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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었던 고향의 맛 - SF9 ‘비보라’, NMIXX ‘DASH’
SF9 ‘비보라’, NMIXX ‘DASH’
거부하기 어려운 대의와 대세의 커다란 물결을 헤치고 SF9 ‘비보라’와 엔믹스의 ‘DASH’가 새해의 문을 열었다. 한때 케이팝의 구태로 불리던 것들이 이제는 색다른 재미가 되었다. (2024.01.24)
지난 1월 8일 발표된 SF9의 열세 번째 미니앨범 [Sequence] 타이틀 곡 ‘비보라 (BIBORA)’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슬쩍 웃었다. ‘이거지’라는 말도 같이 나왔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다가와 ‘앞 문장에서 서술한 ‘이거’를 논리적으로 정확히 서술하시오’라고 따져 묻는다면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다. ‘비보라’를 들으며 느낀 감정은 구체적이기보다는 추상적으로 떠오른 이미지에 가까웠다. 이미 멸종된 걸로 알려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진다는 ‘우리의 소리’를 케이팝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 같은 반가움이었다.
곡의 시작과 동시에 흐르는 높은 점도의 끈적한 멜로디, 비트 질감으로 보나 사운드로 보나 충분히 딥 하우스인데도 자꾸만 한국 고유의 얼을 떠올리게 만드는 묘한 리듬, 애수 어린 서사를 서서히 고조시켜 나가다 곡 제목인 ‘비보라!’를 구호처럼 외치며 비로소 휘몰아치는 회심의 후렴구. 노래 ‘비보라’는 ‘질렀어’(2018)와 여름 향기가 날 춤추게 해 (Summer Breeze)’(2020)로 이어온 SF9만의 고유한 흥과 뽕에 시크한 올 블랙 착장을 입힌, 케이팝 나아가 한국 대중음악의 정석 한 챕터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 같은 존재감을 자랑했다.
일주일 뒤 추상적 ‘이거지’를 다시 한번 끌어낸 노래가 나왔다. NMIXX(엔믹스)의 ‘DASH’였다. ‘두 개 이상의 장르를 한 곡에 섞어 다양한 매력을 전하는 음악’을 뜻하는 ‘믹스팝(Mixx Pop)’은 이들이 2020년 데뷔 당시부터 줄곧 주창해 온 엔믹스 음악의 핵심이었다. 막 데뷔한 그룹의 이름을 장르명으로 치환해 버린 과감함은 예상대로 다수의 대중을 쉽게 설득하기 어려웠다. 너무 많은 것이 섞여 혼란스럽다는 감상이 앞서는 노래 안에 놓인 수십 갈래의 길 위에서 2023년 ‘Love Me Like This’와 ‘Party O'Clock’으로 꼭 필요했던 헤맴을 겪은 이들이 비로소 ‘DASH’라는 뚜렷한 키를 잡았다.
‘꼭 필요했던 헤맴’이라는 마음 편히 말을 할 수 있는 건 ‘DASH’가 그만큼 엔믹스라는 그룹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한 곡이라서다. 묵직하게 떨어지는 레트로한 베이스 리프 위로 전작들에 비해 심플하고 친숙하게 정리된 곡의 레이어와 멜로디가 돋보인다. 곡을 구성하는 요소가 익숙하게 자리를 잡자, 멤버들이 돋보였다. 곡의 문을 여는 릴리는 ‘I wanna dash’라는 가사를 반복할 뿐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자신만이 가진 카리스마와 스웨그를 보여준다. 아는 사람은 아는 뛰어난 보컬이지만 인터넷 밈으로 더 자주 소비되던 해원의 목소리도 시원하게 터진다. 깔끔한 구획 정리 속 설 자리를 잃은 ‘믹스’는 곡 구조로 자리를 옮긴다. 노래는 90년대 힙합이었다가, 세기말 R&B 팝이었다가, 디스토션 잔뜩 걸린 기타 사운드로 어느 시절의 팝 펑크를 거칠게 소환하며 충돌하기도 한다. 혼이 쏙 빠지기 직전,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안락함이 밀려든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이게 케이팝이 가장 잘하던 거였구나.
코로나를 기점으로 해외 시장 비중을 부쩍 높인 케이팝의 지금 대세는 누가 뭐래도 글로벌이다. 자유롭게 탈부착이 가능한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K를 붙였다 떼는 상황에서 관념적 ‘팝’에 가까운 멜로디, 사운드, 감성에 대한 추구도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뉴진스의 성공을 시발점으로 한 케이팝 이지리스닝 붐도 당분간 이어질 것이다. 산업의 몸집이 커진 만큼 감당해야 할 영역도 넓어졌고, 도전보다는 안정을 추구하게 된 것도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변화다. 거부하기 어려운 대의와 대세의 커다란 물결을 헤치고 SF9 ‘비보라’와 엔믹스의 ‘DASH’가 새해의 문을 열었다. 한때 케이팝의 구태로 불리던 것들이 이제는 색다른 재미가 되었다. 지루할 만하면 새로운 자극을 찾아 눈앞에 던져 놓는, 끝없이 정반합을 반복하며 성장해 온 좌충우돌 케이팝다운 지금이다. 잊고 있던 케이팝 고향의 맛이 겨울 홍시만큼 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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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