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임의 식물탐색] 나와 팽나무를 연결해주는 59번 국도를 따라서
허태임의 식물탐색 6화
노랑팽나무를 처음 발견한 후로 꼬박 2년이 지났다. 그러는 동안에 나의 포부는 팽나무에 대한 경외심으로 바뀌었다. 그들의 무언가를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어쭙잖은 식견보다는 조금 다른 형태의 꿈이 생긴 것도 같다. (2023.01.31)
전국의 숲을 탐사하고 식물의 흔적을 기록하는 '초록 노동자' 허태임. 식물 분류학자인 그가 식물을 탐색하는 일상을 전합니다. |
전남 광양에서 강원도 양양까지 내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59번 국도가 있다. 목포에서 신의주까지를 잇는 1번 국도와 동해안을 끼고 부산부터 강원도 고성까지 오갈 수 있는 7번 국도의 명성에 비하면 59번 국도는 좀 낯설지도 모르겠다. 주로 산간 지방의 소도시들을 연결하는 구불구불한 길이다. 그 도로가 가야산국립공원을 통과하는 구간인 경남 합천과 경북 성주의 경계에 내 고향 마을이 있다. 어릴 적 나는 엄마를 따라 59번 국도를 타고 어떤 날은 경남으로, 어떤 날은 경북으로 장을 보러 갔다. 59번 국도는 경북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나와 경남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옆 동네 친구를 이어주는 길이기도 했다. 옛길에 아스팔트를 입힌 그 국도를 들어서면 예나 지금이나 이리저리 구부러져 있어서 좀처럼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심지어 아직 포장이 덜 된 구간도 있다.
생물학과 대학원생으로 식물 분류학을 전공하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식물을 찾아 전국을 누비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차량용 내비게이션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25만분의 1로 축소한 전국 도로 지도가 식물 탐사의 필수품이었다. 그 지도를 짚어가며 전국의 정말 많은 길을 짚고 다녔다. 그때의 나는 학위 주제였던 팽나무속(屬)에 해당하는 종들을 어떻게든 다 만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결연했다. 아직 찾지 못한 한국의 팽나무속 식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선배 학자들이 남긴 기록에만 등장할 뿐 생존하는 학자들 앞에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던 노랑팽나무. "노랑팽나무 찾아 삼만리"를 입버릇처럼 되뇌면서 나는 뭔가 비장미 넘치는 식물학도이기를 바랐던 것도 같다. 한반도를 세로로 연결하는 1번과 3번과 5번과 7번 국도를 수없이 타고 다녔다. 그 길들을 축으로 내륙의 깊은 곳으로 진입할 때는 더 많은 국도와 지방도를 이용했다.
그러면서 나는 59번 국도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어릴 때 내가 고향에서 버스를 타고 다녔던 길보다 구불텅한 구간이 훨씬 더 많다는 것, 전라남도에서 강원도까지 거의 500km를 연결하는 그 길을 마음 먹고 한 번에 건너가려면 보통 10시간 정도가 걸린다는 것, 갑자기 나타나는 비경 때문에 갓길에 차를 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너무 자주 발생하므로, 예상 소요 시간 안에 절대 도착할 수 없다는 것.
실제로 59번 국도는 나와 팽나무를 연결해주는 길이다. 그 길은 나 혼자 명명해 놓은 '팽나뭇길'이다. 전남 광양에서 출발한 국도가 섬진강을 따라 경남 하동을 지나는 구간에 팽나무가 많이 산다. 예부터 사람 살기 좋다고 마을이 형성된 곳에는 어김없이 아름드리 팽나무 고목이 있다. 좀 더 북진해서 지리산의 동쪽을 돌고 돌아 경남 산청으로 진입한 길은 합천 해인사를 지나간다. 그러고는 행정 구역이 경북으로 바뀌면서 통일 신라 시대의 절 법수사의 터가 길의 우측에 등장한다. 해인사에 버금가는 규모였을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지금은 보물 1656호로 지정된 법수사지 삼층석탑과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다. 그 풍경은 내게 익숙하다. 어릴 때 나와 내 고향 친구들은 당간 지주를 '젓가락바위'라고 불렀다.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두 개의 돌기둥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둔다고 어른들에게 들었던 것도 같다.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알려진 당간 지주와 그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석탑을 근거로 절의 규모가 거대했을 것이라고 법수사지 발굴단은 추측한다. 법수사지 당간 지주는 팽나무 고목과 한 몸처럼 붙어 있다. 내 고향 사람들은 그 팽나무를 신처럼 여겼다.
길은 성주군 수륜면에서 김천 방면으로 북진해서 선산을 통과하여 상주 낙동강 구간에 이른다. 강처럼 S자를 여러 번 그리면서 예천 삼강주막을 지나고 용궁면에 닿는다. 거기에는 일찍이 1998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500살을 훌쩍 넘긴 팽나무가 있다. 봄에 꽃 필 때 보면 나무 전체가 노랗다고, 한 곳에 뿌리내려 수백 년을 잇는 근본이 있는 나무라고 마을 주민들이 붙인 이름이 '황목근(黃木根)'이다.
