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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칼럼] 그림자를 잇는 마음
김지연의 그림의 등을 쓰다듬기 6화
비평이란 칼을 들어 대상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비평은 의미를 발견하고 드러내는 일이며, 날 선 칼보다는 구체적인 사랑의 눈이 더 필요하다.
예술과와 관객을 잇는 현대미술 비평가 김지연 작가의 에세이. 격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
타인을 완전히 알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서 서로가 하는 말을 온전히 알아듣고 있을까. 알아들었다 하더라도 그 아래의 속마음까지 이해할까. 심지어 그 자리에서 발화한 마음은 상대를 이루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각 중 고작 몇 퍼센트에 불과하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책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서, 우리의 대화 사이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내가 말하고 있다고 믿는 것, 내가 말하는 것, 그대가 듣고 싶어 하는 것, 그대가 듣고 있다고 믿는 것, 그대가 듣는 것, 그대가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 그대가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 것, 그대가 이해하는 것”, 이렇게 열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각각의 가능성은 또 다른 가지를 친다.
같은 맥락에서 개인전의 서문이나 리뷰를 쓰는 일은 재미있으면서도 어렵다. 한 작가가 오랫동안 쌓은 작품을 선보이는 자리이므로 책임이 무겁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타인의 세계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단일한 조각처럼 보이지만 작가가 이룬 세계를 드러내는 단면 또는 응축한 상징이다. 작품을 읽는 것은 한 사람의 우주를 더듬는 일이다.
오랜 친구의 작업실을 방문했다가 함께 저녁을 먹었다. 한참 근황을 떠들다 보니 서울에 올라가는 길이 막힐 즈음이 되어, 밥이나 먹고 가자며 레지던시 근처의 식당에 들른 터였다. 곧 열릴 개인전과 도록 이야기를 꺼낸 친구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빙빙 돌다 어렵사리 글을 부탁한다는 말을 꺼냈다. 너무도 그다워서, 쓰겠다고 즉답하며 웃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완연할 무렵 도착한 전시장은 초록 일색이었다. 도시 외곽의 레지던시에서 머무는 동안 수집한 파편들이라고 했다. 그의 발걸음을 따라 나 또한 눈으로 걸어 보았다. 넓어졌다 좁아지는 화면을, 전시장의 높낮이에 따라 오르내리는 시선을, 한낮의 해가 빛났다가 이내 어둡고 깊어지는 시간을 따른다. 내가 모르는 길을 걷는 그의 리듬을 상상하며, 그가 눈으로 본 것 중 화폭에 담은 것과 탈락시킨 것들의 차이를 구분한다. 창밖으로 초록 풍경이 가득한 이 전시장을 고른 이유나, 그림이 배치된 순서가 갖는 의미를 가늠해 본다.
당신의 시선에 나의 시선을 포개는 동안, 십수 년간 알고 지낸 사람이 문득 낯설어졌다. 이 작가는 잡초의 결과 나뭇잎의 맥을 섬세하게 짚는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에서 경쾌한 리듬을 발견하고 구석으로 밀려난 사물들을 다정하게 데려온다. 함께 나눈 대화나 부딪힌 술잔으로는 알 수 없던 이야기를 듣는다. 춤추는 듯 가벼운 터치에서 드러나는 흥, 흐르는 대로 둔 물감의 흔적에서 배어나는 과감함, 조심스럽게 돌리는 말투처럼 망설인 붓 자국이 보이는 틈에서 이내 내가 알던 사람을 다시 발견한다. 그렇지, 심심한 평면이 아니라 재미있는 굴곡을 지닌 단단한 입체였지.
작품은 하나의 언어다. 작품과 독자 사이에서 쓰는 일은 번역과 비슷하다. 존 버거는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에서 “번역은 두 언어 사이의 양자 관계가 아니라 삼각관계”라고 했다. 번역가는 원래의 텍스트 이전에 있던 비전이나 경험에 담긴 조각들을 찾아서 모아야 한다. 예술 작품에 관해 쓰는 일은 작품 이전에 존재하던 것들에 닿으려고 애쓰는 과정이기도 하다. 작가가 전하는 언어는 작품의 얼굴뿐 아니라 그 뒤에 드리운 그림자에도 있다. 때로는 얼굴의 표정보다 그림자의 명암이 더 진하다.
글을 쓰기 위해 작가의 말을 들으며 작품을 바라보는 과정은 어떤 사람의 세계에 잠시 발을 담그고 그가 존재하는 방식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쓰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는 질문을 많이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가 얘기를 꺼낼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고 그의 행간을 읽으려 노력하는 쪽이다. 작업과 일상의 흔적이 묻은 작업실, 과정 중인 작품을 관찰해서 얻어지는 것도 있다.
