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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재의 사랑하는 시] 언어로 꾸는 꿈

고명재의 사랑하는 시 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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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꿈은 덧없고 슬프다. 시와 꿈은 난해하고 난감하며, 바로 그런 이유로 아름답다. 시와 꿈은 그렇게 마음을 그린다. (2024.02.20)


고명재 시인이 매달 마음 깊이 사랑하는 시를 전합니다.

시인의 사려 깊은 시선을 통해, 환한 사랑의 세계를 만나 보세요.




재미있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다. 언젠가 기회가 온다면 『해몽전파사』처럼 멋진 책을 써보고 싶다. 꿈에서 본 것들을 마음껏 풀어보는 책. 온갖 상상력으로 제멋대로 해몽하는 책. 최근에는 산문집을 내고 난 뒤, 마음을 다 써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런 요즘, 꿈이 나를 일으키고 있다. 며칠 전에는 절에 들러서 부처님 얼굴을 보다가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날 밤 아주 재미있는 꿈을 꿨다. 입 속에서 이물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가만 보니 혀 위에 부드러운 실이 있었다. 그 실을 잡아당기자 점점 굵어지더니 로프가 딸려 나오기 시작했다. 로프에는 소설과 시를 메모한 문장들이 치렁치렁 달려있었는데, 당길수록 그것들이 후드득 나와서 종내에는 문장이 만국기처럼 출렁거렸다. 줄을 당기면 구역질이 나고 힘들 줄 알았는데 웬걸 시원한 느낌이 드는 거였다. 아 시원해! 흥이 나서 죽죽 잡아당기자 끝도 없이 이야기들이 튀어나왔다. 『일리아드』보다 길고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이렇게 긴 소설과 시는 본 적이 없었다. 눈을 떴을 때 겨울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마음에 새살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막막했는데 내 안에 그렇게나 긴 줄이 있다고 상상하니 이상하게 힘이 솟기 시작했다. 꿈속의 장면처럼 평생에 걸쳐 끝없이 써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일어나보니 몸이 상쾌하고 가뿐했다. 창밖에 하늘이 아주 파랬다.

많이는 아니고 2mm나 3mm 정도. 꿈을 꾼 날은 그 정도로 지면에서 발이 떠오르는 것 같다. 분명히 매일 보는 일상인데 아주 얇게 세상이 변한 것 같은 기분. 조금 더 붕 뜨거나 가라앉는 것 같다. 이런 걸 ‘꿈의 영향력’이라고 해볼까. 꿈의 영향력은 미미하고 덧없어서 좋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정도로 귀여운 일탈을 하는 기분이 든다. 이런 감각은 눈이 왔다는 걸 직감하고 아침에 커튼을 걷을 때라든가. 꽃집에서 꽃을 막 사서 나올 때. 솜사탕에 맨 처음 입술이 닿을 때. 그것도 아니면 너무 좋은 시를 우연히 읽게 된 직후, 고개를 들고 환한 창밖을 볼 때. 그럴 때 세상은 좀 더 아득해 보인다. 마음은 엄청나게 변해있는데 세상은 너무 척척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시’와 ‘꿈’을 유의어라고 믿는다. 시와 꿈은 끝없이 풀이(해몽/해석)될 수가 있고 시와 꿈은 ‘제멋대로’를 용인하며 시와 꿈은 현실을 초과한다. 이들은 통제를 따르지 않는다. 시와 꿈에는 답이 없고 목적도 없고 인상적인 순간만이 번뜩인다. 시와 꿈은 결과보다는 과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매 순간이 안간힘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니까 시와 꿈은 모험이자 미로다. 시와 꿈은 무용하지만 존재하고, 아주 미약하게 현실에 영향을 끼치고 난 뒤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린다. 그래서 시와 꿈은 덧없고 슬프다. 시와 꿈은 난해하고 난감하며, 바로 그런 이유로 아름답다. 시와 꿈은 그렇게 마음을 그린다.



공중제비를 돌았다

꿈속이었다


빨간 셔츠의 선수가 잔디 위에서

펄쩍 뛰어오르더니

공중제비를 돌았다


당나귀가 한밤중에 마구간을 뛰어넘어

공중제비를 돌았다

긴장을 완화하는 한 방법이라고 했다1


기쁨이 지나갔다

슬픔이 지나갔다

발을 굴렀다


공중제비를 돌았다


혼자였다


* 원주: 제임스 테이트의 시 「Endless Time」에서 인용 변주

- 최정례, 「공중제비」 전문 (『빛그물』, 창비)


어느 한 시집의 서시(序詩)가 이런 시라면. 그러니까 시집의 첫 시가 이런 식이라면. 그리고 이 시집이 사실은 “병원 무균실에서 교정을 본”(시인의 말 중에서) 시집이기에, 결과적으로는 이 시집이 시인의 마지막 시집이 되었다면… 한참이고 멈춰서서 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마지막이 묻어있는 시. 시집 『빛그물』을 펼치면 이렇게 아름다운 시가, 첫 시로 고요하게 자리하고 있다.

