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여성의 날] 안녕하세요, INTJ 입니다 - 손희정 평론가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세상 - 손희정 평론가
그 순간 프로코르스테스의 침대에 올라간 양 타인의 시선에 스스로를 끼워맞추기 위해 기꺼이 내 머리라도 칠 수 있다는 듯 살아가는 나같은 여자란, 한국 가부장제의 산물이라는 깨달음이 뒤통수를 강하게 때렸다. (2024.03.08)
채널예스 여성의 날 특집 기획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세상’
욕망을 숨기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여성들은 선입견을 벗어나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소설, 영화, 과학, 번역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형성을 부수고 다채로운 욕망을 보여주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20대 중반을 넘어가던 어느 날, 도저히 이렇게 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없이 작고 저열했고, 중심이라는 것이 없었다. 오른쪽에서 툭- 하고 치면 왼쪽으로 비틀거렸고, 왼쪽에서 툭- 하고 치면 오른쪽으로 엎어졌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별 생각 없이 던지는 한 마디에도 밤새 이불을 차며 괴로워하던 시절이었다. 내 존재 자체가 타인의 기준과 시선으로 결정되었으므로 삶이 불안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조건들로 내가 구성되던 날들. 그러므로 어떻게든 ‘착한 여자’가 되어 사랑 받으려 노력했다.
불안이 목까지 찰랑거려 결국은 모든 걸 엎어버릴 것만 같았던 어느 날, 아직 종이 신문이 일상적이었던 그 시절에 신문 구석에 인쇄된 광고 하나를 보게 되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습니까?” 신문사 문화센터에서 여는 ‘에니어그램’ 수업 광고였다. 궁금했다. ‘에니어그램’이란 걸 배우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될 거라고? 홀린 듯 문화센터 강좌에 등록했다. 물론, 어렸을 때부터 사주, 별자리, 혈액형 등 사람을 범주화하는 모든 ‘미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사람을 9가지 성격으로 분류하는 성격 유형 지표이자 인간이해의 틀.” 놀랍게도 에니어그램은 나에게 일종의 해방이었다. 실제로 에니어그램이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에니어그램에 따르면 나는 “2번 유형”으로 “사랑받기 위해서 남에게 베푸는 데 집착하는 조력가”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자유를 느낀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무엇보다 내가 특정한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게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한국 여자들 사이에서 가장 흔한 유형이 바로 에니어그램 2번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순간 프로코르스테스의 침대에 올라간 양 타인의 시선에 스스로를 끼워맞추기 위해 기꺼이 내 머리라도 칠 수 있다는 듯 살아가는 나같은 여자란, 한국 가부장제의 산물이라는 깨달음이 뒤통수를 강하게 때렸다. 그건 일종의 각성의 순간, 즉 ‘페미니스트 모먼트’였다.
이번 특집 제목이 “못된 여자들의 세상”이 아니라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세상”이라 마음에 든다. 나는 그게 누구건 “못된 사람들”이 활개치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 않다. (빌어먹을, 그런데 여기가 그런 세상인 것만 같고.) 위악과 위선에 있어서도, 나는 언제나 위선이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여자의 중심에 도끼질을 하고, 희생이야말로 여자의 미덕이라 가르치며, 그렇게 “착하게 살라”고 명령하는 사회에서 여자에게 허락된 작디작은 ‘못된’ 침대를 박차고 나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말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다. 20대의 어느 날 에니어그램 수업에서 내가 배운 건 사람을 아홉 가지 유형으로 나누는 방법이 아니라 내 존재를 좀 먹어 온 “나는 착하다”는 착각의 근원이었다. 페미니스트 손희정을 이루는 하나의 조각은 그렇게 신문사 문화센터에서 만들어졌다.
요즘 빠져있는 건 MBTI다. 나는 소위 ‘로봇’이라 불리는 INTJ 유형이다. 극I, 극N에 극J라는 것까지는 굳이 검사를 해보지 않아도 알겠는데 T냐 F냐는 언제나 갈등적이다. 나의 과거를 생각해 보면 나야말로 천상 F인데, 지금의 나를 보면 세상 사람이 다 F여도 나만은 T일 것만 같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에 기대고 있는 희생과 조력이란 나로부터 가장 먼 자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의 일상적인 시간은 에니어그램 2번과는 사뭇 다르게 흘러간다. 언제의 삶이 더 좋은가 하면, ‘조력가’ 쪽보다는 ‘로봇’의 삶이 훨씬 만족스럽다.
물론 요즘에도 사람들 사이에 잘 섞여 살려고 노력한다. 나는 ‘착한 여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늘 다른 사람들, 다른 생명들, 다른 존재들이 필요한 ‘취약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살기 위해 주변에 어떻게든 치대고 부벼 보는 것이기도 한데, 차이라면 내 안에서 타인과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 거리 재기에 늘 성공하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평정심과 일상은 때때로 처절하게 무너진다. 아, 쉽지 않은 것이 인생.)
그러나 저러나, 에니어그램 전문가들에 따르면 에니어그램은 바뀌지 않는 기질이라고 한다. 반면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MBTI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 한다. 결국 나를 해방한 건 에니어그램도 MBTI도 아니고 페미니즘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페미니즘 덕분에 우리는 이제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세계를 상상하고 실천하고, 때로는 소비한다. 나처럼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세계를 꿈꿔온 당신께 빵과 장미를 보낸다. 해피 여성의 날, 여러분.
*필자 | 손희정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미디어 연구X영상문화기획 단체 프로젝트38 멤버.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 이론을 전공했다.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페미니즘 리부트』 『성평등』 『다시, 쓰는, 세계』,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등을 썼고, 공저에 『21세기 한국영화』 『대한민국 넷페미사史』 『을들의 당나귀 귀』 『원본 없는 판타지』 등, 역서에 『여성 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다크룸』 등이 있다. |
추천기사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미디어 연구X영상문화기획 단체 프로젝트38 멤버.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 이론을 전공했다.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페미니즘 리부트』 『성평등』 『다시, 쓰는, 세계』,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등을 썼고, 공저에 『21세기 한국영화』 『대한민국 넷페미사史』 『을들의 당나귀 귀』 『원본 없는 판타지』 등, 역서에 『여성 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다크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