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임의 식물탐색] 꽃이 피지 않아도 나는 두근거린다
허태임의 식물탐색 8화
있지 엄마, 나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 외롭고 힘들어. 그런데 엄마, 나는 식물들 옆에 있으면 기쁘고 행복해. 사람들 사는 세상에서 하는 고민과 걱정은 안 하게 되거든. (2023.02.28)
전국의 숲을 탐사하고 식물의 흔적을 기록하는 '초록 노동자' 허태임. 식물 분류학자인 그가 식물을 탐색하는 일상을 전합니다. |
오늘은 2월의 마지막 날, 내일은 3월이 시작된다. 날이 좀 풀렸다지만 백두대간 옥석산 정상은 며칠 전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있다. 언 땅을 뚫고 싹을 내는 강인한 식물이 있기는 해도 봄이 왔다고 선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럼에도 봄이 온다는 기대에 그 어느 때보다 설렘이 증폭하는 날이 2월의 마지막 날이 아닐까 싶다. 누군가는 입학과 개학을 앞두고 마음이 들떠서 풀잎처럼 두근거리겠지. 나는 온실에서 키운 모종이 어서 노지로 나가 뿌리를 내리기를 바라며 모처럼 수목원을 한 바퀴 돈다.
겨우내 잠자코 있던 식물들의 삶의 양태가 급변하는 기점이 오늘이기도 하다. 내 주변에 사는 식물들이 겨울을 잘 통과했는지 들여다보느라 오늘 나는 특히 좀 바쁘다. 꽃이 활짝 필 때보다 실제로 내가 식물들 말에 더욱 귀 기울이고 세심하게 살피는 때가 바로 지금이다.
서둘러 꽃을 피울 준비를 하는 식물부터 방문한다. 때맞춰 호랑버들이 겨울눈을 뚫고 꽃차례를 쏘옥 내밀었다. 겨울눈은 혹독한 환경을 무사히 견디기 위해 나무가 선택한 생존 전략이다. 겨울이라는 고비를 아무 탈 없이 통과하기 위하여 나무는 눈을 지키는 일에 힘을 쏟는다. 나무의 눈이라는 것은 분열하고 발달하여 장차 잎이나 꽃이 되는, 한 식물체의 기원과도 같은 기관이다. 그래서 식물의 눈을 말하는 한자 '아(芽)'는 '시초'나 '시작'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길어지는 낮의 시간에 비례해서 나무는 겨울눈을 봉긋하게 키운다. 그 모습을 추적하다 보면 더 많은 종류의 나무들을 미처 다 관찰하기도 전에 빵긋 꽃눈이 터지고 만다. 그러면 나는 반가운 마음에 좋아하다가 돌연 '아휴...' 하고 한숨을 길게 쉰다. 겨울눈 피기 직전의 형태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면 그걸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이듬해를 기다려야 하니까. 자칫하면 몇 년 후가 될 수도 있다. 꽃을 피울 형편이 아니다 싶으면 주저하지 않고 개화를 건너뛰는 게 식물이니까. 그리하여 나는 봄이 오기 전부터 식물의 면면을 관찰하는 일에 내 모든 시간을 맞추게 되었다.
뭐 한다고 얼굴 한 번 볼 시간이 없냐고 못내 서운함을 내비치는 지인에게 식물이랑 약속이 있어서 안 된다고 사정 좀 봐달라고 오히려 내가 부탁을 하는 편이다. 자네가 죽고 못 사는 그 식물도 자기 새끼 보겠다고 꽃 피우고 씨를 맺는데, 사람 안 만나느냐고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반문하는 어르신도 있다. 그러면 나는 대화가 더는 이어지지 않길 바라며 그러게요, 하고 고개를 주억대고 만다. 그리고 속으로 대꾸를 한다.
'저도 그게 궁금해서 한 십 년 넘게 관찰했어요. 흐드러지게 핀 그 많은 꽃들 중에 수정에 성공해서 열매를 맺고 잘 익은 씨앗을 낳는 친구들이 열에 하나는 될까 싶어요. 환경이 안 좋을수록 그 확률은 훨씬 더 낮아지더라고요.'
