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독서 프로젝트] 세계문학전집 뭐부터 읽을까? - 박혜진 편집자
세계 문학 어드바이저 – 박혜진 민음사 해외문학 편집자
세계문학전집 뭐부터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박혜진 편집자가 안내하는 세계문학의 매력. (2024.01.25)
민음사 해외문학 편집자. 유튜브 채널 민음사TV에서 ‘세문전 월드컵’을 진행 중이며 SBS 라디오 <김선재의 책하고 놀자> 속 작은 코너 '박혜진의 클래식은 영원하다'에 출연하고 있다.
레프 톨스토이 저/김연경 역 | 민음사
이 책은 한마디로 ‘죽음의 간접 체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주인공인 판사 이반 일리치가 어느 날 우연히 서재를 꾸미다가 옆구리를 다치는데, 이것을 계기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병명도 제대로 모른 채 죽음에 가까워지는 과정을 담았어요. 처음에는 이 책을 카페에서 여유롭게 펴 들었는데, 옆구리를 급습한 고통 묘사가 점점 생생해지고 그에 따라 한평생 일과 가정에 직진해 온 이반 일리치가 당황해서 갈지자로 흔들리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아 도저히 커피를 마시면서 읽을 수가 없었어요.
이런 문장이 나와요. ‘논리학에서 배운 삼단 논법의 예를 따르자면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고로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도 죽는다, 라고 했다. 그는 이것이 자기에게는 적용되지 않으리라고 여겨 왔다.’ 우리는 인간이 필멸의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작 자기가 죽는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뜻인데요. 결국 인생은 연역법만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반드시 스스로 경험해야만 아는 것들이 있지요.
한 예로 저는 출산을 통해 모든 인간이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서 세상에 내놓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의료진이 분만실을 빠져나간 뒤 혼자 남아 끄억끄억 울면서 깨달은 진리였지요. 한동안 길거리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히지 못했어요.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 소중해서 부딪히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이렇게 이반 일리치가 영원히 살 것처럼 성공과 명예를 좇던 어느 날 일상을 뚫고 들어온 죽음에 경악하면서 역설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하는 대목들이, 새해 벽두 독자분들께 신선한 충격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네스트 밀러 헤밍웨이 저/김욱동 역 | 민음사
저처럼 겁이 많고 소심한 분들께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어요. 얼마 전에 한 TV 토크쇼에서 이준혁 배우님이 ‘행복하다 느끼는 순간 안 좋은 일이 생긴다’라며 ‘행복’이라는 단어를 내뱉기도 두려워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요. 저도 비슷하거든요.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을 맡고 있는 어부 ‘산티아고’도 마찬가지고요. 이 늙은 어부는 84일 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태에서 막연한 희망을 안고 바다로 나가는데요. 그날 운 좋게 길이 5.5미터에 달하는 청새치가 미끼를 물죠.
때때로 너무 큰 행운은 불운과 구별이 되지 않잖아요. 이미 육체적으로 노쇠한 늙은 어부에게 청새치는 버거운 상대였죠. 하지만 노인은 배 위에서 밤을 새워 가며 혈투를 벌인 끝에 이 행운을 낚습니다. 청새치가 얼마나 거대했던지, 노인이 탄 배보다 컸기 때문에 배에 올리지도 못하고 뱃전에 묶어야 했죠. (근데 INFP 여러분, 모여 보세요. 벌써 불안하시죠? 네, 맞습니다.) 좋은 일은 오래가지 않아요. 어부가 청새치를 잡는 과정에서 힘이 달리니까 작살을 사용했는데, 그 때문에 청새치의 피가 바다에 많이 흘러 들어간 거예요. 저 멀리 상어 한 마리가 피 냄새를 맡고 청새치를 향해 돌진해 오는 것이 보이네요.
과연 어부는 상어로부터 청새치를 지킬 수 있을까요? 헤밍웨이는 기대와 실망, 행운과 불운에 예민한 감각을 가진 독자들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뛰어난 필력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을 능숙하게 다스리지 못해 불안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는 이 늙은 어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상어와 사투를 벌이는 과정을 조용히 보여 주지요. 저는 2024년 새해에 제 몫의 행복을 누리고 싶은데요. 일기장에도 감히 이렇게 말은 못 하고 무사와 무탈만을 적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을 때 어깨가 쭉 빠져서 항구로 돌아오는 어부를, 위로해 주고 싶었던 저의 마음을 떠올렸어요. 제가 위로하고 싶었던 것은 사실 저였던 것 같아서요.
