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독서 프로젝트] 내 취향의 시집 고르는 법 - 고명재 시인
시집 어드바이저 - 고명재 시인
새해, 내 취향에 딱 맞는 시집을 한 권 발견하고 싶다면? 고명재 시인이 정성껏 고른 시집 리스트. (2024.01.25)
시인. 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데뷔했다. 생동감 있는 언어로, 사랑하는 존재와 나눈 눈부신 순간을 시로 전한다.
사이토 마리코 저 | 봄날의책
이 시집은 순정하고 맑아서 여러 번 멈춰 서게 하는 힘이 있어요. 일본 시인이 교환 학생으로 한국에 온 뒤에 찬찬히 써 내려간 시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태도’가 남달라요. 낱말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손에 꼭 쥐려는 안간힘 같은 것이 느껴져요. 저는 그렇게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게 시를 읽는 마음이라 믿고 있어요. 펑펑 눈이 쏟아지는 날에는 이 시집을 쥐고 걸어보셔요. 온 세상이 필연처럼 느껴질 거예요. 내 손에 녹지 않는 눈이 있다고 이 시집을 들고 그렇게 믿어 보셔요.
박은지 저 | 민음사
여름-상설-공연이라니. 이미 제목에서 어떤 ‘한때’들이 느껴지지 않나요. 땀을 흘려도 여름. 꼭 끌어안아도 여름. 우리 안에 찬란한 한때가 있었다는 것. 그러나 이 상설(尙設)이 영원할 수 없다는걸,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죠. 그리운 것이 많은 사람. 사랑을 잃고 요상한 꿈을 꿔본 사람. 무언가를 잘 해내고 싶었는데, 숙련은 느리고 진솔함만 앞섰던 사람. 그런 분에게 이 다정한 시집을 소개해 드려요. “숨이 몸보다 커질 때까지” “설원을 달”려본 (「못다 한 말」) 마음을 단번에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마음이 텅 빈 것 같을 때 이 책을 꺼내서 읽어요. 그럼 참 따스한 손바닥으로 누군가가 손등을 쓸어주는 것 같아요.
김복희 저 | 문학동네
저는 이 시집을 읽은 뒤 몇 년 내내 “우리 김복희를 읽읍시다! 아니 읽어야만 합니다!” 전도(?)하고 다녔어요. 확성기에 대고 힘껏 외치고 싶어요. 이토록 또랑또랑한 시집이 있다고. 맑은 구슬이 와르르 굴러 나올 것 같다고. ‘슬픔, 그거 내가 다 안아버릴게!’ 그런 당찬 용기와 사랑이 가득해요. 시집의 어느 곳을 펼쳐도 신묘하리만큼 환한 명랑이 있어요. 그게 참 크나큰 위로가 되어요. 이 시집은 그렇게 사랑을 해내요. 해석이 아니라 튀어 오르는 무릎의 시. 읽기가 아니라 살리기를 보여주는 시. 저는 보폭이 작아진다 싶을 때마다 김복희 시인의 시집을 읽어요. 그럼 언 강도 성큼성큼 건널 것 같아요. 한국에서 가장 용맹한 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서대경 저 | 현대문학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를 읽고 서대경 시인에게 ‘입덕’했었죠. 한참 만에 시집이 나왔는데 황홀했습니다. 다독가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시집. 시 애호가라면 한 번쯤은 꿈꾸는 시집. 잉크가 꿈을 꾸면 이런 시가 될까요. 시집 전체가 아름다운 회문(回文) 같아요. 이 문을 열면 저쪽에서 그가 나오고 저 문을 열면 이쪽에서 그가 나오고. 온갖 삶과 세계가 바글대는 곳. 도깨비와 흡혈귀가 출몰하는 곳. 끝없는 꿈을 한번 꿔보고 싶다면 이 시집을 당장 사서 펼쳐 보세요. 덧붙여 이 시집의 맨 뒤에 있는 시인의 에세이는 압권이에요. 정신없이 밑줄을 긋게 됩니다. 이분의 시집을 앞으로 백 권은 더 읽고 싶어요.
임지은 저 | 문학과지성사
‘진짜-너무-정말-엄청’ 재미있어요. 이렇게 부사 4연타(?)를 날릴 만큼 매력적인 시집. 온갖 상상력이 캥거루처럼 통통 튀고요. 말들이 어디로 날아갈지 예측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은 기분에서 냄새가 난다면 어떻게 표현하실래요? 학급에서 이름이 같은 친구들을 우리는 어떻게 처리(?)했던가요? 흥미로운 상상력이 마구 출몰해서 시집을 읽으며 함께 웃고 울게 되어요. 산탄총보다 넓게 퍼지는 상상의 폭발력! 탄산수보다 톡톡 튀는 말과 이야기. 자신의 뇌를 새롭게 업데이트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때때로 캥거루』를 펼쳐보세요!
곽은영 저 | 문학동네
저는 멀리 떠나고 싶을 때 소설을 허겁지겁 펼치곤 해요. 작가가 그린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우리는 알지요. 그런데 시집도 그런 게 가능합니다. 소설이 제공하는 느낌과는 묘하게 다른. ‘얘 놀자’나 ‘저기 어때’ 같은 앱으로는, 절대로 갈 수 없는 호텔이 하나 있어요. 바로 이 시집에서 그리고 있는 ‘모리스 호텔’입니다. 때로는 시집 한 권이 통째로 호텔이 됩니다. 이 시집을 펼치면 바로 장기 투숙자가 되는 거예요. 사계절을 시집 속에서 살아보세요. 그렇게 계절을 한 바퀴 다 돌고 난 뒤에 우리는 힘껏 사랑과 시간을 안게 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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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첫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과 첫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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