저마다의 기질에 맞게 호랑버들은 산에 살고 갯버들은 냇가에 산다. 볕 잘 드는 곳의 갯버들은 벌써 꽃을 틔워 강아지 꼬리를 닮은 꽃차례를 살랑살랑 흔든다. 갯버들 군락에 더러 섞여 자라는 희귀 식물 키버들도 꽃이 폈다. 개인적으로 내가 버드나무 종류 중에 가장 좋아하는, 갯버들보다 몇 배는 더 예쁘다고 생각하는 키버들. 그 나뭇가지를 모으고 얽어서 내가 태어나기 전에 할아버지는 키를 만들었다. 할아버지가 남긴 유품과도 같은 그 키를 머리에 쓰고 옆집 할머니 댁에 소금을 얻으러 갔던 예닐곱 살의 기억이 있다. 밤새 악몽에 시달리고 눈을 뜬 아침이었다.
천변 둑에는 벼룩나물과 별꽃과 광대나물이 연둣빛 싹을 틔웠다. 식물 공부를 시작하던 대학원 초년 시절에만 해도 이 무렵 올라온 새싹으로 종을 알아내는 게 그렇게 어려웠다. 내심 흐뭇하면서도 내 앞으로도 세월 꽤 지나갔구나 싶다. 하기야, 연년생 언니랑 소꿉놀이하던 유년의 기억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데, 이제는 언니가 낳은 연년생 남매가 소꿉을 논다. 지금은 별의별 장난감으로 살림살이를 흉내 낼 수 있지만, 30년 전만 해도 시골에 살던 내게는 흙과 돌과 풀이 전부였다. 흙으로 도우를 빚고 주변 꽃들로 장식을 해서 근사한 케이크를 만들곤 했다. 그때 하얀 생크림이라고 덕지덕지 붙였던 게 벼룩나물과 별꽃이고 분홍색 초라고 꽂았던 게 광대나물 꽃이다. 그때는 알지 못했던 이름들...
올괴불나무 꽃눈이 보동보동 부풀었다. 우리 주변에서 일찍 피는 봄꽃은 매화와 산수유다. 하지만 심어 기르는 그들 말고 실제로 우리 숲에서 가장 먼저 꽃눈을 틔우는 나무 가운데 하나가 올괴불나무다. 늦봄에 꽃이 피는 괴불나무와 달리 봄이 채 오기도 전에 올되게 꽃을 피우는 올괴불나무. 그 나무는 언젠가부터 우리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가 되었다. 몇 해 전의 일이다. 네가 외롭지는 않을까 걱정된다고 오래간만에 고향에 내려간 내게 엄마는 말문을 열었다. 식물도 좋지만 그래도 의지할 누군가가 곁에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재차 말했다. 나는 애써 외면한 채 엄마 뒤로 덤불에 핀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와, 엄마 올괴불나무다! 이것 봐 엄마. 아직 숲이 휑한데 혼자 꽃이 폈잖아. 이 연약한 친구가 겁도 없이, 꽃샘추위가 무섭지도 않나 봐. 더 대단한 건 향기야, 향기. 엄마 여기 꽃부리에 코 갖다 대고 좀 맡아봐. 어때? 옅은 치자꽃 향이지?"
세상에 이런 향이 다 있냐며 환갑이 되도록 이걸 모르고 살았다며 엄마는 소녀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그날 이후로 올괴불나무는 엄마의 '최애나무'가 되었고 나는 올괴불나무 앞에만 서면 그날의 속내를 고해성사처럼 고백하게 되었다.
'있지 엄마, 나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 외롭고 힘들어.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 걱정하느라 맞지도 않은 취향을 애써 껴맞추고 행여나 나의 언행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진 않을까 망설이느라 마음이 곪고, 그래서 사람들 만나고 돌아오면 그렇게 헛헛할 수가 없어. 그런데 엄마, 나는 식물들 옆에 있으면 기쁘고 행복해. 사람들 사는 세상에서 하는 고민과 걱정은 안 하게 되거든.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어. 이게 살아있는 거구나 싶어. 식물을 만나고 그들을 돌보는 일이 내게는 일종의 자기 보호야.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어서, 살아낼 힘을 얻을 수 있어서. 엄마가 만사 잊고 나를 반기는 것처럼 나도 그래, 식물들한테 말이야.'
'잎'이라는 삶으로 뚜벅뚜벅 나아갈 눈을 '잎눈' 또는 '엽아(葉芽)'라 말하고 꽃의 길을 사뿐사뿐 걸어갈 눈을 '꽃눈' 또는 '화아(花芽)'라고 한다. 꽃을 품은 꽃눈이 잎눈보다 크기 마련이다. 잎보다 꽃이 더 복잡한 구조를 지녔다는 사실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올괴불나무의 부푼 꽃눈이 꽃으로 변할 날이 머지않았다. 하루, 이틀 그날이 오기를 센다. 엄마 모시고 꽃 보러 갈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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