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을 기다립니다] 앙꼬 작가님께 - 정원 만화가
<월간 채널예스> 2023년 2월호
"고난 속에 성장한다"는 말을 반만 믿어요. "항상 맑으면 사막이 된다"는 스페인 속담도 있대요. 사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반만 믿고 싶은 이유는 고난 속에 있던 아이들이 결국에는 잘 지내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입니다. 진주와 정애가 부디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2023.02.01)
안녕하세요, 앙꼬 작가님. 만화 그리는 정원이라고 해요. 아마도 저를 모르실 테죠? 모르는 사람에게 편지를 받는다면 저는 조금 당황스러울 것 같아요. 작가님은 어떠신가요? 혹 당황하셨다면 당황해하지 마세요. 편지에 제 딱한 사정을 전하는 등 절망을 담지는 않을 거예요. 저는 앙꼬 작가님의 만화를 무척 좋아하고, 편지에는 작가님의 만화가 어떻게 좋은지에 대한 노래를 담을 예정이에요. 팬레터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게 기쁜 소식이 있었어요. 바로 이 편지를 쓸 수 있게 해준 원고 청탁이었어요. 좋아하는 저자에게 편지를 쓰는 일인데, 청탁 메일을 받자마자 앙꼬 작가님이 떠올랐습니다. 『나쁜 친구』를 읽고 나서 지금까지 작가님의 새 책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2015년 겨울에 처음 『나쁜 친구』를 읽었습니다. 찬 공기와 유난히 잘 어울리는 만화였어요. 단숨에 읽고 나서 마지막 페이지에 담긴 진주를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진주가 서 있는 곳이 하필 버스 정류장이어서, 버스 정류장에 잠잠히 서 있는 사람을 보면 진주를 떠올렸습니다. 진주는 잘 살고 있을까요? 무엇보다 정애는 잘 살고 있나요? 2022년인 지금도 여전히 골목골목에는 진주와 정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진주와 정애를 만난다면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 싶어요. 며칠 뒤면 크리스마스니까요.
작가님, 오늘 도서관에서 작가님의 단편 「상현이의 편지」를 읽었어요. 천막에서 지내던 상현이가 아침 7시에 자는 아버지를 깨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버지가 용산 남일당 건물로 무사히 갈 수 있도록요. 그렇게 나간 아버지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작가님의 만화에는 항상 너무 일찍 커버린 아이들이 등장합니다. 상현이는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하고 첫 월급을 양친에게 나눠 줍니다. 오토바이에서 균형을 잃고 떨어져 다치기까지 합니다. 상현이는 아버지를 깨운 걸 후회하고 있을까요? 상현이가 부디 그날을 곱씹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후회가 얼마나 삶의 균형을 무너뜨리는지 알고 있어요.
오늘은 크리스마스예요. 저는 오늘 배우자와 함께 예전에 살던 동네에 가보았어요. 예전에 살던 아파트에는 지금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아요. 그 동네가 재개발 지구에 들었고, 얼마 전 철거 작업을 시작했거든요. 아파트 단지 안은 아주 캄캄했습니다. 한 동짜리 아파트였는데, 주차장을 밝혀주던 가로등이 모두 없어졌더라고요. 단지 안으로 잠시 들어가 보았습니다. 매일 쓰레기를 버리던 분리수거장을 지나 경비실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어두컴컴한 단지 내에는 아파트만큼 오래 산 나무들이 여전히 서 있었어요. 단풍나무와 은행나무, 대추나무, 벚나무, 목련 등 다양한 수종이 있던 아파트였는데, 이 나무들이 곧 잘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격히 어두워졌습니다.
저는 목련을 가장 좋아했어요. 목련처럼 부지런한 나무가 또 없거든요. 목련은 초봄에 꽃을 피우고 나서 꽃이 모두 떨어진 뒤에 바로 솜털 같은 봉오리를 만들어요. 늦겨울에는 단단하고 질겨 보이는 '가죽옷'을 입습니다. 그 엄지만 한 봉오리가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고 초봄에는 가죽옷을 벗어 던지고 꽃을 활짝 피우는 거예요. 그때쯤엔 땅바닥에 목련이 떨어뜨린 가죽옷이 굴러다닙니다. 작가님도 이토록 부지런한 과정을 꼬박꼬박 들여다보면 목련을 좋아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목련은 굉장히 사랑스럽고 강인한 나무입니다.
오래된 아파트에는 곧잘 서 있던 목련을 아쉽게도 이제 찾아보기 어려워졌어요. 요즘은 낙화 처리가 번거롭고 병충해를 유발한다는 이유로 목련을 거의 심지 않거든요. 이제는 벚나무를 많이 심는다고 합니다. 단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이유로 아파트 단지의 조경수로 목련을 심는 게 유행이던 시기가 있었다는데, 그 시기가 꼭 이 아파트 같았습니다.