문경시 산양읍을 지나면서 도로는 높은 산들 사이로 들어가 더 좁아지는 느낌이 든다. 월악산 구간이 시작되고 행정 구역은 충청북도로 바뀐다. 그러면 따뜻한 남부 지방을 선호하는 팽나무는 자취를 감추고, 그보다 북쪽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다른 팽나무속 종들이 나타난다. 왕팽나무와 풍게나무가 월악산 동쪽으로 이어지는 59번 국도에 띄엄띄엄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남한강 상류를 만나고 길은 도담삼봉을 지나 소백산 북서쪽 자락을 끼고 협곡처럼 휘어진다.
그 깊은 곳에서 왕팽나무 같기도 하고 풍게나무 같기도 한, 가늠이 잘되지 않는 팽나무 한 그루를 운명처럼 만났다. 바로 노랑팽나무였다. 그 친구를 찾아 나선 지 정확히 10년 되던 해의 일이다. 처음에는 왕팽나무와 풍게나무의 교잡종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겉모습으로 구분하기 어려울 때 팽나무속 식물은 열매를 까서 그 안에 든 씨앗의 표면을 보면 정확해진다. 우리가 복숭아나 살구의 씨앗으로 알고 있는 딱딱한 그 부분은 씨앗을 보호하고 있는 갑옷과도 같은 부위, 내과피다. 팽나무속 종들은 그걸 자세히 들여다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보통 식물의 내과피는 나무 재질이지만 팽나무는 특별하게도 '아라고나이트'라고 하는 광물질이다. 달팽이 껍질과 같은 성분. 그러니까 팽나무속 식물은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스스로 광물질을 만들어서 씨앗을 엄호하고 종족 번식에 성공했다. 그래서 내과피 표면 모양이 종마다 다르다. 풍게나무와 왕팽나무는 특히 차이가 확 난다. 노랑팽나무가 그 두 나무의 교잡종이라면 내과피의 형태도 그 둘을 섞어 놓은 모습이어야 한다. 하지만 노랑팽나무는 영락없이 왕팽나무를 닮은 게 아닌가. 여러 종류의 현미경으로 내과피의 안팎을 재차 확인했다. 다시 살펴본 잎과 열매와 꽃의 구조도 왕팽나무와 가장 가까웠다. DNA 염기 서열을 나열해서 유전자 분석까지 더한 후에야 왕팽나무의 변종(변이 개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랑팽나무를 처음 발견한 후로 꼬박 2년이 지났다. 그러는 동안에 나의 포부는 팽나무에 대한 경외심으로 바뀌었다. 그들의 무언가를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어쭙잖은 식견보다는 조금 다른 형태의 꿈이 생긴 것도 같다. 같은 행성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로서 한참이나 대선배인 그들의 말귀를 좀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지혜를 얻고 싶은 것이다.
충북 단양에서 소백산을 다 통과한 59번 국도는 영월의 남부로 들어간다. 간이역인 연당역을 지나면서 좀풍게나무가 나타난다. 한반도 중부이북부터 중국 동북부 지방까지 넓게 사는 좀풍게나무. 영월 읍내를 통과하고 동강을 건너서 정선으로 이어지는 그 길은 과거 광산으로 흥했던 역들이 놓인 구간이자 지금도 석회 채광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곳이다. 석회암 지대를 선호하는 좀풍게나무가 그래서 많이 살기도 하고, 또 안타깝게도 많이 뽑혀 나가기도 하는 구간이다.
길은 산간 지방을 돌고 돌아서 정선의 읍내로 이어지는데, 정말이지 너무 예뻐서 단번에 통과할 수가 없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보면 조양강을 만나고 그 상류인 오대천에 닿는다. 오대천 구간은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린 채 지나게 된다. 그러다가 정선 가리왕산 알파인 경기장 앞을 지날 때에는 입이 쩍하고 벌어진다. 스키장을 만든다고 산을 파헤쳐 놓은 모습이 흉해서, 주변 산들과 너무 동떨어진 모습이 꼭 다른 세상 두 개를 붙여놓은 것 같아서다.
가리왕산을 다 지나면 평창군 진부면이다. 오대천과 59번국도가 철길처럼 나란히 오대산 월정사까지 이어진다. 전나무 숲을 지나면 길은 오대산국립공원 진고개 정상휴게소를 넘고 강릉시로 접어든다. 여기서부터 연곡천을 따라 그야말로 오지 산길이 지독하게 꼬불꼬불 이어진다. 59번 국도는 연곡천과 함께 양양 남대천에 닿고 마침내 양양대교에 이르러 7번 국도를 만나면서 끝이 난다. 59번 국도가 연결해준 7번 국도를 타고 북으로 올라가면 좀풍게나무가, 남으로 내려가면 팽나무가 동해안을 따라 줄줄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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