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혜 "글감이 되는 사람들을 존경해요"
에세이 『살아가는 책』
저는 글감으로 살아남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좋아해요. 만약 누군가 저에게 "너의 사생활을 글감으로 삼겠다"고 동의를 구한다면, 글에 담긴 제가 추저분하고, 원치 않는 모습이라 해도 글감이 되는 편을 선택할 거예요. (2023.03.03)
여느 책이 그렇듯 『살아가는 책』의 표지를 보면 책의 내용을 얼마간 짐작할 수 있다. 왼쪽에는 빼곡한 책장이, 오른 쪽에는 커튼과 빨래가 늘어진 발코니가 있다. 책과 삶이 반씩 놓인 이 장면은 '책이 한 권의 귀한 타인'이라는 작가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살아가는 책』을 쓴 이은혜 저자는 글항아리 출판사의 편집장이자 두 권의 책을 쓴 작가다. 필연적으로 책과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두 직업을 가진 그는 책을 읽으며 어떤 사람을 생각하고, 그 생각을 다시 글로 옮기며 이 책을 썼다.
"나는 오랫동안 읽기만 하던 독자에서 최근 쓰는 쪽으로 조금씩 건너왔다. 쓴다는 것은 자신을 허물어뜨렸다가 재구축하는 과정이다. 허물다 보면 스스로가 한심해지지만, 구축하다 보면 못생기고 헐거운 자신도 견딜 만해진다. 그건 좋은 면모를 가진 타인들이 내 속에 들어와 계속 뒤엉키기 때문인데,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는 것이 바로 이 책이 쓰이는 과정이었다.(9쪽)"
첫 책을 출간했을 때는 '편집자로서의 정체성'만 가진 상태라고 하셨어요. 지금은 어떠세요? '저자의 정체성'에 익숙해지셨어요?
지금도 제 글을 쓰고 있으면 죄책감이 들어요. '이 시간에 책 기획하고 편집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며 살게 될 같아요. 쓰면서 제 삶이 많이 변했거든요. 책을 읽고, 그것을 현실과 맞대어보고, 이 생각을 다시 글로 쓰면서 과거, 현재, 미래를 계속 넘나들어요. 과거에 겪었던 일을 새롭게 기억하기도 하고, 책에서 선취한 삶의 지향점을 끌어들여서 미래를 바꾸어나가기도 하죠. 이러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저는 계속 글을 쓸 수밖에 없을 거예요.
책을 읽기만 해서는 느낄 수 없었던 변화인가요?
그렇죠. 저는 글로 쓰지 않은 책은 한 번밖에 안 읽거든요. 하지만 『살아가는 책』에서 소개한 25권의 책은 모두 세 번씩 읽었어요. 첫 번째 읽을 때와 세 번째 읽을 때, 제가 느낄 수 있는 의미와 취할 수 있는 가치는 크게 다를 수밖에 없죠.
편집자의 글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편집자는 모든 직업군을 통틀어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편집자는 자기 삶이 편안하고 즐겁고 안락할 가능성이 커요. 독서가 삶의 만족감을 많이 주기 때문이죠. 설사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아도, 책이 나에게 영양분을 준다고 느끼거든요. 그런데 글을 써보면 알아요. 나의 내면이 얼마나 빈곤하고, 가진 게 없는 사람인지요. 이런 자기 비하나 삶의 비극을 이미지화 하는 작업이 인간 본질을 더 잘 보이게 만드는 일인 것 같아요. 그래서 편집자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는데, 읽은 것으로 그치기에는 아깝잖아요.(웃음)
이번 책은 '현실에서 만난 사람들'과 '작가님이 읽은 책'을 연결해서 풀어낸 이야기였어요. 어떻게 기획되었나요?