시는 때때로 ‘최소의 언어’로 ‘최대의 가치’에 가닿고는 하는데, 나는 이런 시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믿는다. 이 시는 ‘최소의 언어’로 ‘삶’이라는 불가해하고도 강렬한 대상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시 속의 화자는 “공중제비를” 돈다. 대개 책상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시인들에게 이 같은 동작은 “꿈속”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참으로 심상치 않다. “빨간 셔츠의 선수”가 전문적으로(?) 공중제비를 돌기도 하지만 이어지는 연에서는 뜬금없이 “당나귀가 한밤중에 마구간을 뛰어넘어” 돌아버린다. 이 생뚱맞은 풍경은 무엇일까. 이 이질적인 공중제비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 시는 이어지는 연에서 훨씬 더 아득해진 차원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기쁨이 지나갔다

슬픔이 지나갔다

발을 굴렀다


공중제비를 돌았다


혼자였다


왜 이 말들은 강한 울림을 지니고 있을까. 왜 이 적은 말들이 우리를 멈춰 세울까. 삶은 정말 시처럼 그런 게 아닐까. “공중제비를 돌”듯 안간힘 쓰면서, 간신히 인생을 살아냈는데, 결국에는 “혼자였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헛헛하고 아리다. 그러나 참으로 이 시는 솔직하고 덤덤하다. 이 시의 공중제비는 바로 그렇게 삶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은유한다.

그런데 이 시가 시집의 첫 시라는 것. 나는 이 점을 중점에 두고 이 시를 다시 읽어보고 싶다. 그러니까 무균실에서 치료를 받으면서까지, 간신히 배치한 첫 시가 이 시라는 것. 한 권의 시집을 정리하면서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시’라는 관념도 함께 정리했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이 시를 읽으면 “공중제비”라는 행위가 훨씬 두껍게 읽힌다.

어쩌면 이 시의 “공중제비” 행위는 ‘시 쓰기’ 그 자체에 관한 은유가 아닐까. 달리기, 옆돌기, 구르기, 던지기, 돌기. 대다수의 행위는 물리적으로 (좌표상의) 이동을 만들어 내는 ‘진보적 성과’를 이룬다. 그런데 “공중제비”는 정말이지 ‘시 쓰기’와 닮았다. 물리적으로 거의 이동하는 바가 없으며 제자리를 도는 헛헛한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이 동작을 수행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달리기나 옆돌기를 하는 사람은 많아도 공중제비를 도는 사람은 흔치 않다.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이동’도 만들어 내지 못하지만, 온 힘을 다해야 겨우 해낼 수 있는 것. 위태로운 것. 어려운 것. 그러나 해야만 하는 것. 이게 바로 시작(詩作)이라는 공중제비는 아닐까. 그래서 시인은 “꿈속”에서 꿈을 꾸듯이 이렇게 언어로 꿈을 빚어보는 건 아닐까.

그러니 황당하게도 “빨간 셔츠의 선수가 잔디 위”에서 “펄쩍 뛰어”오르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전문가라고 부를 수 있는 선수(시인)가 우스꽝스러운 셔츠를 입고 시집의 맨 처음, 첫 바퀴를 돈다. 시인이랍시고 30년째 시를 써온 시인이 부끄러운 차림으로 잔디 위를 뛰는 형국인 것이다. 시집의 첫 시를 이렇게 매력적으로 소개하는 시가 어디 또 있을까. 졸시(拙詩)라는 닳고 닳은 말이 아니라, 이상한 차림으로 잔디 위에서 돌겠다는 것. 그러니 그가 하는 일은 다 “꿈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다. 이 시는 미몽(迷夢)이고 한낱 백일몽(白日夢)이며 이를 ‘공중제비 도는 꿈’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이런 이유로, 다음 연에서 이 꿈은 더 과감해진다. 이제 사람이 아니라 은유(의인화:당나귀) 그 자체가 공중제비를 돌기 시작한다. “당나귀”(말이라든가, 소였다면 이런 느낌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아주 엉뚱한 대상이 마구간이라는 ‘정해진 자리’를 이탈하는 것. 시와 꿈도 그렇게 ‘정해진 자리’를 마음껏 이탈하는 행위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시에서 ‘당나귀’라는 동물이 쓰인 것은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사실 최정례 시인은 지금 이 시에서 인용하고 있는, 제임스 테이트의 시집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는데, 이 시집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



