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력 특집] 지금 언어 감수성을 업데이트 하시겠습니까?
<월간 채널예스> 2023년 3월호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고 '언어 감수성'이 있다면 이천 냥 빚 정도를 갚을 수 있다. 그럴 의도는 없었더라도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이제는 쓰지 말아야 할 말들을 모았다. (2023.03.23)
<수상한 문해력> 두 번 세 번 읽었는데 남는 게 없는 것 같다. 모바일 기기 화면으로 읽어서 그런가? 나는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닌데 누군가를 소외시키지 말라는 피드백을 받는다. 지금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아니, 근데 이 계약서는 왜 이렇게 복잡하게 쓰여 있는 거야? 별개의 상황 같지만 실은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고도로 복잡한 텍스트를 읽고 쓰면서 살아가고, 우리가 이해한 텍스트들은 소통의 기초가 된다. 3월의 목표는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어제보다 오늘 더, 문해력과 언어 감수성을 키워보자! |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고 '언어 감수성'이 있다면 이천 냥 빚 정도를 갚을 수 있다. 그럴 의도는 없었더라도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이제는 쓰지 말아야 할 말들을 모았다. 운영 체제의 업데이트를 미루고 미루다 보면 버벅거리는 스마트폰처럼 우리의 사고방식이 꼬이지 않도록 낡은 언어는 떠나보내고 새로운 언어로 채워볼 수 있기를 바라며.
2021년 기준 우리나라 개인 투자자 수는 1000만 명을 돌파했고, 개인 투자자가 단기간에 큰돈을 벌게 되면서 금융 투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거대한 전환을 맞이했다. 모든 매체에서 투자 비법이 쏟아졌고 사람들은 쓸 만한 재테크 조언을 분별하는 데에도 주어진 시간을 써야만 했다. '주식'과 '어린이'를 조합한 '주린이'는 이제 막 주식을 시작한 초심자를 지칭하기 위해 쓰였다. 이 말은 어른은 완성된 존재이고 어린이는 미숙하며 불완전한 존재임을 전제로 한다. 어린이부터 존중하자.
"어린이는 어른보다 작다. 그래서 어른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큰 어른과 작은 어린이가 나란히 있다면 어른이 먼저 보일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가 어른의 반만 하다고 해서 어른의 반만큼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작아도 한 명은 한 명이다. 하지만 어떤 어른들은 그 사실을 깜빡하는 것 같다."
김소영 지음ㅣ사계절
영국의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는 '2023년 저널리즘, 미디어 트렌드 전망 보고서'에서 미디어 소비자들이 느끼는 '피로'를 주요한 키워드로 언급했다. 구독 중인 여러 서비스를 눈앞에 두고 볼 것이 많다는 감각에 사로잡혀 뇌가 과부하된다. 한편 매일 점심 메뉴를 결정할 때마다 기회비용을 셈하게 된다. 한식, 일식, 중식을 한 번에 먹을 수는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인생의 크고 작은 선택지들 앞에서 최종 순간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우유부단한 심성을 가진 이들이 '결정 장애(선택 장애)'를 호소한다. 그런데 그게 정말 자기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장애'에 속한 것일까?
"결정 장애라는 말이 왜 문제인지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하는 활동가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그는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습관적으로 장애라는 말을 비하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무언가에 '장애'를 붙이는 건 '부족함', '열등함'을 의미하고, 그런 관념 속에서 '장애인'은 늘 부족하고 열등한 존재로 여겨진다."
김지혜 지음ㅣ창비
2022년 어느 날, 고용노동부가 공식 블로그에 '칼퇴를 잊은 사람들에게 야근송'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가 삭제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노동 시간 규제를 담당하는 정부 기관에서 마치 국민의 야근을 장려하는 것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발표한 '2020 한국 기업의 세대 갈등과 기업 문화 종합 진단 보고서'에 따르면, 윗세대는 정시 퇴근을 일에 대한 책임감 부족으로 보지만 아랫세대는 야근을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를 부적절하다고 느낀다.
"사실 칼퇴근은 기업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용어이다. 제시간에 퇴근하는 일을 특이한 현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원칙대로라면 야근이 특별한 이벤트여야 하고, 칼퇴근은 약속된 시간에 퇴근하는 평범한 일일 뿐이다. (...) 유능한 인재가 가끔 운 좋게 칼퇴근할 수 있는 회사와 정시 퇴근이 당연한 회사 중 어디를 선호할지는 명백하다."