첫 책이 '책을 만드는 일'에 관한 내용이었으니, 두 번째 책은 책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요즘은 책 읽는 사람들이 폄하받는 시대잖아요. "책을 많이 읽다니 대단하다"라는 말은 사실 반만 진실인 것 같아요. 그 안에는 '책 읽는 사람은 지루하다, 문자 속에 갇혀있다, 삶이 단조로울 것이다'라는 편견이 담겨 있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저는 책을 읽으면서 내 삶을 재음미하고, 사람을 재해석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어요. 작가가 구축한 세계와 현실을 계속 겹쳐보게 되니까요. 여기서 착안해 책과 현실의 넘나들기를 시도해보고 싶었어요.
'책'에 대한 애정과 '사람'에 대한 애정이 고루 드러나는 책이었어요.
사실 저는 쉬는 날이면 거의 외출하지 않고 집에서 책을 읽어요. 하지만 아주 강하지는 못한 것 같아요.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작가들, 글 속에서만 사는 작가들을 보면 소수의 사람과 좁고 깊은 관계를 맺는 모습이 보이거든요. 예를 들어 '프란츠 카프카'가 답장을 안 한다고 원망하는 친구의 말을 듣고 이렇게 편지를 써요. "미안. 너무 중요한 책이라서 덮을 수가 없었어. 늘 폭력적인 관계지. 책이 먼저, 그 다음은 너."라고요. 저는 책을 무척 사랑하지만, 이 정도로 강하지는 않죠. 늘 사람에 기대고 의존해야 살 수 있거든요. 책이 아무리 좋아도 타인을 만나야 살 수 있는, 살의 감촉을 그리워하는 사람인가 봐요. 그게 저의 독서의 방식이기도 하고요.
이 책에 실린 사람의 대다수는 평범하지 않아요. 지속적으로 가정 폭력을 당한 여성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 2층에서 떨어져 자기 팔을 부러뜨린 사람도 있어요. 친족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의 이야기도 등장하죠.
저는 편집자로 일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작가들을 많이 만나잖아요. 그중에는 유명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도 많죠. 그런데 40대 이후가 되면서 그들의 삶에 큰 관심이 없어졌어요. 반면 책과 관계없는 생활인들, 때로 비극적인 경험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재음미할 가치가 있다고 느껴져요. '사무엘 베케트'의 책에 이런 말이 나오거든요.
"그는 비극적인 인물이었네. 바꾸어 말하면 글감으로 다룰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야."
저 역시 이 말에 깊이 동의해요. 글 쓰는 사람에게는 '불행'을 생각하는 게 일종의 습관인 것 같아요. 현실의 가장 어두운 면을 통해서 삶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거죠.
"기억 속에서만 재료를 꺼내 쓰기엔 부족해 몇몇 분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기꺼이 응해주었다"고요. 책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진 건가요?
저는 편집자의 수동성이 몸에 걸쳐져 있어서 처음에는 기억에 의존해서 썼어요. 스스로에게 '작가'라는 타이틀을 붙이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제가 책을 쓰려고 하는데, 인터뷰 좀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도 될지 의문이 들었거든요. 그렇게 60% 가량을 쓰다 보니 이야기와 관계가 너무 빈곤하다는 한계가 느껴지더라고요. 결국, 인터뷰로 방향을 돌려서 정처없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기 시작했죠. 노숙하는 분들을 만나려고 추운 날씨에 서울역 주변을 돌아다니기도 했어요.
이렇게 다양하고 비극적인 삶의 이야기를 어떻게 모았을까 궁금했는데, 비결은 인터뷰였네요. 인터뷰 거절을 당하기도 하셨겠어요.
한번은 합정역에서 폐지 줍는 할머니께 말을 걸었는데, 보기 좋게 거절을 당했어요. 지인 두 명에게도 거절을 당한 경험이 있죠. 아는 언니가 오래전에 이혼을 했는데, 사석에서 이혼에 대한 이야기를 편안하게 하시기에 인터뷰 요청을 했거든요. 처음에는 수락을 했다가 인터뷰 전날 거절의 문자를 보냈어요. 또 한 사람은 자신이 겪은 사랑 이야기를 해줬는데, 제가 쓴 글까지 다 보고 난 뒤에 번복을 했고요.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굉장히 많이 배웠고, 사회적 지위가 있고, 평소에 책을 많이 읽는 등 사회적 자원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은 글 속에서 자신이 희생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아요. 글에는 필연적으로 작가의 시선이 담길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거죠.
