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소설가 "끊임없이 새롭고 싶다"
『로렘 입숨의 책』
첫 번째 미니 픽션 『로렘 입숨의 책』을 펴낸 구병모 작가는 말한다. "원고의 분량이 줄어도, 그 원고를 쓰는 데에 품이 더 적게 들지는 않았다"고. 작가의 노력은 고스란히 독자에게도 전해진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그의 소설에서는 짧은 분량이 믿기지 않을 만큼 밀도 있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2023.02.24)
첫 번째 미니 픽션 『로렘 입숨의 책』을 펴낸 구병모 작가는 말한다. "원고의 분량이 줄어도, 그 원고를 쓰는 데에 품이 더 적게 들지는 않았다"고. 작가의 노력은 고스란히 독자에게도 전해진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그의 소설에서는 짧은 분량이 믿기지 않을 만큼 밀도 있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등단 이후 거의 매년 소설집을 펴내셨죠. 지난해에는 신작이 없어서 궁금해하는 독자들이 많았을 것 같아요.
어느 해에 신작이 안 나오면, 다음 해에는 두 권 이상 나온다는 뜻입니다.(웃음) 작년에도 열심히 작업하고 있었어요. 올해는 책이 몇 권 더 나올 거예요.
오랜만에 새 책을 출간한 소감이 어떠세요?
책이 나오면 주변에서 축하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게 축하받을 일인가?' 싶었어요. 직장인이 프로젝트를 끝낼 때마다 축하받는 건 아니잖아요. 소설은 뭐가 특별해서, 일반적인 노동과 뭐가 달라서 이런 대접을 받는지 모르겠어요.(웃음) 사람들이 자기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듯이 저도 날마다 제 몫의 일을 성실히 해내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제목이 독특합니다. '로렘 입숨'은 인쇄, 디자인 작업 등에서 레이아웃을 보기 위해 의미 없이 올려둔 더미 텍스트를 의미하는 용어죠. 말이 되지 않는 소설을 쓰는 '그'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 「동사를 가질 권리」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단어이고요.
안온북스 미니 픽션 라인의 첫 책이 정세랑 작가님의 『아라의 소설』이거든요. 그 제목을 보고 막연히 나도 '~의 책'이라는 제목을 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소설을 살펴보다가 제일 마음에 꽂히는 말을 찾아 제목으로 붙였죠. 「동사를 가질 권리」는 제일 마지막에 쓴 소설이거든요. 가장 늦게 찾아온 작품인 만큼, 나에게 중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사를 가질 권리」의 작가노트에서 '이어 붙였을 때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소설을 오래도록 간절히 쓰고 싶었다'고 하셨어요. 어떤 의미인가요?
2009년 『위저드 베이커리』가 출간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저는 한 순간도 쉰 적이 없어요. 이번 책은 저의 16번째 소설집이죠. 하지만 독자가 기억하는 작품은 많아야 2~3개예요. 물론 기억되는 책이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자 복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작가에게 초유의 히트작이 있을 경우, 심지어 그게 데뷔작이었을 경우, 사람들은 그 이후의 모든 책을 다 첫 작품의 프레임을 거쳐서 보게 되죠. 그런 이유로 저는 끊임없이 다른 시도를 해왔던 것 같아요. 독서실의 메뚜기처럼 '이 의자가 편하고 좋지만 다른 의자에도 앉아보고 싶은 마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나'라는 마음으로요. 이것이 아닌 다른 것, 지금이 아닌 언젠가를 내내 고민하다가 결국은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 싶어요.
부담감일까요?
삐딱함이죠. 많은 분들이 저에게 기대하는 건 '흥미진진한 스토리, 신박한 소재, 판타스틱한 전개'예요. 결국 『위저드 베이커리』같은 작품을 또 써주기를 바라죠. 그런 기대를 끊임없이 받다 보니 삐딱하게도 저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꿔요. 꿈을 꾸다 못해 이제는 스토리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지경에까지 다다른 거죠.(웃음) 그 결과가 「동사를 가질 권리」에 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는 매 편마다 소설을 쓴 계기, 작업 과정 등을 밝힌 '작가노트'가 실려 있습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매우 흥미롭게 읽었는데, 작가님께는 이 작업이 어떻게 느껴지셨나요?
사실 작가노트는 안 쓰고 싶었어요. 실제로 제 소설집 중에는 작가의 말조차 수록하지 않는 게 꽤 있죠. 소설로 말할 수 있는 건 온전히 소설로만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거든요. 그런데 앞서 출간된 안온북스의 미니 픽션을 보니, 편마다 작가노트가 있더라고요. 같은 라인으로 출간되는 책이기 때문에 그 콘셉트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시작은 그랬지만, 쓰다 보니 의미있게 느껴지더라고요. 미니 픽션은 분량이 굉장히 짧은 소설이잖아요. 말하고 싶은 바를 많이 압축한 경우, 작가노트가 독자의 이해를 구하는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 원의 꿈」은 간밤에 꾼 꿈을 파는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더 이상 팔 수 있는 꿈이 없자 지난 날의 꿈들을 말하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함께 사는 것 같은 '소소해보이지만 이뤄지지 않는 꿈'이요. 작가님께도 평범하지만, 이루기 어려운 꿈이 있으신가요?