누군가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표정을 살피는 것처럼, 글이 작품의 뒤를 쫓는다. 만든 이의 시선이 응시하는 방향을 함께 바라보며 그림의 등을 어루만진다. 그때, 작가가 내게 말하고 싶었지만 미처 단어로 내뱉지 못한 것이 보인다. 어렴풋한 그림자의 조각이지만 하나라도 더 주워서 촘촘히 이어 본다. 한 사람의 세계를 온전히 알기는 불가능하지만 찬찬히 살피며 주위를 돌아보면 그림자를 이어 내는 일 정도는 가능하다. 그렇게 발견한 것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이제 나의 언어를 더한다. 흰 종이 앞에 앉아 글을 읽을 당신을 떠올린다. 이어 낸 그림자는 곧바로 글자가 되어 쏟아지지 않는다. 끝까지 붙잡아 표현하는 데에는 끈질긴 사랑이 있어야만 한다. 내가 가진 다정 중 그림의 몫을 떼어 종이 위에 올려둔다.
비평이란 칼을 들어 대상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비평은 의미를 발견하고 드러내는 일이며, 날 선 칼보다는 구체적인 사랑의 눈이 더 필요하다. 물론 번역의 과정처럼 전달되는 사이에 탈락하는 것들이 있다. 아직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은 모호한 개념, 굳이 드러낼 필요 없지만 당연히 존재하는 작가의 노고 같은 것들은 작품과 나 사이에서만 영원히 간직하는 비밀이 되기도 한다. 원고를 보내고 마침내 혼자 남았을 때, 나만 아는 등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친구의 전시에 글을 보태고 사계절이 지났다. 어느 날 밤 산책길에 짙은 녹색 나뭇가지가 풍성한 머리채처럼 쏟아졌고, 거리를 밝히는 불빛이 잎새 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바람에 흔들렸다. 그림의 배경과 전혀 다른 길에서 그림 속 장면을 만났다. 그림의 한복판에 서서 내가 몰랐던 그림자를 한 조각 더 건져 올렸다. 전시장에선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당신의 그림자를 잇는다.
작가의 세계는 계속 팽창하고 다음 전시는 곧 돌아온다. 그의 새 전시 이름은 <무해한 헛걸음>이라고 했다. 설명하지 않아도 제목에 담긴 의미를 알 것 같아 배시시 웃었다.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 위해 멀리서부터 말을 빙빙 돌리는 사람처럼, 그의 세계 또한 먼 곳을 돌아오고 있을 테다. 헤매는 여정을 눈치챌 때도, 건네지 못하고 삼키는 말도 있지만, 그저 지켜보기로 한다. 멀리 돌아 더욱 매력적으로 부푸는 세계도 있다. 그렇다면 헛걸음은 헛걸음이 아니다. 지켜보고 기다리는 동안 나의 세계도 부풀어 오른다. 나 또한 멀리 돌아도 괜찮을 것만 같다.
작품의 뒤를 쫓으며 발자국을 포갠다. 그림자를 잇는 마음이 쌓이고 마침내 단어가 되어 쏟아진다. 단어들은 종이 위에 올려둔 다정과 함께 또 다른 이의 마음에 닿을 것이다. 타인의 세계는 아무리 그림자를 이어 붙여도 닿을 수 없는 원경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렇게 먼 풍경을 향해 나란히 걷는다. 서로의 세계에 발을 걸친 채, 따뜻한 눈으로 등을 쓰다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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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가. 예술과 도시, 사람의 마음을 관찰하며 목격한 아름다운 장면의 다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현대미술과 도시문화에 관한 글을 다수 매체에 기고하며, 대학과 기관, 문화 공간 등에서 글쓰기와 현대미술 강의를 한다. 비평지 <크리티크 M>의 편집위원이며, 예술 감상 워크샵, 라디오 방송 등 예술과 사람을 잇는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쓴 책으로 『당신을 보면 이해받는 기분이 들어요』(2023), 『필연으로 향하는 우연』(2023), 『반짝이는 어떤 것』(2022), 『보통의 감상』(2020), 『마리나의 눈』(2020)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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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저/<김현우> 역10,000원(0% + 5%)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오랜 시간 동안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한 것은 무언가가 말해질 필요가 있다는 직감이었다. 말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아예 말해지지 않을 위험이 있는 것들. 나는 스스로 중요한, 혹은 전문적인 작가라기보다는 그저 빈 곳을 메우는 사람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자화상」 『우리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