반대로 사회적 자원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를 간절히 원하고요.
맞아요.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 비극적인 삶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분들은 자신의 이야기가 글이 된다는 것에 대해 훨씬 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계시죠. 제가 최근에 편집한 '샹바오'의 『주변의 상실』이라는 책이 있는데요. 샹바오가 '부근의 소실'이라는 개념을 창안해 자신의 고향인 '원저우시'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이야기하면서 "모든 사람은 자기 삶을 서사화할 필요가 있고, 그러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죠. 저는 글감으로 살아남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좋아해요. 만약 누군가 저에게 "너의 사생활을 글감으로 삼겠다"고 동의를 구한다면, 글에 담긴 제가 추저분하고, 원치 않는 모습이라 해도 글감이 되는 편을 선택할 거예요.
한스 블루만베르크의 『난파선과 구경꾼』을 소개하며, 바깥에서 타인의 고통을 응시하는 스스로를 '구경꾼'이라 칭한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레슬리 제이미슨의 『공감 연습』에서는 "구경꾼의 죄책감"을 이야기하죠. 피해 서사에 대한 글을 쓰고, 책을 편집할 때 느껴지는 마음의 부채감이 있을 텐데요.
이 책에 등장하는 친족 성폭력 피해자 '푸른 나비'와 '최예원' 씨와는 광화문에서 일인 시위도 같이 하고, 현실적으로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노력해야 발전하는 관계도 있거든요. 그건 글이 주는 부채감의 영향도 있겠지만, 사실 그보다는 글과 삶이 떼어질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입증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라는 말보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곧 나라는 말에 나는 더 끌린다(79쪽)"고요. 내 곁에 가까이 두고 싶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타인의 삶에 촉수를 뻗고, 비효율적으로 경계없이 넘나드는 사람들이요.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고 할까요.(웃음) 그 사람들은 정이나 감정을 나눠줄 때, 너무 많이 퍼줘서 상대에게 거절을 당하는 일이 있으면서도 또 누군가를 만나면 마음을 나누는 일을 절제하지 못하는데요. 저는 이게 제대로 사는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받은 사람은 내색하지 않지만, 그들이 경계없이 넘어와 나눠준 것들로 인해 많이 변하거든요.
아쉽게 넣지 못한 책들도 있나요?
리베카 긱스의 『고래가 가는 곳』에 대해 글을 몇 차례 써서 믿을 만한 지인들에게 보여줬는데, 저의 생태학적 사고와 기후위기에 대한 실천력이 다소 평범한 수준이라는 평을 들었어요.(웃음) 그래서 넣지 못했고요.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도 너무 좋아하는 책이지만, 4.3사건의 역사를 독자의 입장에서 잘 풀어낼 자신이 없었죠. 이 책을 작업하는 동안 스스로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수십 권의 책을 읽은 뒤에야 단 한권의 책에 대해 글을 쓸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제가 그런 사람을 좋아하기도 해요. 글로 우회해서 비효율적으로 사는 작가들을 보면 존경심이 들죠.
선호하는 독서의 방식이 있으세요?
저는 한 권의 책을 깊이 있게, 끝까지 읽는 편이에요. 다 읽고 나면 책의 앞장으로 돌아가서 20~30쪽 정도를 다시 읽죠. 처음 책에 진입했을 때 맥락을 모른 채 읽게 되는 경우가 많아서요. 또 문장 하나만 건질 수 있다면 그 책은 굉장히 가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아름다운 문장을 좋아해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좋은 책'이란 무엇인가요?
