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그림책 작가 엠마 아드보게는 일상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유별나지 않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면서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한 통찰을 독자에게 안기는 작가입니다. 누구에게나 피가 흐를 만큼 다쳐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동안 아파서 고생하고, 시간이 지나 딱지가 앉고, 그 밑에서 상처가 아물고, 마침내 분홍빛 새살을 마주해 본 경험 또한 있을 것입니다. 이 일련의 경험들은 축적되며 일종의 회로가 되고, 그렇게 우리는 전보다 조금 더 수월하게 회복하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물기 하나 없이 딱딱하게 말라붙은 딱지는 그 엄연한 증거이며, 주인공이 딱지가 떨어진 자리를 조심조심 만져 보며, “좋네요.” 하고 말하는 순간의 진실입니다.
모두가 그저 ‘구덩이’라고 부르는 그곳은 학교 체육관 뒤편의 움푹 파인 장소입니다. 구덩이 안에는 잡초와 그루터기들, 뿌리, 바위, 자갈 등 온갖 것들이 가득합니다. 아마도 언젠가 골재를 채취한 뒤 깔끔히 마무리하지 못하고 한동안 방치했을 이 공간은, 시간이 지나며 아이들이 최고로 좋아하는 놀이터가 됩니다. 오두막도 되고 가게도 되는 커다란 그루터기, 하도 붙잡고 올라가서 문손잡이처럼 반들반들하게 닳아 버린 나무뿌리, 노란색 진흙이 파도 파도 끝도 없이 나오는 구멍, 매력적인 비탈까지. 아이들이라면 무조건 뛰고 구르고 점프하고 날아다닐 수밖에 없는, 그 구덩이 얘기가 시작됩니다.
2023년 5월에 한국어판이 출간된 『내 딱지 얘기를 하자면』(이하 『딱지』)와 10월에 출간된 『그 구덩이 얘기를 하자면』(이하 『구덩이』)은 모두 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학교란 모두에게 보편적인 경험의 배경이기도 하고 저마다 다른 기억의 공간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학교가 배경이다 보니 아이들이 여럿 나오는데, 각자의 몸짓, 심정, 말투의 묘사가 무척 탁월해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요? 아이들을 자주 관찰하는 편인가요?
맞아요, 저는 아이들뿐 아니라 사람들을 관찰하는 걸 매우 좋아해요. 저는 우리가 어떤 모습인지에 관심이 많아요.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해서 말이지요. 집단은 우리에게 반드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될까요? 저는 언제나 관찰자였고 이미 어렸을 때부터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을 거예요. 우리와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을 끊임없이 연구한 셈입니다.
두 책에서 모두 아이들의 양육자는 등장하지 않아요. 선생님과 아이들의 관계로 어른-아이의 관계를 담게 된 이유가 있나요? 또 아이들을 대하는 선생님의 모습들도 각기 달라 재미있는데, 어떤 모습을 담고 싶으셨나요?
저는 일상의 다양한 관계들을 탐구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선생님과 아이들은 거의 매일 만나는 만큼 서로의 삶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선생님들은 때로는 아주 권위적이고 때로는 권위적이지 않습니다. 양육자의 무조건적인 사랑과는 다른 방식의 돌봄이지요. 제가 이야기의 배경으로 학교를 선택한 건 아이들 집단의 역학관계를 다루고 싶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주제를 이야기하기에 학교가 적절했어요.
작가님은 학교에서 어떤 아이였나요? 쉬는 시간에는 주로 무얼 했나요?
언제나 내성적인 아이였어요. 사교적인 자아를 미처 찾지 못했던 어린 시절에는 더욱 그랬을 거예요. 그때는 큰 소리로 명확하게 말할 줄 알고 친구가 많은 사람이 사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지요. 저는 주로 제 쌍둥이 자매와 몇몇 친한 친구들과만 함께 지냈어요. 우리는 말타기 놀이를 하거나 그네를 탔고 오두막을 지었고 목초지에서 뛰어다니며 놀았어요. 물론 ‘구덩이’에서도 놀았습니다. (『구덩이』 이야기의 일부는 실화예요!)
축구를 하거나 여럿이 노는 건 별로 하지 않았어요. 조용한 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놀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테지만 우리는 언제나 밖에서 놀아야만 했습니다.
주인공은 그냥 ‘나’이지만 선생님과 친구들은 모두 구체적인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유가 있을까요?
그 점을 발견하셨군요. 언젠가부터 주인공의 이름을 짓지 않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무의식적으로요. 그러자 주인공의 목소리가 더욱 명확해졌어요. 중립적이고 차분한 어조를 가진 ‘나’라는 화자가 많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일인칭으로 글을 쓰면 아이들의 언어를 더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어요. 이것이 저에게 잘 맞는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드나요? 쌍둥이 자매의 이름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나요? 어릴 때 이름에 대해 가졌던 느낌들이 있는지 궁금해요.
엠마라는 제 이름은 우리나라에서 아주 흔한 여자 이름이지만 저는 언제나 제 이름을 좋아했어요. 제 쌍둥이 자매의 이름은 리센인데, 이건 조금 더 특이한 이름이지요. 그렇지만 부러워했던 적은 없어요. 막냇동생 이름은 엘렌인데, 저와 리센 모두 오히려 그 이름이 부러웠어요.
어떻게 그림책 작가가 되셨나요? 그림책 작가가 되기까지 중요했다고 생각되는 계기나 장면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2021년에 Heffaklumpen상 수상 인터뷰에서 이웃에 살았던 투르 모리세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어요. 이처럼 그림책 작가가 되기까지 영향을 끼쳤던 인물들이 있을까요?
