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에 당당히 맞서는 '부엉이처방전'의 뇌전증 일기
『뇌전증 일기』 부엉이처방전 저자 인터뷰
작가 '부엉이처방전'은 "나부터 숨지 않기로 했다"며 『뇌전증 일기』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고, 나아가 더 많은 뇌전증 환자와 보호자에게 유용한 정보까지 그려냈다. (2023.05.22)
『뇌전증 일기』는 그동안 알고 싶었지만 찾을 수 없었던, 진짜 뇌전증 이야기를 솔직하고 유쾌하게 담은 국내 최초의 뇌전증 만화다. 뇌전증은 국내 환자 약 37만 명으로 치매, 뇌졸중과 함께 3대 신경계 질환으로 불리지만 제대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는 병이다. 특유의 증상 때문에 '귀신 들린 사람', '불치병'과 같은 오해와 사회적 편견도 여전하여 많은 환자들이 자신의 병을 숨기려 한다. 작가 '부엉이처방전'은 "나부터 숨지 않기로 했다"며 『뇌전증 일기』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고, 나아가 더 많은 뇌전증 환자와 보호자에게 유용한 정보까지 그려냈다.
「작가의 말」을 통해 "혼자 오래 고민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고 싶었다"고 남다른 소회를 밝히셨는데요. 출간 후 소감이 궁금합니다.
속으로 곪아 들어가던 걸 완전히 터트린 기분이에요. 정말로 오래 고민했던 이야기였어요. 『뇌전증 일기』를 그리겠다고 결심을 굳힌 후에도, 내 질환이 노출되면 언젠가 사회적으로 불이익이 있지 않을까, 하며 한참을 걱정했으니까요. 뇌전증은 아직 우리 사회에선 밝히기엔 각오가 많이 필요하다 생각해요. '숨겨야 하는 병'이라는 뿌리 박힌 인식과 함께, '뇌전증'이라는 병명은 각종 불미스러운 일들로 뒤덮여 뉴스에 나와요.
미디어에 등장하는 뇌전증은 대부분 몸을 뒤틀면서 발작을 일으킨다는 자극적인 이미지나 비극을 강조하는 장치로 사용되지요. 심지어 『뇌전증 일기』 출간 전까지는 뇌전증에 관해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이 국내에 한 권도 없었어요. 앓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공감으로 얻는 힘은 굉장히 큰데, 이쯤 되면 얼마나 많은 환자들이 고립되어 답답함을 느꼈을까 싶었어요. 한 발자국 먼저 다가가는 심정으로 그렸고, 지금은 굉장히 만족스럽습니다.
『뇌전증 일기』는 작가님 SNS에 올라온 짧은 기록 만화를 바탕으로 기획되었는데요. 당시에도 SNS 곳곳에 있던 뇌전증 환자분들의 뜨거운 호응이 기억에 남습니다. 책 출간 후에도 응원의 물결이 이어졌어요. 특별히 인상 깊었던 독자 후기를 소개해주세요.
출간 후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보내주신 한 뇌전증 환자 독자님의 후기가 기억에 남아요. 독자님의 연인이 뇌전증에 대해 공부하겠다며 『뇌전증 일기』를 사서 읽어보셨다고 해요. 그 독자님은 제 케이스와 비슷하게 중학생 때 경련이 시작되어 투병 중이라 하셨어요. 여태껏 자신의 병에 대해 당당하지 못하다가, 책을 접하고 나서 '뇌전증'이라는 질환 자체에 대해 더 깊게 알게 되었고, 책을 내줘서 감사하다는 내용으로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주셨어요. 그걸 읽는 순간 '책을 낸 보람이 있구나!' 싶어 벅차올랐습니다. 환자와 주변인들이 함께 읽으며 뇌전증이 어떤 질환인지 이해하고, 환자들이 가정, 학업, 사회에서 어떤 고충을 겪을 수 있는지 알아주었으면 했거든요.