홍승우 지음ㅣ웨일북
누군가의 하루는 돈을 받는 노동(임금 노동)으로 채워져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의 하루는 무급의 노동 시간(돌봄 노동, 가사 노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상 청소·요리·육아는 주로 여성의 일이었고, 그들은 어디선가 '내조'를 잘하는 '집사람' 또는 '안사람'으로 소개되었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사람들이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돌봄 노동과 가사 노동이 정당한 보상이 필요한 노동의 일부라는 공감대가 생겨났다. 다른 누군가를 돕는 모습을 '외조' 혹은 '내조'라고 구분 지을 필요도 없다. 배우자가 함께 일을 분업하면 그런 말들은 자연스레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커리어 맨은 없으나 커리어 우먼은 있다. 남성은 누구나 노동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하기에 당연히 직업이 있고 '커리어'를 쌓아야 한다면, 여성은 기본적으로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커리어 우먼은 여성이 일을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렇다면 집 밖에서 노동하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 사람인가. 워킹맘, '맘'의 일 자체가 워킹(노동)이지만 그 워킹은 아무리 해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이다. 그래서 집 밖으로 나가 공식적인 노동을 함으로써 그들은 '워킹맘'이 된다."
이라영 지음ㅣ한겨레출판
여성·평화·장애 운동을 넘나드는 활동가 조한진희가 제안한 '질병권'은 잘 아플 권리를 뜻한다. 이 권리는 트라우마, 조울증,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ADHD) 등 정신적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 어렸을 때부터 '저질 체력'이나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잔병치레를 겪는 사람에게 모두 주어진다.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며 안부 인사를 건넬 때, 알게 모르게 또 다른 누군가를 소외시켰던 건 아닐까? 아픈 몸을 숨기지 않고 '반려병'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건강 지상주의로 흐르는 말들은 질병을 앓는 사람들을 패배자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도 사랑을 하고 즐거움을 느끼고 노력하고 성취도 이룬다. 따라서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거야'라는 말은 그들의 삶과 이야기를 송두리째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는 표현이다."
김하나 지음ㅣ콜라주
'이 표현 써도 괜찮을까?' 글을 쓸 때마다 혹시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는 건 아닌지 조심하게 된다. 무심코 쓰기 쉬운 스무 가지의 말을 모았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은 2018년부터 2020년까지 매해 성평등 주간을 기념해 '서울시 성평등 언어사전'을 발표하며, 법령·행정 용어 등에 남아 있는 성차별 언어를 바꾸자고 제안해 왔다. 육아 관련 용어에 엄마를 지칭하는 '맘(mom)'이나 '어미 모(母)'가 들어가면 육아의 책임이 엄마에게만 있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러한 표현들을 부모 공동의 책임을 담는 방향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서로 다른 지역·단체가 교류할 때 쓰이는 '자매결연', 스포츠가 남성적인 활동임을 전제하는 '스포츠맨십', 소득과 매출 증대에 영향을 준 상품을 아들로 비유한 '효자 상품' 등도 성 중립적인 단어로 대체하면 어떨까.
육아맘 → 주 양육자
유모차 → 유아차
저출산 → 저출생
자매결연 → 상호 결연
스포츠맨십 → 스포츠 정신
효자 상품 → 인기 상품
성 차별적인 언어 가운데는 일터에서 혹은 일을 둘러싼 역할 관계에서 잘못 쓰이는 표현들이 있다. '경력 단절 여성'은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여성의 가사 및 돌봄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뜻이 담겨 있어 대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집안일이 며느리의 몫이라는 걸 암시하는 '며느리 부(婦)'가 쓰인 '가정부' 또한 다른 표현을 권장한다.
칼퇴 → 정시 퇴근
경력 단절 → 여성 고용 중단 여성
외조·내조 → 배우자의 지원
집사람·안사람 → 배우자
가정부 → 가사 도우미
여배우 → 배우
어린이, 결혼하지 않은 여성, 조금 일찍 태어난 아이, 부모가 부재한 가정을 미숙한 존재로 바라보는 용어들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서투르고 부족하다는 뜻의 '미숙', 어느 부분이 없거나 잘못되어서 불완전하다는 뜻의 '결손'을 대체할 수 있는 표현들이 있다. 한편, 경계해야 하는 인물이나 단체를 지칭할 때 쓰여 온 '블랙 리스트(black list)'는 '블랙'이 부정적 어휘고 '화이트'는 긍정적 어휘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조장하며, 더 나아가 특정 인종이 더 우월하다는 사고를 부추긴다. 이 표현 대신 '차단해야 할 상대'라는 의미를 담은 '블록 리스트(block list)'가 조금씩 쓰이기 시작하는 추세다. '몰래카메라'는 범죄 행위를 상대적으로 가볍게 지칭하고 있으므로 보다 더 명확한 표현인 '불법 촬영'으로 바꾸어 써야 한다.
주린이 → 주식 초보자
처녀작 → 첫 작품
미숙아 → 조산아
혼혈아 → 다문화가정자녀
결손가정 → 한부모가정
결정 장애·선택 장애 → 결정 느림보
블랙 리스트 → 블록 리스트
몰래카메라 → 불법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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