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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경의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 꿈

무의식과 소통한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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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육’이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그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한탄만 할 필요는 없다고, 시간이 흐르고보니 그 경험과 고통은 무엇보다도 큰 나의 ‘자산’이 되었다고, 나의 무의식은 꼬집어 말한 거였다. (2023.12.22)

언스플래쉬


5년에 걸친 힘든 기간 동안, 나에게 닥친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나는 기묘한 꿈들을 많이 꾸었다. 이전까지는 별로 꿈을 꾸지 않았고, 꿈을 꾸더라도 별다른 의미 없는 이미지의 파편들인 경우가 많았다. 이 시기의 꿈들은 달랐다. 꿈 속에서 나는 기묘한 상황에 처해서 강렬한 감정들을 느꼈고 깨어난 뒤에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무의식이 나에게 중요한 말을 건네는 중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럴 때 나에게는 항상 도움이 되는 상담사 친구가 있다.

“나 어제 신기한 꿈 꾸었어! 근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서로를 낚기에 이보다 더 확실한 미끼는 없었다. 친구도 신기한 꿈을 꾸면 함께 해석하자며 나를 유혹했다. 우리는 각자의 꿈은 불을 보듯 의미가 뻔해도 도무지 해석해내지 못하면서도 상대방의 꿈의 의미는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서로를 일깨워주곤 했다. 어젯밤 누군가 꿈을 꾸었다고 하면 우리는 잔치라도 난 것처럼 득달같이 만나서 커피를 앞에 놓고 어제 꾼 그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 해석하기에 골몰했다. 그렇게 나누었던 꿈 이야기들 중에 몇 가지는 내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상태를 알아내는 데에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주기도 했다. 중요한 꿈들은 2019년 무렵에 집중되어 찾아왔는데, 아마 설이를 출간하고 나의 내면적 회복이 조금씩 다가왔던 시기였기 때문인 것 같다.


꿈1.

어느 날 꿈에, 나는 어디선가 먼 여행에서 돌아와 빈 집에 웅크리고 있었다. 덩그러니 커다랗고 번듯하지만 언제나 외롭고 불안한 느낌을 주던, 내가 어린시절 살았던 집이었다. 날이 엄청나게 궂어서, 세상이 다 멸망할 듯한 폭풍우가 치고 있었다. 나는 집이 무너지면 어떡하지, 꿀짱아를 어떻게 학교에 보내지 하는 걱정과 공포가 섞인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점점 더 거세어지는 폭풍 속에, 드디어 꽝 하는 번개가 치더니 커다란 유리창이 통째 나자빠졌다. 공포에 질려 창밖을 내다보니 꼬마 꿀짱아가 비바람 속에 서 있었다. 꿀짱아는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꿈 속에서는 예닐곱살 쯤 되어보이는 어린 모습이었고, 생뚱맞게 그 해 내가 새로 장만한 여름 자켓을 입고 서 있었다. 유리가 자빠져서 놀란 얼굴이었지만 아차 들켰다 하는 장난기 어린 얼굴이기도 했다.

- 뭐지? 너 무슨 장난 쳤어?

가만 보아하니 통째 나자빠진 거대한 유리창에는 작은 렌즈 모양 동그란 스티커들이 조르르 붙어있었는데 그것이 빛을 모으는 작용을 해서 유리창을 붕괴시킨 것 같았다. 나는 화가 났다.

- 너 이렇게 비가 오는데 장난을 친 거야? 이 스티커 때문에 집이 무너질 뻔했잖아?

그러자 꿀짱아는 유리가 깨진 것은 유감이지만 나도 할말이 있다는 특유의 당당한 표정으로 답했다.

- 하지만 이건 내 인생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재미가 있었다고!

그러더니 야단치려는 내 말 따위는 듣지도 않고 꺄르륵 웃으며 도망쳐버렸다.

이 폭풍 속에 사고를 쳐놓고 어이없이 당당한 꿀짱아를 믿을수 없는 눈으로 보면서, 나는 낑낑거리고 발버둥쳐서 나자빠진 유리창을 다시 일으켜세워 벽에 끼워 맞추기에 성공했다. 엉성하게 끼워 맞추었지만 이미 금이 가고 헐거워져서 폭풍우를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다른 유리창에도 꿀짱아가 여기저기 붙여놓은 렌즈 스티커들이 보였다. 나는 다시 무릎을 껴안고 웅크리고 앉아서 집이 무너질 것을, 세상이 끝장날 것을 두려워하며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새 우리집에 친구들이 와서 커피를 마시며 아무렇지 않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주로 아이들이 학교다니는 이야기, 사춘기에 심술을 부리는 이야기 등등 일상적인 이야기 들이었다. 재미있는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겨서 두려움을 잠시 잊고 있었는데, 다시 한번 벼락이 치더니 간신히 세워놓았던 유리창이 다시 자빠져서 이번에는 아주 돌이킬 수 없이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기절할 것처럼 놀랐는데, 친구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여전히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도 아무일 없다는 것처럼 살금살금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깨어진 유리창은 벽처럼 두껍고 견고했지만 막상 깨진 조각들은 날카롭지 않고 둥글둥글해서 아무도 크게 다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수다를 떨어가며 깨진 유리창을 정리하다가 나는 잠에서 깨어났고 이것이 무언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꿈인 것을 직감했다.

