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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의 언박싱 케이팝] 피상과 진심이 뒤엉킨 채 진화하는 케이팝

자유로워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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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제스처들이 쌓여, 피상과 (조금의) 진심이 뒤섞인 케이팝이라는 클레이 덩어리의 지배적인 색조를 바꿔나가고 있다. (2023.03.08)


대중음악 평론가 미묘의 '언박싱 케이팝' 칼럼이 격주 수요일 연재됩니다.
최신 이슈부터 앨범 패키지에 담긴 이야기까지 지금 케이팝의 다채로움을 전합니다.


언스플래쉬

3월 10일 발매되는 'SET ME FREE'의 티저 비디오. 트와이스 멤버들이 화장을 지우고 '민낯'을 드러낸다. 화장이 꾸밈, 거짓, 부담을 상징하며 이를 내려놓음으로써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물론 대중문화에서 수없이 반복된 클리셰다. 그럼에도 이 장면에 시선이 멈추는 건 두 가지 맥락이 있어서다. 어느새 7년 전, 트와이스는 'Likey'에서 "제일 예뻐 보이고파" "멋 부린다는 건 정말 귀찮은 거" / "그렇다고 절대 대충 할 수가 없는걸"라고 노래했었다. 또한, 약 5년 전부터, 여성에게 강요되는 꾸밈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는 취지의 이른바 '탈코르셋 운동'으로 화장을 줄이거나 중단하는 여성이 많아지기도 했다.

물론, 긴 머리에 '순수'를 상징하는 듯한 흰 옷을 입은 트와이스의 날씬하고 통념적으로 아름다운 모습에 '탈코르셋'의 지향점을 비교하는 건 꽤나 허망한 일이다. 그러나 찬성하든 반대하든 젊은 대중에게 큰 파급력을 보인 사회적 움직임이 이 비디오에 살짝 겹쳐보이기는 한다. 특히, 사랑스러운 이미지로 자리매김한 대표적인 아티스트인 트와이스의 선택이기에 조금 더 무게감을 두고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이미 최근 몇 년간 트와이스의 곡들은 보다 열정적이고 단단하고 진지하며 자신감 있는 방향으로 그 인물상을 전환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귀찮지만 꼭 해야 하는 것'으로서의 화장을 부정하는 제스처에 도달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사뭇 연성화된 것이라고 봄이 적확하겠지만 말이다.

얼마전 한류연구센터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나는 케이팝이 표현하는 여성상이 보수적인 듯하지만 분명 변화하고 있고, 또한 그 변화가 동시대의 어젠다와 맞물려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를테면 여성 스타에 대한 폭력적 시선을 폭로하고 비토하는 (여자)아이들의 'Nxde'나, 남성 기획자에 의한 이상적 여성상의 재현에 안티테제를 제시하는 뉴진스 같은 사례다. 르세라핌은 멤버들이 다이어트를 강요 당하는 장면이 포함된 다큐멘터리가 논란을 낳은 바 있는데, 이 역시 억압적인 세계 속에서 정상을 향한 집념을 다지는 그룹 서사의 한 요소로 설명될 수 있다. 아이돌 산업의 기본값으로 거론되는 시선의 문제와 성적물화 등의 이슈까지 건드리는 것은, 순종적 여성의 반대항으로 강한 여성을 제시하는 과거 '걸크러시' 열풍에서 몇 걸음이나 성큼 나아간 것이다. 그 뒤에는, 팬덤의 행동 양식 변화, 여성 아티스트 여성 팬덤의 가시화, 신념에 기반한 여성 아티스트 지지 등, 팬덤 문화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사회적 변화의 교차점에서 등장한 동력들이 자리하고 있다.

물론, 이같은 움직임에 경계의 시선을 유지함이 옳다. 케이팝 산업의 콘셉트가 전부 온전한 '진심'만은 아니다. 시류에의 영합과 몇몇 주체의 의도, 상업적 리스크와 마케팅적 눈길 끌기, 과격한 이미지와 지극히 보수적인 태도 등의 혼탁한 뒤엉킴이 보여주는 한 단면에 가깝다. 언급한 작품들도, 주류 문화 기준에서 과격한 태도를 취할 때마저 음반 소개글에서 "당찬 각오", "당돌한 매력", "통제 불가능한 괴짜 캐릭터"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등의 방식으로 메시지를 희석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치 콘셉트는 콘셉트일 뿐이고 진지한 발언은 아니라고 주장하기라도 하는 듯 말이다. 또한, 시류가 다시 변하면 또 다른 곳에서 영감을 얻어 다른 인물상을 표현하게 되리라는 것 역시 자연스럽게 전망할 수 있다. 나아가, 주류 문화가 소수자 문화의 요소를 함부로 끌어와 사용할 때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의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듯, 케이팝이 동시대의 의제를 '전유'한다고 볼 여지도 있다.

그런데, 케이팝이 한국 대중문화에서 어디까지나 지상파 방송으로 대변되는 주류 문화의 일부임을 간과할 수 없다. 국내 주류 문화로서 국내의 보다 작은 경향들을 '근본 없이' 흡수하고 '전유'해 피상적인 껍데기로 두르면서 진화해 온 것이 케이팝이다. 그럴 때, 상업적 이유든 표피적 멋내기든, 무엇을 선택하는지가 결국 관건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변화하고 있는 젠더 감수성이 조금씩 반영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른바 '래디컬 페미니즘'의 자장에 있는 의제마저 과감하게 끌어오기도 하지만, 반면 '페미니즘의 P'만 나와도 반발하는 '인셀(Incel)' 문화를 흡수하는 작품이 눈에 띄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여전히, 케이팝이 갖는 산업적 특성과 과거의 관성은 많은 윤리적 문제를 내포한다. 일정 이상의 규모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대중 문화 산업으로서, 주류 사회의 규준이나 그보다 격한 반발 역시 케이팝의 족쇄로 자리하고 있다. 또한, 퀴어적 요소를 상술로만 이용하는 '퀴어베이팅(Queerbaiting)'과 마찬가지로, 작품들이 보여주는 작은 제스처들이 전적으로 상업적인 속임수라 의심하는 것 역시 불합리하지 않다. 오히려 반드시 전제해야 할 의심일 수 있다. 그럼에도, 케이팝의 왕성한 소화력은 케이팝을 움직여온 원동력이자, 진보를 희망하게 해주는 하나의 단초다. 아주 작은 제스처들이 쌓여, 피상과 (조금의) 진심이 뒤섞인 케이팝이라는 클레이 덩어리의 지배적인 색조를 바꿔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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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미묘(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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