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력 특집] 오늘도 사전을 들춰보는 사람들
<월간 채널예스> 2023년 3월호
드넓은 언어의 세계에서 사전을 들춰보는 게 일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번역가, 빅 데이터 연구원, 시인, 사회언어학자의 시선으로 쓴 언어 에세이 4권을 살펴보자. (2023.03.22)
<수상한 문해력> 두 번 세 번 읽었는데 남는 게 없는 것 같다. 모바일 기기 화면으로 읽어서 그런가? 나는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닌데 누군가를 소외시키지 말라는 피드백을 받는다. 지금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아니, 근데 이 계약서는 왜 이렇게 복잡하게 쓰여 있는 거야? 별개의 상황 같지만 실은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고도로 복잡한 텍스트를 읽고 쓰면서 살아가고, 우리가 이해한 텍스트들은 소통의 기초가 된다. 3월의 목표는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어제보다 오늘 더, 문해력과 언어 감수성을 키워보자! |
어제까지 몰랐던 단어를 알게 되면 반갑게 메모장을 펼치지만, 뜻을 완전히 잘못 알고 있던 말을 발견하면 얼른 주워 담고 싶어진다. 드넓은 언어의 세계에서 사전을 들춰보는 게 일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번역가, 빅 데이터 연구원, 시인, 사회언어학자의 시선으로 쓴 언어 에세이 4권을 살펴보자.
홍한별 지음ㅣ위고
질문의 전제 조건은 '앎'이다. 내가 모른다는 걸 알고 있는 상태. 언젠가 수업을 마칠 때마다 얼마든지 자유롭게 질문하라고 했던 선생님을 향해 차마 손을 들지 못했던 건, 질문하기 부끄러워서만은 아니었다. 정말 뭘 모르는지 알지 못했던 탓이다. 52번째 <아무튼> 시리즈는 『클라라와 태양』,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등을 작업한 번역가 홍한별의 『아무튼, 사전』이다. 각종 백과사전과 어학 사전, 지도책을 보며 자란 그는 다음과 같이 사전을 정의한다. "지금은 내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더라도 앞으로 지식에 부족함을 느낄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한 책"이라고. 홍한별의 사전은 그런 것도 모르냐며 독자를 탓하지 않을 만큼 너그럽고 품이 넓다.
온라인 사전에 어떤 단어를 검색하게 될 때면, 첫 번째 뜻을 빠르게 살펴보고 기껏해야 두 번째 뜻까지만 살펴보지 않는지? 그러나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run'이 '달리다'를 포함해 600개 이상의 의미로 쪼개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아득해진다. 600개 중에서도 그 자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뜻을 찾아내는 게 번역가의 일이라는 걸 알게 되면 응원을 보내고 싶어진다. 그리고 역사 속에는 이렇게 개별 의미를 채워 넣으며 후대 번역가들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렸던 집요한 사전 편찬자들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동료 번역가 노지양과 함께 쓴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에서 '원문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 스산함, 슬픔, 따뜻함, 고요함, 충격, 통렬함을 조심스럽게 내 언어로 어루만져 이루어내는 일'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랑, 외로움, 노화는 사전적 정의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사전에 기록되어 있더라도 직접 경험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인간의 감정들이 많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자 '자명한 진실'이기에.
안희연 지음ㅣ한겨레출판
뭐 하나에 꽂혀서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야기를 읽고 있다가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머무르게 돼서 방금 무엇을 읽었는지 잊어버리고 마는 일이 가진 중독성을 말이다. 시인 안희연은 이러한 자신의 독서 패턴을 '생산적 난독'이라고 부른다. 이야기의 마지막을 향해 가지는 못하더라도, 오늘 이끌린 단어에서 출발해 어디든 도착하기 때문에. 『단어의 집』에 실린 45가지의 단어는 생산적 난독의 결과다. 안희연은 먼저 자기 몸을 자석이라 여기며 틈틈이 모은 단어들을 몸에 착 붙여본 후 무엇이 남았는지 살폈다. 그럴 때 자꾸만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건 아무리 근사하더라도 버리고, 시간이 지나도 계속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들만 모았다.
시를 쓰는 그에게 있어 단어는 자신을 이루는 피와 살처럼 느껴지지만, 때로 영혼의 척추가 아픈 느낌마저 들게 한다. 스포츠의 세계에는 '버저 비터'가, 클래식의 세계에는 '흑건'이, 낚시의 세계에는 '루어'가, 식물의 세계에는 '적산 온도'가 있다. 그는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림과 동시에 골대를 향해 던져진 골('버저 비터')을 보며 찰나의 순간까지 진심을 다한 적이 언제였는지 되돌아본다. 식물마다 꽃이 피기까지 필요한 온도('적산 온도')를 통해 자신 안에 있는 것들이 마침내 세상을 향해 피어나는 날을 꿈꾼다. '잔나비걸상'은 의자 이름이 아니라 버섯 이름이다. 왜 그 버섯은 하필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된 걸까. 단어 생활자가 호기심을 멈출 수 없는 덕에, 우리는 새로운 단어를 여럿 알게 된다. 그가 한 입 거리 떡인 '주악'처럼 간결한 시를 쓰고 싶어 할 때, 우리 역시 덕지덕지 달라붙은 감정을 마음속에서 떼어낼 기회를 얻는다. 그가 멸종 위기 씨앗의 저장고인 '시드 볼트'를 보며 자신만의 글감 저장고를 살피고 있을 때, 거기까지 읽은 독자는 이미 다음 글을 기다리고 있다.