그렇게 시와 꿈이 곧잘 ‘정해진 자리’를 잘 벗어나듯, 우스꽝스럽게 당나귀는 “한밤중”에 돌아버린다. 이것이 “긴장을 완화하는 한 방법이”라는 말도 흥미롭다. 이것은 앞선 연의 선수가 긴장을 풀기 위해 공상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시집 전체를 읽기에 앞서 긴장을 풀고 그냥 꿈을 보듯 보라는 뜻인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이든 이 시의 화자는 ‘공회전’하고 있으며 그렇게 “기쁨”, “슬픔이 지나갔다.” (생각해 보면 ‘시’라는 예술 형식도 결국에는 기쁨과 슬픔이 관통하는 국면을 그리는 기록물에 불과한 건 아닐까) 그렇게 한 뼘도 시인은 이동하지 못한 채, 최선을 다해 제자리를 공회전했다. 우리는 그 과정을 첫 시로 본다. 이 모든 꿈(시 혹은 시집)은 “혼자였”음을 자각하는 일이자, “혼자였”기에 가능했던 ‘운동’이다. 시는 그렇게 (꿈처럼 혹은 공중제비처럼) 아무것도 이루어 내지 못한 채, 아름답고 쓸쓸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장자는 자신이 나비였던 사람인지 아니면 자신이 사람이라고 지금 꿈꾸고 있는 나비인지 헷갈립니다. 이 은유는 제 생각으론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 첫째, 이것은 꿈으로 시작하며, 그래서 그가 깨어난 후에 그의 삶은 여전히 꿈과 같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 일종의 거의 기적과 같은 행복감을 품은 채 그는 적절한 동물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자신이 호랑이였던 꿈을 꾸었다”라고 말했다면, 그 말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나비는 무언가 가냘프고 덧없는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꿈이라면, 이 점을 암시하는 진정한 방식은 호랑이가 아니라 나비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중략) 그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꼭 맞는 단어를 선택한 듯싶습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박거용 옮김, 『보르헤스, 문학을 말하다』, 르네상스. 45~47쪽,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듯, 장자는 ‘나비 꿈’을 꾼 것을 기록한 바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보르헤스는 장자가 하필 “나비”라는 “무언가 가냘프고 덧없는 것을 지니고 있”는 “단어를 선택”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실제로 그렇다. ‘생’이라는 것의 ‘덧없음’과 ‘찬란함’. 바로 이 둘을 동시에 말하기 위해 ‘나비’는 정확한 ‘은유’로 선택되었다. 그러니까 “나비”야 말로 ‘삶과 꿈’이라는 양면(양 날개)을 가장 잘 말해주는 ‘은유’인 것이다. 무엇이 현실이고 꿈인지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하지만, 이 양자가 ‘아름다운 동시에 정말이지 덧없기도 하다는 점’은 결정적인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나비는 바로 이 양쪽 특성을 보여주는 “적절한 동물”이다. 시도 그렇다. 시는 대단한 무언가를 지향하지만 언제나 그것이 ‘순간’일 수밖에 없음을 환기시키며, 동시에 그 안에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1mg의 진통제를 맞고

잠이 들었다


설산을 헤매었다


설산의 빙벽을 올라야 하는데

극약 처분의 낭떠러지를

기어올라야 하는데


1mg이 너무나 무거웠다

1mg을 안고

빙벽을 오르기가 힘들었다


그 1mg마저 버리고 싶었다


너무나 무거워

엄마 엄마 엄마

죽고 없는 엄마를 불렀다

텅 빈 설산이 울렸다


그러니까 장자의 나비처럼, 이 시는 혼몽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 이 시는 『빛그물』이라는 시집의 맨 마지막 시로, 닫는 시를 자처하고 있는 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 속에서 한 시인이 마지막으로 내뿜는, 찬란한 아름다움과 생명이라는 유약함 그 자체를 동시에 본다. 그러니까 나비라는 생명의 찢기기 쉬운, 그 아름다운 취약성처럼. 시인의 시는 그렇게 존재한다. “설산을 헤매”는 꿈을 꾸면서 시인은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고 있다.

얼마나 육체적 고통이 강렬하면 그 고통을 무르게 하는 1mg의 무게까지 느끼는 것일까. 그럼에도 “설산의 빙벽을” 기어코 “기어”오르려 하는 이 눈부신 생애의 의지는 무엇일까. 다 포기하고 싶은데 기어코 살게 하는 것. 1mg이라는 너무나도 작은 단위의 힘. 이것이 “설산”이나 “빙벽”에 맞서게 한다. 끝날 때까지 시인은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다.

너무 취약한데 강인하고, 너무 아픈데 아름답다는 역설이 드러난다. 목숨이라고 붙어있는 그 눈부신 활동이 “버리고 싶”은 것을 참고 살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꿈과 생시, 시와 현실 사이를 오가며 시인은 그 무게감을 온전히 느낀다. 더 아름다운 점은 “엄마 엄마 엄마”하고 부르는 저 원초적인 목소리에 무언가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 엄마가 “죽고 없는 엄마”인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은) 살아 있는 내가, 살고자 엄마를 부른다는 것. 시인은 그렇게 마지막 시를 남기고 떠났다. 이런 시들 앞에서는 늘 겸허해진다. 최선을 다해 펜을 놓지 않았을 사람. 최선을 다해 언어를 들고 꿈을 꾼 사람. 그렇다. 시는 한낱 꿈이고 미몽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생이다. 시와 꿈은 비현실로 현실을 꿰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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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명재(시인)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첫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과 첫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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