다자이 오사무 저 | 민음사
보통 다자이 오사무, 하면 『인간 실격』을 많이 떠올리실 거예요. 2023년 지난 한 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책도 『인간 실격』이고요. 하지만 다자이 오사무는 독특한 분위기의 중단편을 많이 쓴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여치」를 소개하고 싶어요. 이 책의 화자는 여자예요. 화자인 ‘저’는 나이가 찼음에도 결혼에 뜻이 없어 부모님을 통해 들어오는 선 자리를 거절하다가, 어느 날 우연히 한 골동품상이 중매를 자처한 가난한 화가와 결혼을 합니다. 부모님은 선 자리에 나가는 것부터 만류했는데, 여자는 그 화가의 난해한 그림 세계에 한 번 반하고 직접 만나서는 입고 나온 와이셔츠 소맷부리가 깔끔한 데에 (이상한) 확신을 얻어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며 결혼을 추진하지요.
그런데 이 소설의 첫 문장이 이렇습니다. ‘헤어지겠습니다. 당신은 거짓말만 했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결혼해 놓고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일까요? 아니요, 아무 문제 없습니다. 다만 남편이 우연한 계기로 크게 성공했을 뿐. 아내는 남편이 화가로서 인정받아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불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냥 잘 된 것이 아니라 ‘너무 지나치게 잘 돼서’ 무섭다고 고백하지요. 과연 아내는 어떤 마음인 것일까요?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편이 한눈을 팔까 봐 두려운 것일까요? 그렇다고 하기에 그동안 부부의 경제 상황은, 지인들이 선의로 건네는 돈봉투 없이는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곤궁했습니다. 게다가 아무리 남편의 갑작스러운 성공이 당황스럽다고 해도, 남편이 전시회에 초대해도 끝내 가지 않고 방에서 덜덜 떨면서 뜨개바늘만 움직이는 모습이 여간해서 이해되지 않는데요. 그녀는 차라리 남편이 나락에 떨어져 다시 가난해지기를 바라는 지경입니다.
이 단편은 막 글을 써 돈을 벌기 시작했던 다자이 오사무가 번 돈을 금세 다 써 버린 뒤 이른바 ‘원고 장사꾼’이 되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경계하는 마음에서 썼다고 합니다. 출세가 영혼을 더럽히리라는 공포, 돈이 예술을 무디게 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부부간의 미묘한 관계 변화를 통해 그려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이 단편의 참맛은 마지막 장면에 있는데요. 그 장면을 오래 잊지 못했어요. 저는 예술가도 아니고, 새해에는 더 열심히 돈을 벌자며 막 다짐한 참이지만, 누구에게든 외곬으로 고지식하게 지키고 싶어 하는 가치가 저마다 하나씩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사랑이든 예술이든 자존심이든요. 「여치」는 민음사 도서 중에서는 세계문학전집 『달려라 메로스』와 디 에센셜 시리즈의 『디 에센셜 다자이 오사무』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저 / 우석균 역 | 민음사
스카르메타는 단 하나의 히트작을 남긴 ‘원 히트 원더’라고 볼 수 있는데, 칠레의 국민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향한 ‘팬픽’ 격인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바로 그것이죠. 영화 <일 포스티노>의 원작 소설이기도 합니다. 스카르메타는 접점이 없을 때도 멀리서 파블로 네루다를 존경해 마지않았고, 실제 두 사람이 우연히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을 때 당시 스카르메타는 인지도가 낮았음에도 자신을 동료 작가로서 존중해 주는 파블로 네루다의 태도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나의 최애를 실제로 보았는데, 실망은커녕 완전히 반해 버렸던 것이죠.
그래서 스카르메타는 파블로 네루다를 인물로 등장시키면서 그가 사랑에 빠진 소년에게 문학과 시에 대해 가르치는 이 작품을 썼어요. 소설 속에서 소년은 좋아하는 여자 친구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파블로 네루다가 아내에게 쓴 시를 도용하는데요. 네루다가 이 사실을 지적하자 당당하게 이렇게 말해요.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에요!" 이 책은 태생부터 팬픽이다 보니, 작가적 자의식은 한껏 누르면서, 쓰는 존재보다 읽는 존재의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어루만져 줘요. 시를 쓰는 사람에게만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읽는 사람에게도 있다고요. 아니, 심지어 그것을 훔치는 사람에게도요.
이 책의 숨겨진 주제는 ‘은유’인데요. 시를 훔치던 소년이 직접 시를 쓰고 싶은 욕구를 느끼면서 파블로 네루다에게 은유란 무엇인지 질문하기 시작하거든요.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은유란 곧 ‘연결’이라고 생각했어요. 전혀 무관한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들을 연결 짓겠다는 생각, 그 작정하는 마음이 은유라고요. 그렇게 보면 저기 저 먼 곳에 존재하는 나의 최애, 파블로 네루다를 향한 스카르메타의 사랑부터가 은유예요. 어쩌면 우리는 그 사람에 빗대어 나를 설명하고 싶어서,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요? 때로 홀로 하는 사랑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반짝거리며 위안을 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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