이제 그런 꿈을 가질 나이는 지나서요.(웃음) 대신 저의 20대가 어땠는지 떠올려 보면, 학교를 빨리 졸업하고 싶었고 아무 회사나 들어가서 얼른 돈을 벌고 싶었어요. 당장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취업을 시켜주면 무조건 들어가서 일했죠. 그러다 보니 회사가 영세해서 갑자기 폐업을 하는 일도 종종 겪었고요. 꿈꿀 틈이 없었던 20대때의 제 모습이 이 소설에 반영되었을 수 있겠네요.
「지당하고도 그럴듯한」은 출간을 앞둔 소설가 'A'가 출판사로부터 교정지를 메일로 전달받으며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소설을 대하는 작가님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어요.
이 소설을 쓰게 된 첫 계기가 있어요. 어떤 소설의 교정 작업 중 출판사로부터 "말이 어렵다"는 피드백을 받은 적이 있거든요. 그 의견에 수긍한 건 아니지만, 여러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출판사 요청대로 문구를 바꾸었는데요. 속내에는 '이게 왜 어려울까?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때부터 '조금 까다로우면 안 되는 건가'라는 고민을 많이 했죠. 여기에 그동안 수많은 평가를 들을 때 느꼈던 감정들이 복잡적으로 소설에 표현된 것 같아요. "너무 비현실적이다, 세상에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 노부인이 어디있냐" 같은 말들이요.
그 감정을 소설에 쓰고 나니 어떠셨어요? 후련한 마음이 들기도 했을 것 같아요.
후련하다기 보다는 '또 어떤 비판을 받게 될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웃음)
에세이 청탁은 매번 사양하신다고요.
제가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사는지, 개인적인 생각과 관계, 사고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영업 비밀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까요.(웃음) 또, 청탁이 오는 주제가 대개 과거의 추억일 때가 많아요. 저는 옛날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인데, 글을 쓰려면 잊고 있던 기억을 꺼내야 하잖아요. 주체적으로 에세이를 쓰지 않는 것이 저의 정신 건강 보호를 위해 필요한 일이더라고요. 에세이를 쓸 때는 다른 몸이 필요한 것 같아요.
다작의 비결이 궁금해요. 매일 규칙적으로 작업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나요?
시간을 정해서 글을 쓰면 좋겠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원고지 한 장을 쓰는 날도 있고, 갑자기 10장을 쓰는 날도 있어요. 다만 글이 잘 써지든, 안 써지든 온종일 모니터 앞에 앉아있습니다. 아들이 어릴 때는 시간이 없어서, 그나마 혼자 앉아있을 수 있는 시간에 바짝 글을 썼어요. 지금은 그 어린이가 엄마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나이만큼 자라서 책상에 앉을 수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죠. 그렇다고 더 잘 써지는 건 아니고요. 전보다 멍 때릴 수 있는 시간이 늘었어요.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 같아요.
아이가 어릴 때는 어떻게 소설을 쓰셨어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요.(웃음) 그런데 제가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는 걸 못 견디는 사람이라서요. 저 때문에 인쇄기가 멈추거나, 누군가 곤란해지는 상황이 오면 고통스럽기 때문에 마감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틴 것 같아요. 내용이 만족스럽지 않아도, 기한이 되었다면 일단 보냈어요. 어차피 완벽하게 내 마음에 드는 소설을 쓰는 건 불가능하니까요.
소설을 쓰지 않을 땐 주로 무얼 하세요?
'소설 써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요.(웃음)
북토크에서 이 책을 낭독한다면, 어떤 소설을 읽고 싶으세요?
가장 낭독하고 싶은 건 「동사를 가질 권리」인데, 읽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웃음) 「롱슬리브스」가 좋겠네요. 읽기에도 편하고, 청중들도 쉽게 들어주실 수 있을 거예요. 저를 잘 모르시는 독자분들도 편하게 읽으실 수 있는 소설이죠.
작가님의 신작을 기다려온 독자분들께 전하실 말씀이 있다면요.
저에게는 초단편이라는 형식이 쉽지 않은 과제였어요. 여러모로 서툰 면이 있을 수 있겠지만,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부디 모두 힘내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구병모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편집자로 활동하였다. 2009년 『위저드 베이커리』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구병모 작가는 한 인터넷 웹진에서 <곤충도감> 이라는 작품을 연재했다. 이름을 가리고 봐도 구병모 작가의 작품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작가 특유의 분위기가 살아 있는 작품으로, 용서에 대한 것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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