저는 쉬운 책에 매력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제가 다르게 해석하고 비틀어서 볼 수 있는 여지가 없으니까요. 프란츠 카프카가 "책은 마음 속의 언 바다를 깨는 도끼"라고 하잖아요. '엘렌 식수'는 그런 책을 '자살같은 책'이라고 표현해요. 저도 이렇게 독자를 완전히 벽으로 밀어붙이는 책을 좋아해요.
이 책을 쓰면서는 '캐슬린 스튜어트', '엘런 식수', '마르그리트 뒤라스', '토니 모리슨' 같은 작가들의 책을 많이 읽었어요. 모두 여성 작가라는 공통점이 있죠. 의도하고 책을 고른 건 아닌데, 최근 여성주의 담론이 출판계에 주를 잇고, 여성 작가의 좋은 책이 다수 출간되면서 그들의 책을 읽는 것이 저의 독서 습관으로 정착된 것 같아요. 지금 저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책은 주로 여성 작가들의 책이에요.
이 책의 마지막 파트 제목은 '늙어간다'였어요. 어떤 모습으로 나이들고 싶으세요?
저는 돌봄을 받는 것에 대한 부채감이 많아요. 돈을 지불해서 누군가에게 맡기고 있고, 나는 잘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머릿 속에 계속 있죠. 『살아가는 책』의 초반에 타인에게 가사 노동을 의지하는 저의 이야기를 쓴 것도 그런 의미에요.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성공이란, 단 한 사람이라도 저에게 돌봄을 받았다고 인정해주는 삶이라고 생각해요.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요.(웃음)
저자의 경험이 책을 편집하는 일에도 영향을 미치나요?
사실 편집만 하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어요.(웃음) 글을 직접 쓰지 않으니까, 글로 평가 받는 데서 자유로울 수 있거든요. 하지만 내 글을 쓰면 끊임없이 평가에 노출된다는 부담이 있죠. 저는 글을 쓴 덕분에 작가가 느끼는 불안을 많이 이해하게 됐어요. 작가의 불안한 심리를 잘 돌보는 편집자가 되고 싶어요.
편집자와 작가는 모두 세상을 관심있게 지켜봐야 하는 일이잖아요. 요즘 주목하는 현상이 있으세요?
불안에 대한 책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생적으로 갖게 되는 불안이 아니라, 직업인으로서 갖게 되는 불안이요. 저는 편집자로서 저자와 대화하거나, 독자에게 책을 판매할 때 "내가 이 상황을 모두 장악하고 있고, 이 책은 좋은 책이다"라는 자신을 갖고 말하거든요.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불안에 떨고 있어요. '저쪽 출판사에서 섭외한 작가가 더 좋은 책을 쓰지 않을까, 이 작가를 다른 독자들이 좋아해줄까?'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올라오지만 티를 내지 않죠. 마찬가지로 각 직업군마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불안이 있을 거예요. 그 이야기를 담은 책을 기획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최근에 했어요.
『살아가는 책』을 어떤 독자들이 읽으면 좋을까요?
자기 기억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들이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돌아보니 추억도 별로 없고, 관계도 깊지 않았다, 너무 일상적인 삶이었다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분들이 이 책을 읽으면 유명한 작가들도 쓸쓸한 기억으로 힘들어 했다는 걸 알게 되실 거예요. 그게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니까요.
반대로 나는 삶을 잘 살아왔고, 친구도 많고, 다들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꼭 읽어보시길 바라요. 사실 그건 나만의 관점일 수 있거든요. 이 책을 통해 타인의 관점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은혜 인문 출판사 글항아리 편집장. 대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3년 6개월간 학술 기자로 근무했다. 제54회 한국출판문화상 편집상을 받았고, <서울신문>과 <한겨레21>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저자들의 탄생, 발전, 만개, 죽음을 모두 지켜본 최초의 목격자이자 조력자이다. 앞으로도 책을 써나갈 그들을 더 잘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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