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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은의 반짝이는 진열장] 이상한 엄마들

<월간 채널예스> 202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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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표는 가늘고 길게 살아남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취향을 더 분명히 파악하는 반면 남의 호불호에 휘둘리지 않는 뻔뻔함과 덤덤함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야 일단 길게 버틸 수 있다. 나는 재밌는 일을 오래오래 하고 싶은 사람이니까. (2023.05.09)

일러스트_이유진

얼마 전에 막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길복순>을 보았다.

'헉, 이벤트 회사에 다니는 줄 알았던 엄마가 사실은 업계 톱 킬러?'

학창 시절 각종 애니메이션과 해외 드라마에 빠져 살았던 나는... 이런 걸 좋아한다. 한마디로 취향이다. 기대했던 대로 <길복순>은 러닝 타임이 짧은 영화라는 사실이 아쉬울만큼 재밌었고, 나는 오래간만에 너무 좋아서 주먹을 꽉 쥔 채로 완주했다. 취향이 비슷한 동생과 중간중간 일시 정지를 해놓고 소리를 지르거나 "너무 좋다... 너무 재밌다..."를 반복하느라 2시간 17분짜리 영화를 3시간 동안 봤더랬다. 세상에 좋은 작품은 너무 많지만, 취향에 완전히 맞는 작품은 은근히 찾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길복순>은 내 취향에 너무나 부합하는 영화였고, 나는 덕분에 세 시간 동안 행복했다.(나의 내밀한 취향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 같아 조금 부끄럽다)

영화가 끝난 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야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 불호 포인트인 사람도, 킬러 에이전시 같은 전체적인 설정 자체에 몰입할 수 없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의 취향이란 얼마나 섬세하고 다양한지. 덕분에 의외의 위로를 얻기도 했다. 나는 소설을 쓰면서도 결국 내가 재밌는 걸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 한들 직업이 되는 순간 마냥 즐겁기만 할 수는 없다. 전업을 시작한 후에는 그 때문에 소위 말하는 '현타'를 겪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받아들인 상태다. 앞으로도 쓰면서 충분히 즐거웠던 소설의 반응에는 의연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내 목표는 가늘고 길게 살아남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취향을 더 분명히 파악하는 반면 남의 호불호에 휘둘리지 않는 뻔뻔함과 덤덤함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야 일단 길게 버틸 수 있다. 나는 재밌는 일을 오래오래 하고 싶은 사람이니까.

<길복순>과 함께 깨닫게 된 내 취향이 하나 더 있는데, 아무래도 이상한 엄마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이상한 엄마들이 나오거나 엄마들이 이상해지는 이야기. 넷플릭스를 처음 결제했을 때, 제일 먼저 정주행한 드라마는 당시 가장 화제작이었던 <기묘한 이야기>가 아니라 <굿걸스>였다. 평범한 주부였던 주인공이 어떤 사건에 휘말려 카리스마 있는 마약 유통업자로 거듭난다는 내용이다. 시즌1에서 주인공 '베스'는 친구들과 전국의 월마트에서 물건을 구매–환불하며 돈세탁을 한다. 멕시코 국경을 넘으며 친구는 말한다.

"아무도 우리처럼 평범하고 해맑은 주부가 뭔가를 숨기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할 거야."

바로 그 의외성이, 내 심장을 뛰게 하는 요소다.(물론 실제 국경 검문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을 테지만 드라마를 즐기기엔 충분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분을 숨긴 히어로물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평범했던 주인공이 새롭게 거듭나는 이야기. 그렇게 얻게된 진짜 힘을 숨기고 결정적인 순간 활약하는 이야기. 하지만 주인공이 '브루스 웨인'인 것과 아이가 둘에 바람난 남편을 둔 주부인 건 분명 다르다. 베스의 일탈은 어떤 스테레오 타입을 깨는 과정이고, 그 범법의 여정에서 베스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진다. 이상한 엄마들의 갈등은 여기부터 극대화한다. 새로운 세계를 앞둔 엄마는 선택을 해야 한다. 자신의 원래 세계인 가족과 어디까지 뻗어 있을지 모를 욕망의 지도 사이에서. 이 극단적인 갈등 상황은 사실 범죄 집단을 일반 직장으로 치환하면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의 엄마들은 엄마가 되기를 마음먹은 순간부터 매일같이 크고 작은 선택을 마주해야 한다. 마음이 가는 선택지와 다수를 위하는 선택지는 절대 겹치지 않고, 힌트를 던져주는 목소리도 없으며 결국은 포기의 연속이다. 나는 베스가 행복해지기를 가장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무자비하게 선을 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한 회한 회를 따라간다. <굿 걸스 시즌1>의 마지막화는 총성과 함께 끝난다. 시즌4까지 나왔던데, 나 역시 아직 시즌2밖에 보지 않아 최근의 베스가 어디까지 달려나갔는지는 모른다. 아껴보려고 미뤄뒀더니 순식간에 시즌이 불어나 정주행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도 있지만, 너무 몰입한 나머지 베스의 머리 아픈 상황에 함께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다. 과몰입이 이래서 안 좋다.