정유라 지음ㅣ인플루엔셜
원래부터 사전에 '구독자'라는 말이 있었지만, '팔로워', '팔로잉', '맞팔'(SNS에서 서로 팔로워를 신청한 사이)은 온라인에 새로운 방식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생겨난 새로운 관계 언어다. '인친'(인스타그램 친구)이나 '트친'(트위터 친구)은 그 누구보다 서로의 근황을 꿰뚫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관계성을 가진다. 우리는 피를 나누지 않았어도 기꺼이 누군가의 '랜선 이모', '랜선 집사'(SNS 친구의 아이 또는 반려동물을 관심 있게 지켜보는 상대)가 되기를 자청하기도 한다.
빅 데이터 연구소 바이브컴퍼니의 정유라 연구원은 사람들이 온라인 공간에 남긴 소셜 빅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한다. 그 자료들은 키보드와 스마트폰의 자판을 터치해서 쓰는 '손말'이다. 각종 줄임 말과 신조어, 해시태그 같은 손말을 통해 말의 지형도를 읽고 변화하는 시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울드는 일단 작감배 열일하고, 본체 케미 쩔고, 회차별 럽라 감정선 빌드업도 쩔고, 떡밥 회수도 모조리 하고, 성장 서사도 완벽하고, 막화에 키갈로 마무리하는 꽉 닫힌 해피 엔딩."*
K-드라마 덕질을 위한 기초 용어에 대한 설명이 필요 없는 이들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번역이 필요하다. 이는 선을 가르기 위한 언어가 아니며,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이 자신의 덕후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단이라는 것. 정유라는 결국 저마다의 삶이 각자 자주 사용하는 어휘와 같아질 것이라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자주 짓는 표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느냐고 되물으려는 사이, 표정이 나라는 사람의 인상으로 굳어진다. 말도 다를 게 없다. 자주 쓰는 언어는 '언상'이 된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된다."우리 드라마는 일단 작가·감독·배우가 모두 열심히 일하고, 드라마 주연 배우들의 궁합이 좋고, 회차별 러브 라인 간의 감정선 구축도 촘촘하고, 뿌려놓은 복선도 모두 풀어주고, 주인공들이 성장하는 서사의 완성도도 훌륭하고, 마지막 화는 키스 신으로 마무리한 확실한 해피 엔딩." |
백승주 지음ㅣ타인의사유
드라마 <일타 스캔들> 속 '일타'는 과목별로 수강생이 가장 먼저 모집되는 '일등 스타 강사'의 줄임 말이다. 사교육의 성지 녹은로에서 '국가대표 반찬가게'를 운영하는 행선은 자녀가 일타 강사의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새벽부터 엄마들이 학원 앞에서 줄을 서는 게 마땅치 않다. 어느 날 김치를 담그던 그는 대한민국의 사교육 과열과 4차 산업 혁명을 연관 짓는다. 옆에서 그게 정확히 뭐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그거, 그거 네 번째니까 그거 4차 산업 혁명."
만일 『미끄러지는 말들』의 저자가 우연히 '국가대표 반찬가게'에 들렀다면 그들은 말이 잘 통했을 것이다.
"4차 산업 혁명이 뭔가요? 4차 산업 혁명은 네 번째 산업 혁명이라는 뜻이에요. 어차피 몇 번째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좋은 거 하자는 거지. (...) 뉴 노멀이 뭔가요? 갑자기 안 시키던 거 시켜도 그러려니 하며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그냥 하라는 뜻이에요."
언어 사회학자 백승주의 시선에서, 자본의 언어는 도무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정책 결정권자의 공허한 구호일 뿐이다.
한국어교육원에서 외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서, 그는 첫 수업에서 실은 자신 역시 외국인이라고 소개한다. 단일 민족성이 강한 한국인들 사이에서 제주도 출신의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표준어를 구사하는 혀와 제주어를 구사하는 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표준어를 쓰게 된다. 서울 중심주의라는 위계가 언어에도 스며드는 것이다. 그렇게 방언, 토착어, 외래어를 사전에서 없애고 '고유하고 순수한 한국어'만 남기려는 사람들이 오히려 일상에서는 혐오와 차별을 일삼는다는 걸 발견한다. 그는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준 게 '자매들의 언어'라고 말한다. 남자가 한 명도 없는 직장의 남자 선생님으로서, 위계와 복종의 언어가 아니라 평등하게 삶과 의견이 공유되는 언어를 배웠다는 고백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시시콜콜한 수다로만 보인다는 걸 아이러니하다고 느끼면서. 책 제목에 있는 미끄러지는 말들은 너무나도 많다. 정확하게 상대에게 가닿지 못하는 말들. 이를테면 끊임없이 유포되는 '혐오의 헛소리'와 외로이 외치는 '트라우마 생존자의 증언', 자신을 자매들의 언어가 있는 곳으로 품어준 사람의 '부고'의 말이 그렇다.
추천기사
관련태그: 채널예스, 예스24, 채널특집, 문해력, 아무튼사전, 미끄러지는말들, 단어의집, 말의트렌드,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