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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들르는 감각 - <나의 올드 오크>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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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아래엔 ‘함께 먹을 때 우리는 단단해진다’는 말이 쓰여있다. (2024.02.02)


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 포스터


오래된 광장과 박물관, 성당에 앉아있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장소들에서 나는 마음 한구석에 갈고리를 걸어 팽팽하게 줄을 세우던 무언가가 소리 없이 잠잠해지는 것을 느낀다. 비록 잠깐이라고는 해도. 모두가 유유히 들어왔다가 기척 없이 사라지는 모습까지도 마음을 안심시킨다. 열린 공간에서 나는 익명의 개인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공동체의 유산과 돌봄 속에 있다. 이 얼마나 달콤한 시민의 지위인가, 잠시 생각해 본다. 자유롭게 드나드는 움직임, 보호하고 보호받을 자유. 이것이 특권임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88살의 켄 로치가 만든 <나의 올드 오크>는 많은 이들의 추측대로 그의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큰 영화다. 영국 복지 제도의 파산과 신자유주의로부터 소외된 이들의 현실을 영화로써 전파해 온 운동가인 켄 로치는 마지막까지 본분에 충실하다. 이번 영화에선 영국 북동부의 한 폐광촌에서 토박이 주민들과 시리아 난민이 만난다. 탄광은 오래전에 폐쇄되었고 마을 곳곳의 빈 집은 교외의 부동산을 헐값에 사들이는 업자들에 의해 소리 없이 팔려나간다. 동네 민심은 날마다 흉흉해진다. 더럼 광부마을의 후손들은 자국의 난민 정책이 어떠한가에 대한 입장을 숙고하기 이전에 자신의 궁핍한 처지에 우선 겁에 질려있다. 화가 난 남자들은 올드 오크라는 이름의 동네 펍에서 낮부터 연신 맥주를 들이켠다. 올드 오크의 주인 TJ(데이브 터너)만이 동네에 당도한 시리아 난민들을 환대한다. 그중에는 아버지가 물려준 카메라에 애착이 깊은 젊은 여성 야라(에블라 마리)도 있다. 둘은 곧 사진에 대한 관심을 매개로 가까워진다. <나의 올드 오크>는 이들의 우정이 20년간 잠가두었던 펍 뒷방의 문을 열어젖혀 모두의 부엌으로 꾸리는 과정을 고락을 따라간다.

<나의 올드 오크>의 중심 행위를 몇 개의 동사로 추려보기로 하자. 아마도 (음식을) ‘먹는다’와 (사진을) ‘찍는다’가 중요할 것이다.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간 공간에서 마가릿 대처 시절에 파업에 나선 광부들의 투쟁 기록을 천천히 감상하던 야라가 한 장의 사진 앞에 멈춰서는 장면이 있다. 사진 아래엔 ‘함께 먹을 때 우리는 단단해진다’는 말이 쓰여있다. 연대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TJ와 야라, 그리고 뜻을 모은 몇몇 주민들이 일종의 소셜 다이닝 프로젝트에 몰두하는 사이에 이 영화엔 또 다른 움직임 하나가 느슨히 스며든다. 바로 ‘들르는’ 감각이다.

들르다, 즉 지나는 길에 잠깐 들어가 머무르다. 이 말은 임시적인 느낌을 준다. 오래 머무르지 않고 떠날 것임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그런 걸까? 그 전에 들르는 행위는 어떤 장소를 찾는 일이 무겁지 않다는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에 어떤 면에선 약간의 사치도 된다. 정주하는 내 집도, 출퇴근하는 노동의 장소도 아닌 제3의 장소로 향할 때에만 우리는 들를 수 있다. 머무르는 시간의 밀도도 깊어진다. 그러니 어감은 가벼울지 몰라도 정작 소유하기엔 귀한 행동이다.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부족할수록, 무서울수록, 힘들수록 좀처럼 어딘가에 들르지 못하게 된다. 차라리 끊임없이 어딘가로 내몰려 갈 뿐이다. 21세기의 노동자, 이주민 영화가 숨 가쁜 스릴러로 자주 치환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컷


