 그의 스승의 스승의 스승이 전해왔을 이 말의 연원이 어디에 있을지, 도대체 이 말이 어떤 시간을 관통했을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은 그 자체로 눈부신 은유다. 하나의 가지에 단 하나의 꽃만 피지는 않는다는 것. 매화나무를 가만히 들여다 본다. 하나의 줄기에 여러 꽃이 피고 있다. 포도처럼 주렁주렁 달린 저마다의 꽃들. 그것이 단 하나의 뿌리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놀라움.
더 나아가, 나는 이 말이 우리 자체, 그러니까 우리의 숙명적인 형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밝은 명재. 슬픈 명재. 장난꾸러기 명재. 비구니가 온 힘을 다해 키워낸 명재. 온갖 빛과 그늘이 우리 안에 다르게 존재하는데, 그 모든 걸 표현할 수 없어서 ‘시’를 쓴다. 지치지 않고 계속 써내고 싶다. 비록 작고 짧지만 ‘시’라는 그 가지 속에는 지금도 무수한 꽃들이 웅크려 있다.
4월이 오면 그들이 막 솟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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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첫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과 첫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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