일러스트_이유진

위의 두 작품에서 이상한 엄마들은 저마다의 선택을 하기까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한다. 가족에게 비밀을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무엇 하나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 어느 시점부터는 급류에 휩쓸리듯이 끌려가 원치 않는 지점에 도달한다. 그리고 주인공을 그 지점에 두기까지, 곁에서 부지런히 일렁이는 다양한 캐릭터가 있다. 딱 작년 이맘때에 JTBC에서 방영한 <그린마더스클럽>은 주인공을 둘러싼 캐릭터 대부분이 엄마인, 일종의 엄마 군상극(?)이다. 어떤 엄마는 이기적이고, 어떤 엄마는 위험하며 어떤 엄마는 현실을 부정한다. 이 무수한 엄마들이 저마다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마구 뒤엉켜 구르는데 재미가 없을 수가. 신혼부부가 많은 고급 아파트 단지는 난장판이 되고,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불길하게 울려 퍼진다. 아기자기한 온실 같은 포스터 속의 이야기는 대차게 파국으로 질주한다. <그린마더스클럽>이라는 제목이 사실 '녹색어머니회'를 뜻한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주인공 은표를 포함해 이야기 속 엄마들은 서툴기만하다. 의사 아내(춘희)는 비밀을 숨기고 엄마들의 커뮤니티 안에서 왕처럼 군림한다. 커뮤니티에 속할 필요 없는 꼭대기 층 엄마(진하)는 막 이사 온 옛 친구를 자극하며 우울의 늪으로 들어간다. 막 이사 온 주인공 은표는 대학교수라는 오랜 꿈과 육아 사이에서 홀로 갈등한다. 누구보다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학부모회 엄마(영미)는 자신의 과오를 마주해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그들은 과거에서 온 오해와 질투를 두르고 편견을 방패 삼아 마구 실수를 저지른다. 언뜻 정상인 캐릭터가 한 명도 없는 듯하지만, 이 드라마의 매력은 바로 캐릭터의 입체성에 있다. 맘카페와 학원, 영재 입시과 학부모회 등으로 촘촘히 연결된 엄마들은 수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한다. 일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에서 끝나는 캐릭터는 한 명도 없다. 섬세하게 짜여진 감정선은 그 자체로 스릴을 선사한다.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이고, 사과하거나 용서한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 나의 적이 되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된다.

영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비호감 캐릭터를 끝내 이해하게 될 때, 납득할 수 없었던 선택을 납득하게 될 때, 이야기는 봄비를 머금은 화초처럼 싱그럽게 살아난다. 엄연한 부피를 가진 인간을 '밈'화하여 손뼉으로 잡은 모기처럼 얄팍하게만 바라보는 요즘 세상에, 엄마들 한 명 한 명이 분명한 입체감을 드러내는 이런 작품은 소중하다. 앞에서 취향에 맞는 작품을 찾는 건 좋은 작품을 찾는 것보다 어렵다고 적었는데, 나에게 <그린마더스클럽>은 그 둘 모두에 부합하는 드라마였다.



작년 늦봄은 일주일에 두 번 방영하는 드라마 덕에 힘을 내서 단편집 마감을 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땐 다음 화를 보려면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는 드라마가 싫었는데, 이제는 일부러 매주 챙겨 볼만한 콘텐츠를 찾게 된다. 나에게 취향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일은 건전지와 같아서, 그 설렘과 즐거움으로 일상을 활기차게 유지할 힘이 생긴다. 취향에 맞는 작품을 발견하지 못하면 쉽게 무기력해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매일매일 하이에나처럼 서점과 영화관과 OTT 채널을 맴돈다. 최근엔 박서련 소설가와 정영롱 만화가가 함께한 『제사를 부탁해』를 읽었다. 여기에도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상한 엄마가 나온다. 짧은 이야기였음에도 마지막 장에 울컥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서 얻은 힘으로 이 칼럼을 쓴다. 내가 만든 이야기도 누군가에게 그런 건전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한다.



제사를 부탁해
제사를 부탁해
박서련 저 | 정영롱 글그림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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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예은(소설가)

소설가.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칵테일, 러브, 좀비』, 『트로피컬 나이트』 등을 썼다. 스릴러, SF, 호러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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