<나의 올드 오크>는 자꾸만 사람들을 멈춰 세운다. 어딘가에 들어가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나오게 한다. 영화 초입에 나도 모르게 부쩍 긴장한 한 장면이 있다. 마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야라가 먼저 올드 오크 펍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장면이다. 단단히 방어태세를 취하기 시작한 나를 스크린이 불쑥 비춘다. 백인 남성들뿐인 동네 사랑방에 혼자 들어간 젊은―여성―시리아 난민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몇가지 일들을 영화보다 빠르게 나의 두려움이 상상하기 시작한다. 다행히도 야라는 뜻밖의 순간에 의연한 훌륭한 주인공의 요건을 갖췄다. 그는 주민들을 잘 아는 TJ에게 카메라를 고장낸 남자를 찾아 수리비를 받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담담히 요구한다. 이 일리있는 요청을 위해 열린 올드 오크의 문은 그 뒤로도 다른 형태로 자주 열린다. TJ는 야라의 카메라를 고쳐서 그녀의 집에 가져다주고, 야라는 TJ가 그토록 사랑하던 반려견이 목숨을 잃었을 때 직접 만든 요리를 들고 TJ의 집 문을 두드린다. 이 들르는 행위는 <나의 올드 오크>에서 너무나 짧고 간결하게 처리되어 마치 아무런 사건도 없는 지루한 영화라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그들은 잠시 마주 앉아 무언가를 건네고 먹고 서로를 지켜본 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뿐이다. 내친김에 켄 로치는 20년간 닫혀 있던 뒷방의 문까지 개통한다. 작은 문들이 여러 번 열리고 닫히는 사이 소셜 다이닝이 탄생한다.

이 교류를 무한한 선의나 친밀감의 의례로만 보기는 힘들다. 아무리 태연하건대 TJ와 야라의 동행은 관객이 소리 없이 가슴 한쪽을 졸이도록 하는 조합이다. 한 번쯤은 그들이 갈라서거나 시스템의 잔인한 종용 아래 TJ가 야라를 상처 주고 마는 풍경이 나올 것임을 켄 로치의 관객들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영화 중반부 무렵에 나는 초로의 감독이 그런 불안을 부디 잠재우시라고 관객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바로 성당 장면에서다. 기껏해야 동네 어귀를 떠도는 것이 전부였던 두 사람이 수백 년 전 지어진 마을 인근의 성당에 들른다. 서사의 인과로 보면 구태여 필요 없는 장면이지만 둘은 그저 그러기로 한다. 나는 이 마음을 너무나 잘 알 것만 같았다. 그저 아름다우므로, 그곳이 열려있고, 거기에 있으므로. 이 장면의 놀라운 점은 이전까지도 호의적인 관계가 분명했던 TJ와 야라가 성당 의자에 서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을 때 마침내 완전한 안도와 신뢰의 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것을 말없이 보여준다는 데 있다. 이 순간 두 사람은 우리 시대에 갈수록 희귀해지는 어떤 특권을 누린다. 원주민과 이주민, 영국인과 시리아인, 중년 남성과 젊은 여성이 아닌 온전한 시민으로서 그곳에서 만나는 경험이다.

장소를 드나드는 행위를 통해 연대를 방해하는 외적 조건들을 조금씩 상쇄시키는 사회 실험을 보여주던 켄 로치 감독은 영화 마지막에 장소 자체를 없애버린다. 우경화된 주민들의 폭력으로 더 이상 기능할 수 없게 된 올드 오크의 주방은 문을 닫는다. 그러자 이 영화에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오직 야라의 구술로써 영화에 종종 등장하던 그녀의 아버지가 결국 시리아 감옥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날아오고 장례식이 열리는데, 마치 뮤지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동네 주민들이 야라의 집을 향해 사방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 이 영화의 피날레를 이룬다. 이때 켄 로치가 개연성을 파괴하는―수많은 주민들이 같은 시간에 조문을 온다는―설정을 밀어붙여서라도 추구하려는 리얼리티가 <나의 올드 오크>의 마지막 메시지일 것이다. 몰려든 사람들은 야라와 그 가족의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집 외벽에 놓인 야라 아버지의 사진 아래 꽃을 두고 사라진다. 그들 각자의 집과 펍, 성당, 공공의 부엌을 거쳐 <나의 올드 오크>의 주민들은 비록 아주 잠깐이나마 사방이 열린 공간에서 만난다. 잉글랜드 북부의 가난하고 화난 주민들이 기억하는 영광의 시절은 1980년대에 다 같이 행진했던 더럼 광부 축제다. 모두가 누군가의 집 앞에 들르기 위해 걸어오는 모습이 켄 로치의 마지막 이미지라고, 여기에 적어둔다. 낡아빠진 올드 오크의 뒷방을 잃은 TJ는 거리에 서서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본다. 야라가 그에게 다가올 때, 남자는 슬며시 알아차리는 눈치다. 그들이 방금 엄청나게 더 큰 방을 얻었고 사람들이 그곳에 들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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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소미 <씨네21> 기자

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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