제가 살던 집의 통로까지 들어가 보려고 했지만 결국 돌아 나왔습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게 괜히 무서웠어요. 항상 지나던 통로 앞에 서면 뭔가 달라질 것 같았거든요. 거기서 살았던 기억이 어두컴컴한 통로처럼 될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래도 아쉬워서 눈 딱 감고 올라가 보려고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올라가 보지 않은 게 무척 다행입니다. 어쩌면 그 마음이 진주의 마음과 포개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궁금하지만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미래. 모텔방에서 미래를 나누던 진주와 정애가 떠올랐습니다.
그 내레이션을 옮겨 적습니다. 진주는 여전히 바닥을 보며 걷나요?
"난 오랫동안 정애를 그리워하면서도 혹시나 너를 만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혹시나 너를 보게 될까 봐."
오늘은 작가님의 만화 『삼십 살』을 읽었습니다. 작가님의 일상을 들여다본 느낌이라 작가님과 한결 가까워진 기분입니다. 비록 혼자 키운 내적 친밀감이지만요. 『나쁜 친구』의 원래 제목이 '알 수 없는 일들'이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좋아하는 만화의 가제를 안다는 건 팬으로서 큰 수확입니다. 나만 아는 밴드처럼 나만 아는 정보 같아서요. 『삼십 살』에 언급된 단편들을 모두 읽고 싶습니다. 근데 절판된 책이 꽤 많더라고요? '새만화책'이라는 출판사가 저에겐 어떤 전설처럼 느껴집니다. 언젠가 새로이 묶인 앙꼬 작가님의 단편집을 읽고 싶어요.
반년 정도 사용한 작업실을 오늘 정리했어요. '해변'이란 작업실인데 작업실 이름은 김현 시인님이 지어주셨어요. 참 예쁜 이름이죠? 올여름과 가을은 '해변'에 붙어살았습니다. 작가님이 집을 놔두고 왜 굳이 작업실에서 잠을 자고, 시간을 보내는지 알 것 같습니다. 작업실은 더없이 소중한 공간이에요. 작업실에 앉아 있으면 단정한 옷을 입고 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해변'에서 옮겨 온 짐을 하루 종일 정리했습니다. 마감을 앞둔 만화 원고가 있는데 어쩌죠. 고작 34일 남았습니다. 편집자님께 연락해서 마감을 늦춰달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습니다. 이미 미룰 대로 미룬 터라서요. 만화가, 이거 괜찮은 직업인가요?
도서관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오늘은 만화 콘티를 그렸습니다. 그리다가 지쳐서 바람 쐴 겸 열람실에서 나와 커피 자판기를 찾아 헤맸어요. 팬데믹 이후로 제가 다니는 도서관에는 커피 자판기가 없어졌습니다. 혹시 도서관 근처에 있을까 돌아다녔지만, 결국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 들고 나왔습니다. 저는 도서관 커피를 참 좋아합니다. 동전을 넣으면 불이 들어오는 자판기는 너무 예쁘지 않나요. 그리고 도서관 커피는 하나도 싱겁지 않아요. 걸쭉하고 달콤합니다. 만화 원고 마감까지 28일 남았습니다. 어쩌죠. 도저히 제시간에 못 맞출 것 같아요.
작가님, 놀라운 사실을 말씀드릴게요. 만화 원고 마감이 이제 25일 남았습니다. 책상에 앉으면 자꾸 한숨이 나오고 바닥에 눕고 싶어집니다. 편지에 우는 소리를 적지 않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편집자님께 못 하겠다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계약까지 해놓은 그림책 일을 그만둔 작가님의 일화를 『삼십 살』에서 읽었습니다. 그 용기가 부럽습니다...
지금은 새벽 1시 47분이에요. 함께 살고 있는 '크림'이란 강아지가 있는데 심장병을 앓고 있어서 가끔 새벽에 힘들어합니다. 크림이가 잘 잠드는 걸 지켜보면서 편지를 쓰고 있어요. 그리고 이 편지는 내일이 마감입니다. '마감이 있는 편지'라니 꼭 어떤 에세이의 제목 같네요. 크림이가 잠이 든 것 같아요. 저도 잠에 들어야겠어요. 그럼, 아침에 일어나서 편지를 이어 쓸게요.
오늘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나쁜 친구』를 다시 읽었습니다. 저는 "고난 속에 성장한다"는 말을 반만 믿어요. "항상 맑으면 사막이 된다"는 스페인 속담도 있대요. 사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반만 믿고 싶은 이유는 고난 속에 있던 아이들이 결국에는 잘 지내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입니다. 진주와 정애가 부디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편지가 언제 작가님께 당도할지 모르겠지만, 멀리서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주변에 작가님의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그 마음을 안고 부디 오래 쓰고 그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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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사람. 가끔 글도 쓴다. 단편 만화 「노르웨이 고등어」, 「삼점몇키로」를 그렸고, 웹툰 플랫폼 <코미코>에서 만화 「불성실한 관객」을 연재했다. 청소년 소설 『옥수수 뺑소니』에 그림을 그렸다. 장편 만화 『올해의 미숙』, 『뒤늦은 답장』을 펴냈다.
<앙꼬> 글,그림9,100원(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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