작가님은 중학생 때 뇌전증 진단을 받은 뒤 계속 약물을 통해 증상을 조절하고 계세요. '뇌전증 환자'라서 가장 서러웠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환자들이 으레 복용하는 뇌전증 약의 부작용 중 '졸음'이 저한테는 심하게 나타나는 편이었어요. 고등학교 2학년 첫 수업 시작 날, 아침 약을 먹고 등교했는데, 영어 수업 시간에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책상 위에 반쯤 쓰러져서 졸음과 싸웠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이런 학생에게는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며 절 교실 밖으로 내쫓았던 기억이 나요. 첫날부터 수업도 듣지 못한 채 한 시간을 바깥에 서 있다가, 선생님께 가서 뇌전증을 앓고 있고 약물 부작용으로 졸음이 온다고 얘기했지만 "네가 조는 이유는 약물 부작용 따위가 아니라 공부를 할 의지가 없는 것"이라며 혼나고는 교무실에서 쫓겨났어요. 아직도 그 기억만 떠올리면 마음이 울적해지곤 해요. 뇌전증을 앓는 학생들이 어떤 일을 겪는지 선생님이 정확히 알았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죠.
그럼에도 뇌전증 환자가 아니었다면 얻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소중한 순간들도 있었을 것 같아요.
뇌전증은 제게서 평범한 청소년기와 함께 뇌 기능도 크게 앗아가 아직까지 인생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때문에 소중했던 순간을 꼽긴 힘들지만, 어찌 보면 정신적으로 좀 성숙해질 기회를 얻었다고도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뇌전증 일기』를 세상에 내놓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병에 대한 분노를 삭이고 이성적으로 다가가 생각하는 방법을 얻었거든요. 또, 제가 뇌전증 환자가 아니었다면 한국뇌전증협회의 회보인 「정담」의 연재 작가가 되어 독자분들께 구체적이고 생생한 경험담을 내놓을 수도 없었을 테고요. 한국뇌전증협회 시상식 때 유명한 작가님들 사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도 없었겠죠? 또, 환자 당사자가 아니었다면 별생각 없이 '지랄'이란 말을 내뱉고 다녔을지도 모르겠어요.
『뇌전증 일기』 작업 중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하필이면 뇌전증은 그 복잡하다는 뇌질환 중에서도 원인과 증상이 매우 다양하고 어려운 편이에요. 의사 선생님들께서 보내주신 자문을 한 문장씩 정리해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으로 연출해내는 과정이 가장 어려웠어요. '아니, 이거 분명히 쉽게 써주신 게 맞는데', '국어 공부 좀 더 열심히 할걸' 하고 한 문장을 읽을 때마다 머릿속에서 맴도는 각종 후회들을 삼키며 밤새 공부하는 학생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가장 즐겁게 그렸던 장면이나 그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발작 중에 보이는 환각을 그림으로 묘사해보겠다는 결심이 이 만화를 그린 이유 중 하나였어요.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당시에 본 것을 잊지 않고자 그림으로 그렸을 정도로 제 발작의 형태는 시각적으로 굉장히 강렬하거든요. 본문에 나온 것처럼 새빨갛고 녹슨 듯한 어두운 길거리, 햇빛이 쨍한 해바라기 밭으로 보이는 무언가, 계절을 전혀 가늠할 수 없지만 가을로 추정되는 숲속, 지평선을 향해 천천히 추락하는 거대한 비행기 등. 단순히 알록달록한 그림들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작업하면서 가장 즐겁게 묘사한 장면들이었어요.
최근 플랫폼 웹툰 연재도 시작하셨어요. 독자들에게 어떤 만화가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제 작품을 읽은 사람들에게 친근한 만화가로 기억되었으면 좋겠어요. 반려 오리 이야기였던 첫 책 『오리 집에 왜 왔니』부터 『뇌전증 일기』를 그릴 때도, 새로 연재를 시작한 웹툰 <파닥파닥 대왕이네>에서도 항상 어떻게 하면 무겁지 않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까 많이 생각하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부엉이처방전 중학생 때 뇌전증 진단을 받았고, 지금까지 약을 복용하며 지내고 있다. 한국뇌전증협회 소식지 <정담> 연재 작가로 활동 중이며, 2023년 뇌전증 인식 개선에 앞장선 사람에게 수여하는 Purple Light Award를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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