이전에도 여러 가지 꿈들을 꾸었지만 내 어린시절의 집에 꿀짱아가 등장한 것은 처음이었다. 꿀짱아에게 내가 평소 느끼던 감정들이 생생했다. 게다가 그 아이는 내 옷을 입고 있었다. 꿀짱아가 입고 있던 여름 재킷은 내가 주로 강연할 때 입는 복장이니 작가로서의 나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두려워하고 숨고 싶어하는 나와, 발칙하고 당당하게 소설을 쓰는 내가 꿈 속에서 서로를 처음 만났다. 폭풍우 속에서 붕괴와 죽음의 공포를 느끼던 감정과, 철딱서니 없이 해맑은 꿀짱아의 대비가 선명했다.

뭐가뭔지 알 수 없었던 꿈의 의미는, 매우 특이한 꿀짱아의 한마디에서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재미있는 일”이라는 표현에서, 그것이 아마도 소설일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이전까지 내가 쓴 소설이 모두 여섯 편이었다)

나는 꿀짱아처럼 철딱서니 없이 해맑은 마음으로 소설들을 썼고, 그것은 폭풍우 속에서 빛을 모으는 렌즈와도 같은 역할을 해서 나를 가두고 있던 공포의 집(과거의 기억들)을 붕괴시켰다. 첫번째 붕괴는 나의 첫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었을 것이다. 그 소설을 쓰면서 나는 처음으로 내 어린시절의 상처를 깨달았지만 폭풍이 두려웠던 나는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대충 얼기설기 메꾸고 사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한번 금이 가버린 세계관은 필연적으로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완전히 붕괴되어 산산조각날 수밖에 없었다. 두번째 붕괴는 『설이』였다.

무의식은 나에게, 나를 해방시킨 것이 꿀짱아, 소설, 친구들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를 가두었던 어두운 기억들은 꿀짱아를 키우는 과정에서 치유되었고, 소설을 쓰면서 적극적으로 붕괴되었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던 내 친한 친구들은 내가 너무 두렵거나 고통스럽지 않도록 도왔다. M의 세계는 최종적으로 붕괴되었지만 남은 상처는 치명적이지 않았고 (유리조각은 뾰족하지 않았고) 폭풍 너머 먼 하늘에는 밝은 빛이 느껴졌다.


꿈2.

다른 꿈에서 나는 어느 유명한 정치인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낡은 아파트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인품이 있는줄 알고 믿었던 정치인에게 청천벽력같은 일을 당하고 망연자실하다가, 나는 이대로 가만 있을 수는 없다며 불끈 일어서서 여기저기 고발하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 정치인은 깜짝 놀라서 자기 정치생명이 끝난다며 용서해달라고 빌었지만, 나는 그를 용서할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뭐? 정치생명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같은 자에게 또다른 피해자가 나와선 안되지.

나는 무자비하도록 그의 본색을 까발리고, 그의 정치생명을 끝장내고, 승리자가 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당한 고통스러운 일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속았고, 폭행을 당했고, 혼자 고통을 견뎌야했다. 그래서 나는 100평도 넘어보이는 휑뎅그레한 낡은 아파트에서 혼자 울고 있는 거였다.

그런데 누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 얼마나 좋으세요?

그 말을 듣고 나는 화가 났다.

- 뭐라고요? 내가 좋아보인다고요?

그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 그럼요, 여기는 대치동이잖아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놀라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치 달 표면처럼 황량하고 낡은 동네에 있는 낡은 아파트였지만 그곳은 대치동이라고 했다. 대치동이라는 소리에 꿈 속에서도 번쩍 정신이 들면서 어이없게 계산기가 파바박 돌아갔다.

- 내가 대치동 100평 아파트에 살고 있었어? 그러면 이거 100억원은 하겠네…

이 꿈은 당시 세상을 달구었던 부동산 광풍과 내 황량한 마음, 그리고 무의식의 위트가 잘 버무려진 귀여운 수작이었다. 나는 ‘교육’이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그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한탄만 할 필요는 없다고, 시간이 흐르고보니 그 경험과 고통은 무엇보다도 큰 나의 ‘자산’이 되었다고, 나의 무의식은 꼬집어 말한 거였다.

무의식과 내가 이렇게 가깝게 소통한 경험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많은 일들이 여전히 혼란과 역행 속에 있었지만, 이런 꿈들로 인해 나는 내가 치유의 길로 나아가고 있음을 믿을 수 있었고 좀 더 기다릴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
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저
한겨레출판
설이
설이
심윤경 저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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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심윤경

소설가. 장편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 『영원한 유산』, 『설이』 등과 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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