네, 만화가 투르 모리세 선생님이 저의 이웃이었어요. 열아홉 살 때 그분께 그림을 배웠던 적도 있지요. 선생님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일깨워 주었어요. 또 부모님에게도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저의 진로 선택에 대해 한 번도 의구심을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요! 그리고 쌍둥이 자매의 존재도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모두 글과 그림에 관심이 많았어요. 우리는 서로의 존재 덕분에 어린 시절에 어렴풋이 존재했던 느낌의 실마리를 신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용기를 가질 수 있었고,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수 있었죠. 망설여지거나 스스로 의심스러울 때는 가까운 사람들의 응원이 필요해요. 누구에게나 말이지요.
딱지가 생기면 저절로 떨어질 때까지 가만히 두는 타입이신가요, 계속 만져서 떼고 또다시 피를 보는 타입이신가요?
딱지는, 정말로, 자연히 떨어질 때까지, 제자리에 있어야만 합니다!!! 저는 딱지를 만지작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구덩이』를 보면 ‘놀이’를 향한 본능의 위대함이 느껴져요,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 혹시 인생 전체에 걸쳐 몰두하고 있는 구덩이가 있으신가요?
저는 제 삶 전체가 하나의 구덩이였으면 좋겠어요. 친구들과 가족, 나와 마찬가지로 예술가이지만 규범이나 표준적인 틀에 더 익숙한 남편과 자주 이 이야기를 나누지요. 만일 인생이 하나의 구덩이라면 나는 거기서 그림 그리기, 글쓰기, 연극, 옷 만들기, 도자기 작업, 정원 가꾸기, 강아지와 놀기, 여행, 집안일, 지금까지 없었던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나를 실험하기를 하며 살아가고 싶어요. 최근에 한 친구의 집에 놀러 갔어요. 그 친구는 일흔 살인데, 여전히 집에는 놀이 공간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대요. 저도 완전히 동의해요. 가능한 한 자주,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이 놀려고 노력해요. 꽤 순조롭게 되고 있어요. 하지만 조심해야 합니다. 규범이란 건 강력하니까요.
어른이 되면 잊히고 바랠 법한,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과 감정 묘사가 무척 섬세합니다. 어린 시절에 느낀 기분들을 잘 기억하시는 편인 것 같아요. 어린 엠마와 어른 엠마는 어떤 사이로 지내고 있나요?
우리는 항상 감정, 기억, 경험을 통해 자주 소통해요. 저는 열한 살, 스무 살, 마흔 살의 기분을 거의 동시에 느껴요. 어린 엠마는 어른 엠마를 도울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둘 사이의 스위치는 항상 켜져 있는 것 같아요. 언제나 드나들 수 있는 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린 시절 간절히 바랐던 무언가가 있나요?
저와 리센은 함께 말을 키웠어요. 그래서 저는 오랫동안 저만의 말을 갖고 싶다는 꿈이 있었지요. 각자에게 각자의 말이 있었으면 했어요. 또 여행을 자주 하고 싶다는 꿈도 있었어요. 우리 반 아이들이 여행을 많이도 다녔거든요.
요즘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리고 계신가요? 다음 작품들의 행보가 궁금합니다.
이삼 년 전에 쓴 글을 고치고 있어요. 아마도 앞으로 이삼 년은 더 걸릴 거예요. 그전에 리센과 함께 어린이를 위한 아트북을 만들 겁니다. 이 일은 긴 프로젝트가 될 예정이어서 너무 바빠질까 걱정이에요. 가을에는 제 희곡 <번데기>가 무대에 오릅니다. 요즘은 이런 일들에 몰두하고 있어요.
주로 어디에서 그림책 소재를 얻으시나요?
저만의 두려움, 오래된 혹은 새로운, 크고 작은 질문들에서 주로 얻어요. 아이디어는 다양한 곳에서 찾아와요. 제 안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바깥에서, 즉 제가 보거나 들은 것에 의해서 일깨워지기도 해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발견되기도 하고요. 언제나 호기심을 가져야 합니다. 관찰과 수집을 멈추지 말아야 해요.
과슈와 연필을 주재료로 사용하시는데, 이 재료들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가 있나요?
과슈와 연필을 매우 좋아해요. 그것이 제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가끔 다른 기법을 쓰고 싶어질 때도 있어요.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아니면 글이 말하는 바를 더 잘 표현하기 위해서죠. 이야기가 기법을 결정해요. 가끔은 과슈나 연필이 어울리지 않거든요.
하지만 과슈와 연필은 저의 언어와도 같아요. 저의 언어이자 저의 집이지요. 이 재료로 표현할 수 있는 느낌이 아주 다양하다는 점도 마음에 들어요.
마지막으로 『딱지』와 『구덩이』를 읽을 한국 독자들에게 한마디 보내 주세요.
여러분이 이 이야기들을 읽은 뒤에 자신을 조금 더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새로운 면을 발견하기를 바라요. 저의 그림책들이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읽힌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진 거니까요.
*엠마 아드보게 1982년 스웨덴 린셰핑에서 태어나 2001년부터 여러 권의 그림책을 만들고 있다. 인상적인 상징과 통찰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균열을 내어 독자를 초대하는 작가 엠마 아드보게는 스웨덴에서 현재 가장 주목받는 그림책 작가 중 한 명이다. 『그 구덩이 얘기를 하자면』으로 스웨덴 대표 문학상인 아우구스트상(2018)과 이탈리아의 어린이청소년문학상인 안데르센상(2020), 그리고 독일아동청소년문학상(2022)을 수상했다. 그의 다른 작품 『내 딱지 얘기를 하자면』은 2022년 스웨덴에서 그 해 최고의 그림책에 수여하는 스뇌볼렌상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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