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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에 다큐가 필요해?
얽힌 타래를 풀어줄 K-pop 다큐의 도래
생에 한 번쯤 깊이 사랑한 것들이 입체적으로 숨 쉬고, 보다 다양한 각도로 조명되는 것을 지켜보는 건 썩 나쁘지 않은 경험이다. 아카이빙의 효과도 크다. (2023.02.01)
케이팝은 콘텐츠의 홍수다, 벼락이다. 그래서 때때로 무덤이다. 이 현상을 관찰하려면 요즘 인기 있다는 그룹 하나를 골라 그들이 일주일 동안 올리는 콘텐츠만 따라가 보면 된다. 스케줄마다 나오는 비하인드 영상은 기본에 요즘 유행하는 각종 챌린지, 멤버마다 돌아가며 진행하는 라이브 방송 알람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휴대 전화를 수시로 울린다. 잘 정돈된 영상으로 올리는 노래나 댄스 커버 영상에 멤버가 직접 찍어 편집한 브이로그도 인기다. 활동기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음악 프로그램 하나에 본 방송 무대에서 멤버별 직캠, 전체 직캠, 얼굴 클로즈업 및 항공샷 직캠까지 양손으로 세기 어려울 정도의 새 영상들이 쏟아진다. 여기에 기획사에서 자체 제작하는 콘텐츠들과 방송국에서 직접 운영하거나 케이팝을 전문으로 다루는 채널에서 배포하는 영상까지 더하면, 정말이지 웬만한 '덕후'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콘텐츠의 산을 만나게 된다.
올라가기는커녕 올려다보는 것만으로 벌써 지치는 그 산에 다큐멘터리가 더해졌다. 올해 초, 부쩍 늘어난 OTT들은 채널 경쟁력 제고를 위해 케이팝과 손을 잡았다. 왓챠는 새해의 시작과 함께 한 사람의 삶을 9개의 사물로 풀어 보는 독특한 콘셉트의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다음 빈칸을 채우시오>를 공개했다. 오마이걸 효정, 더보이즈 큐, 에이티즈 우영, 르세라핌 김채원 네 명을 주인공으로 아이돌 가수나 1/N이 할당된 한 그룹의 멤버로서가 아닌 좀 더 깊이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디즈니플러스는 지난 연말부터 올해 슈퍼주니어, NCT 127, BTS의 제이홉 다큐멘터리 공개를 선언했고, 티빙 역시 총 8부작으로 구성된 케이팝 다큐멘터리 <케이팝 제너레이션> 공개를 시작했다. 케이팝의 근간인 팬덤에서 프로듀싱, K의 정의까지 다채로운 테마로 구성된 시리즈는 케이팝을 깊이 즐기는 이들에서 단순한 호기심을 가진 이들까지를 아우르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흥미로운 건 이러한 다큐멘터리에 대한 팬덤의 반응이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여행 다큐멘터리를 보고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음식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케이팝 다큐멘터리에 가장 빠르고 뜨겁게 반응하는 건 역시 그들일 수밖에 없었다. 각 작품의 예고편이 공개된 후, 케이팝 팬들의 반응은 호와 불호가 분명히 갈렸다. 오히려 불호가 훨씬 강하게 끓어올랐다. 지금껏 케이팝의 이름을 앞세우고 만들어진 대부분의 콘텐츠가 담보하지 못한 다루는 대상에 대한 존중과 이해, 그리고 그런 콘텐츠를 세상에 내놓게 하는 '케이팝만 있으면 뭐든 된다'는 제작자들의 안일한 마인드가 깊은 불신으로 자리한 탓이었다. 팬덤이라는 그럴듯한 호칭으로 부르고 있지만 '빠순이'로 호명하던 크게 달라지지 않은 멸시의 시선, 빌보드가 아무리 익숙해져도 케이팝은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리그'라는 인식 아래 무엇에든 논외로 취급당해온 현실에 대한 냉소도 뚜렷했다. 이미 과포화 상태에 달한 쏟아지는 케이팝 콘텐츠에 대한 피로도 한몫했다.
그래서, 오히려 케이팝에는 더 많은 다큐멘터리가 필요하다. 전제를 하나 달자면, 이 산업에 대해 최소한의 애정과 존중을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가 더 필요하다. 다큐멘터리의 기본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나 현상을 허구를 배제하고 사실적으로 담은 영상이나 기록물'이다. 현재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쏟아지는 케이팝 콘텐츠는 사실과 허구가 가장 민감하고 예민하게 교차하는 독특한 자기장 안에 자리한 결과물이다. 그들은 현실이지만 꿈이고, 음악이지만 인생이며, 빛이자 어둠이고, 우상인 동시에 가족이다. 지금까지 그 어떤 글이나 영상도 케이팝을 명쾌하게 정의하거나 해설하지 못한 건 케이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고유의 난해성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폭발적으로 발산한 케이팝 콘텐츠들은 이 미묘한 시소게임 가운데 꿈, 음악, 빛, 우상에 대부분의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왔다. 그렇다면 이제 현실, 인생, 어둠, 가족으로 조금씩 화살표를 움직여 볼 차례다. 서툴러도 좋다. 길게 보면 30년, 끝을 알 수 없도록 복잡하게 얽힌 케이팝 실타래를 단번에 풀어줄 명쾌한 작품이 갑자기 태어날 리 만무하다. 그래도 생에 한 번쯤 깊이 사랑한 것들이 입체적으로 숨 쉬고, 보다 다양한 각도로 조명되는 것을 지켜보는 건 썩 나쁘지 않은 경험이다. 아카이빙의 효과도 크다. 10년이 넘도록 '내년이면 끝날 유행' 취급받던 케이팝이 이렇게나 덩치를 불렸다. 지금 세대의 팝 음악이 어떤 원리로, 어떻게 성장하고 부서지고 있는지 그 모두를 건조하고 때론 축축하게 담아낼 더 많은 눈이, 입이, 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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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