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불후의 칼럼 > 김혜경의 볼만한 세상
[김혜경의 볼만한 세상] 잘 살고 있나요? 잘 살아 있나요? - <더 글로리>
2화 - 드라마 <더 글로리>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화상은 화상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 글쎄... 그것 너무 페어플레이 같은데요 여러분. (2023.03.21)
김혜경 광고AE가 격주 화요일, 볼만한 드라마와 콘텐츠를 소개합니다. |
"엄마는 내가 누군가를 죽도록 때리면 더 가슴이 아플 것 같아? 아니면 죽도록 맞으면 더 가슴 아플 것 같아?"
고교생 딸이 던진 이 질문에 <더 글로리> 김은숙 드라마 작가는 지옥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는 이어 답했다.
"가해자들을 지옥까지 끌고 갈 돈이 있기 때문에 차라리 (딸이) 맞고 왔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쓰기 시작한 <더 글로리> 속 문동은(송혜교 분)은 자신처럼 딸을 비호해 줄 엄마도, '가해자들을 지옥까지 끌고 갈 돈'도 없다.
학교 폭력, 엄마의 배신, 공권력의 외면. 최소한의 안전망도 없는 폭력을 경험했던 문동은의 삶에는 복수, 오로지 복수뿐이다. 누군가는 잘 사는 게 최고의 복수라지만, 그는 17년 넘게 복수만을 바라보며 살아남는다. 상처가 몸에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마음에는 더 분명하게 흉터로 남은 그의 삶은 지켜보기만 해도 괴롭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1화를 보고 나서 한참 동안 다음 화로 넘어가지 못했다. 청소년들이 끔찍한 폭력을 저지르는 장면들을 보는 게 힘들기도 했고, 자극적인 학폭 장면들이 주인공의 복수에 정당성을 부여할 장치라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끔찍하기도 해서. 나날이 수위를 높여가는 것만 같은 OTT 발 드라마에 대한 반발심도 있었다. 다시 리모컨을 잡게 된 건, 극 중 가해자들이 뜨거운 고데기로 신체 곳곳을 지지는 끔찍한 행위가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인 2006년에 청주의 한 중학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기사를 읽게 된 다음부터다. 가해자를 바라보며 '또 보자'라고 말하던 동은처럼, 17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김은숙 작가가 다시 불러온 피해자들의 시간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겠다는 마음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파상은 파상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 글쎄... 그것 너무 페어플레이 같은데요 여러분."
동은은 잔인하다는 함무라비 법전조차도 페어플레이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게, 그의 복수극은 통쾌하기 전에 지난하다. 복수를 위한 판을 짜는 데만 자그마치 17년이 걸린다. 동은이 폭력을 당하던 나이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복수인 것이다. 그가 온갖 궂은일과 과외를 하며 돈을 벌고, 임용 고시를 준비해 선생님이 되고, 복수를 위한 조력자를 구하는 동안 가해자들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평탄하게 산다. 여전히 아무 일이나 거듭하며 돈도 빽도 믿는 신도 그 어느 것 하나 잃지 않고 잘만 산다. 드라마가 아닌 현실이었다면 그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복수는 시작조차 못 했을 거란 점에서 마음이 더 답답해진다.(실제 초등학교 교사는 각종 업무에 시달리느라 복수는 엄두도 못 낼 거라는 지적이 담긴 '학부모에게 복수하기 위해 초등 교사가 된 송혜교'라는 제목의 글을 보신 분이라면 더 공감하시리라)
폭력으로 말살된 존엄성과 그로 인해 잃어버린 세월은 누구도 보상해줄 수 없다. 다행스러운 점은 '더 글로리'에서만큼은 권선징악, 인과응보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동은의 복수는 몇 수 앞을 염두에 두고 바둑을 두는 고단수처럼 치밀하다. 가해자들은 동은이 짠 판위에서 스스로 파국의 길을 걷는다. 가진 자가 다 잃는 것을 넘어서, 자신들이 가졌다고 생각했던 것들에게 버려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그 모든 순간에 가해자들의 진심 어린 사과가 없는 만큼, 피해자들의 합의도 용서도 없다는 점이 제일 흡족하다. 사적 복수의 옳고 그름을 떠나, 가상의 세상에서만큼은 스스로를 구하는 이야기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좋다.
물과 구원의 공통점은 셀프라고들 한다. 맞다. 음식점에 비치되어 있는 물을 알아서 떠다 마셔야 하듯, 내 문제는 결국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라면 셀프도 정도라는 게 있다. 마실 수 있게 가공된 뒤 통에 담긴 물에 '셀프'라는 말을 붙일 순 있으나, 아무것도 없이 한강 물을 떠다 마시라고 하지는 않는 것처럼. 구원도 누군가 셀프로 해낼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게 사회 정의고 공정이다.
아무것도 그를 구하지 않던 세상 속에서 동은은 사적 복수를 통해 '구원은 셀프'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실천했다. 그렇지만 동은이 진정으로 구원받은 순간은 복수가 완료되었을 때가 아니라, 삶을 끝내지 않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기를 선택했을 때라고 믿는다.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에게도 좋은 어른들이 있었다는걸. 친구도, 날씨도, 신의 개입도요."
김은숙 작가는 '문동은'에게 든든한 조력자를 주었다. 우정으로 포장되었으나 얄팍한 이해관계로 이뤄진 가해자들이 쉽게 분열되는 데 비해, 피해자들은 단단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연대한다. 그들은 서로를 통해 삶의 선택지를 늘려 나간다. 동은은 "맞고 살지만 명랑한 년"인 강현남(염혜란 분)에게 차와 카메라를 주며 스파이라는 역할을, 선아에게 외국에서 자유롭게 공부할 기회를, 주여정(이도현 분)에게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을 준다. 그리고 그들이 있어 동은은 영광과 명예를 되찾을 수 있었다. '나'도 아니고 '그'도 아닌 '우리'였기에 이룰 수 있었던 구원이었다.
드라마가 끝난 지금, 나는 우리 사회의 '박연진(임지연 분)'과 '문동은(송혜교 분)'을 생각하게 된다. '현실판 더 글로리'라며 쏟아지는 기사들 속에서, 어쩌면 드라마와는 다른 전개와 결말로 살고 있을 이들을. 그렇게 해서 잘 살고 있는지, 그럼에도 잘 살아 있는지 묻고 싶다. 생존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가해자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볼 때, 우리의 안전망은 더 촘촘해질 테니까.
추천기사
관련태그: 채널예스, 예스24, 김혜경의볼만한세상, 더글로리, 글로리, 드라마더글로리, 송혜교
회사 다니고 팟캐스트 하고 글 써서 번 돈으로 술집에 간다. 『한눈파는 직업』, 『아무튼, 술집』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